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삼국지연의와 실제의 제갈량(諸葛亮)

중은우시 2006. 2. 7. 13:36

제갈량이 뛰어난 촉의 재상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삼국연의에서와 같이 지혜의 화신으로 묘사되는 것은 실제의 그와 차이가 있다. 최근에 사료를 찾아서 비교한 사람에 의하면 삼국연의의 내용은 과장, 허구가 많다는 것이다.

 

1. 火燒博望坡 (박망파를 불지르다) : 이것은 유비가 한 일이다. 건안 7년에 일어났고, 제갈량이 출도한 것은 건안 12년이 되어서이므로 제갈량과 관계가 없다.

 

2. 草船借箭(풀을 두른 배로 화살을 빌리다) : 이것은 손견, 손권부자가 한 일이다. 각각 유표와 유수를 칠 때 일어난 일이다.

 

3. 借東風(동풍을 빌리다) : 동지때에는 동남풍이 많이 분다. 이것은 조조가 재앙을 입은 것이지 인간이 인위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4. 赤壁之戰(적벽지전) : 손권에 격장지계를 쓴 것은 맞으나, 나머지는 다 허구이다. 즉, 여러 선비와 설전을 벌인 것, 주유에게 격장지계를 쓴 것, 군영회, 고육계, 연환계등등

 

5. 三氣周瑜(주유를 세번 화나게 만들다) : 적벽지전이 끝난 후부터 주유가 병으로 죽기까지의 2년동안 제갈량은 영릉일대에서 물자조달을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기본적으로 주유와 만날 기회가 없었다. 주유가 병으로 죽고 나서 촉에서 사신으로 간 대표도 방통이었고, 제갈량이 아니었다.

 

6. 征漢中(한중정벌) : 한중정벌때의 전선 총지휘관은 유비였다. 제갈량은 성도에 남아서 물자조달을 책임졌다.

 

7. 七擒孟獲(맹획을 7번 포로로 잡다) : 역사상 제갈량이 남정을 한 기록은 있다. 그러나, 맹획을 일곱번 사로잡았다는 것은 <<삼국지>> 정사에는 기록이 없다. 단지 배송지가 <<진한춘추>>를 주석하면서 <<칠금칠종>>이라는 한마디를 적었을 뿐이고,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맹획은 후에 촉에서 어사중승을 지내는데 문관이다.

 

8. 空城計(공성계) : 당시 제갈량은 섬서성 안강현에 있었고, 사마의는 지금의 하남성 남양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렇게 거리가 먼데 공성계를 쓸 여지가 없다.

 

9.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다 : 이런 사실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제갈량이 죽으면서 계략을 썼기 때문이 아니라, 사마의가 의심이 많아서 그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