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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진시황릉(秦始皇陵)의 아홉 가지 해결되지 않은 의문

by 중은우시 2005. 9. 1.

아래 글은 호련왕(胡連旺) 진시황릉구대미단(秦始皇陵九大謎團)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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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의 배치

 


3D로 작업한 진시황릉의 전체적인 구조

 

기원전 259년 음력 정월. 비범하게 생긴 사내 아이가 조나라의 한단에서 태어났다. 그가 바로 중국역사상 첫번째 통일왕국을 창립하게 되는 진시황이다. 그는 13세에 진나라의 왕에 오르고, 22세에 옹성(雍城)에서 성인식을 가지고, 정식으로 친정을 하게 되며, 39세에 나머지 6국중 마지막으로 남았던 제왕건을 포로로 잡으면서 통일을 이룩하였다. 이후 50세가 되던 해에 사구평대(沙丘平台, 현재의 하북성 거록현)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후의 진릉(秦陵)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신비로운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삼보고사(三輔故事)>>의 기재에 의하면, 초패왕 항후가 관중으로 들어온 후 30만명을 시켜 진릉을 도굴하게 하였다고 한다. 발굴과정에서 갑자기 한 마리의 금기러기가 묘에서 날아나왔으며, 이 금기러기는 남쪽을 향하여 날아갔다고 한다. 이후 200여년이 흐른 후인 삼국시대인 보정원년에 어떤 사람이 금기러기를 장선이라는 관리에게 바치는데, 장선은 금기러기에 쓰인 글자를 보고 이것이 바로 진시황릉에서 날아간 그 금기러기라고 판단한다는 등 신비한 전설은 진시황릉에 신비로움을 더해주었다.

 

여산(驪山)의 자락에 놓인 진시황릉은 봉토의 북쪽으로는 침전과 예의건축들, 사관건축들이 있고, 봉토밖에는 10킬로미터의 내외성벽이 있으며, 봉토의 주위 및 동서남북에는 수백좌의 지하배장갱(地下陪葬坑)이 있다.

 

처음으로 진시황릉에 대하여 기록한 사람은 사마천이다. 그는 <<사기. 진시황본기>>에서 진시황릉에 대한 160자의 글자를 남겼다. <<사기>>에 따르면 무덤의 높이는 50여장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당시의 치수를 환산하면 현재로 말하면 115미터 정도가 된다. 1961년 서안의 문물관리소에서 측량하였을 때의 진시황릉의 분묘높이는 약 43미터였고, 1982년 다시 측량한 결과는 55.05미터였다. 아마도 이천년간의 세월이 흐르면서 높이가 절반 정도로 줄은 것으로 생각된다.

 

1974년 3월 29일 농민에 의하여 발견된 병마용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다시 진시황릉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병마용이 그렇게 큰 규모일 것이라고는 농민은 물론이고 고고학 전문가들도 생각하지 못하였었다. 병마용 배장갱만 보더라도 2만평방미터에 달하고 사람, 말모양의 도용이 8000여건에 달하며, 청동기는 10만여건에 달한다.

 

이후 20년간의 연구로 진시황릉의 동쯕에서 백여좌의 말 배장갱, 17개의 배장묘를 발견하고, 황릉의 서쪽에서 31좌의 진금이수(珍禽異獸) 배장갱, 1개의 말 배장갱, 61좌의 소형묘갱을 발견하였다. 10대의 채화동차마, 목차마는 지궁의 서쪽에서 발견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진시황릉 북쪽에서 하나의 비교적 큰 동물배장갱을 동쪽 내외성벽사이에서 개갑갱, 백희용갱등을 발견하였다.

 

진시황릉과 관련하여 해결을 기다리는 몇 가지 수수께끼가 있다.

 

첫째, 지궁(地宮)은 얼마나 깊이 있는가?

 

최근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진릉 지궁은 동서로 260미터, 남북으로 160미터, 총면적이 41,600평방미터로, 국제규모의 축구장 5개 넓이가 된다고 한다. 지궁은 수혈식(竪穴式)이라고 한다.

 

사마천의 기재에 의하면 "천삼천(穿三泉, 세 개의 지하수를 뚫고 내려갔다)"고 되어 있고, <<한구의(漢舊儀)>>에 의하면 "이심이극(已深已極, 깊이가 끝까지 갔다)"라고 되어 있다. 이런 기재로 봐서는 더 이상 깊이 팔 수 없을만큼의 깊이로 팠다는 말이다.

 

물리학자인 정조중(丁肇中) 선생은 여기에 흥미를 느끼고, 현대의 하이테크기술을 활용하여 진명(陳明)등 3명의 과학자들과 같이 연구하여 글을 썼는데, 추산하기로 진릉지궁의 깊이는 약500미터에서 1500미터에 이를 것이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러한 숫자는 터무니 없는 것이다. 1000미터라고만 쳐도, 진시황릉에서 북쪽에 있는 위하(渭河)까지의 낙차보다 더 깊다. 이렇게 되면, 지하수를 배수하는데도 문제가 될 뿐아니라, 위하의 물이 지궁으로 흘러들어올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다만, 현대과학기술을 활용하여 이런 추측을 해보았다는데는 의미가 있다.

 

현재 고고학자들과 지질학전문가들이 진릉지궁의 깊이에 대하여 여러가지 연구를 한 결과로는 지궁입구에서부터 실제깊이는 약 26미터정도이고, 진나라때의 지표면에서는 약 37미터가 될 것이라고 하며, 여기에서 크게 차이는 없을 것으로 본다.

 

둘째, 지궁에는 몇개의 문이 있는가

 

2002년 9월 17일, 사람들은 텔레비전 생방송을 통하여 고고학자가 피라미드내부공간을 조사하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고고학자들이 첫번째 석문에서 로보트를 집어넣은 후, 예상밖으로 중간에 석문에 가로막힌 바 있다. 진릉의 지궁에는 몇 개의 묘문이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하여는 <<사기>>에 이미 답이 적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았을 뿐이다. <<사기>>에는 "일이 끝나고, 이미 묻었다. 중선을 닫고(閉中羨), 외선문을 내렸다(下外羨門), 모두 닫겨서 공인과 장인들이 같혔으며, 다시 나온 자가 없었다"

 

관과 부장품을 중문 안에 놓아둔 다음에, 공인과 장인들이 중문안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돌연 중선문을 닫고, 하선문을 내렸다. 이로볼 때 내선문(內羨門)이 하나 더 있을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지궁에 3개의 문이 있을 것이라고 개략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사마천이 중선문은 "닫았다"고 하고, 하선문은 "내렸다"고 표현을 달리한 점이다. 이로써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중선문은 여닫을 수 있는 문이었으나, 외선문은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선문도 중선문과 유사했을 것이고, 세개의 문은 아마도 일직선상에 있을 것이다.

 

셋째, "상구천문, 하구지리(上具天文, 下具地理)"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진릉지궁에는 "위로는 천문을 구비했고, 아래로는 지리를 구비했다"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고고학자는 "상구천문는 묘실천정의 회화나 조각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 달, 별등을 그렸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의 진릉에도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최근에 서안 부근에서 발견된 한나라묘에서도 천문과 지리의 벽화를 볼 수 있다. 위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해, 달, 별의 모양을 그리고, 아래에는 산과 내를 대표하는 벽화를 그렸다. 이로서 추단하면, 진릉지궁의 위에는 아마도 28성수도가 완벽하게 그려져 있고, 아래에는 수은을 대표로 하는 산천지리를 배치하였을 것이다.

 

넷째, 지궁에 "수은(水銀)"을 묻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진시황이 수은으로 강, 하, 바다를 만들었다는 것은 <<사기>>, <<한서>>에 비슷한 문자가 있다. 그러나, 능묘에 수은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도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현대의 과학기술의 발전은 여기에도 하나의 답을 제공해주고 있다. 지질학자인 상용, 이동 선생은 두번에 걸쳐 진새황릉의 흙을 채취하여 측정하였는데, 수은이상반응이 나타났다. 다른 토질에서는 수은반응이 없었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바탕으로 <<사기>>에 기재한 진시황릉내에 수은을 묻었다는 기재는 믿을 만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지궁에 왜 대량의 수은을 묻었는지에 대하여는 북위의 학자인 여도원의 해석은 수은은 강, 하, 대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지리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즉, 수은은 산천지리를 상징하여 상구천문에 대응하는 하구지리를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다섯째, 지궁에 보물은 얼마나 묻었을까?

 

"기진이보가 가득 묻혔다"는 말은 사마천이 한 말이다. 사마천보다 조기의 대학자인 유향(劉向)은 일찌기 이렇게 탄식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자고이래로, 시황제처럼 묻은 경우는 없었다". 그렇다면 지궁에는 어떤 기세진보가 묻혀 있을 것인가?

 

<<사기>>에 명문으로 기재한 것은 "금안(金雁)", "주옥(珠玉)", "비취(翡翠)"등이다. 그 외에 어떤 희세의 보물을 묻었는지는 알 바가 없다. 80년대말 고고학자들은 지궁서측에서 하나의 대형 채색동차마를 말견한 바 있는데, 차마의 형태가 정황하고 장식이 정교한 것은 드물게 보는 것이었다. 지궁의 바깥에도 이렇게 정교한 부장품이 묻혀있다면, 지궁안에는 어떤 보물이 묻혀 있을지 상상할 수 없다.

 

여섯째, 진시황은 동관을 사용했을까? 목관을 사용했을까?

 

진시황은 어떤 관을 사용했을까? <<사기>>, <<한서>>에는 명확하게 기재하고 있지는 않다. 사마천이 남긴 글에는 단지 문구 하나 "하동이치순(下銅而致[木+享])"(구리를 내려 관에 만들었다)는 모호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진시황은 동관을 사용했을 것으로 단정한다. 그러나 문헌기재에 따르면 반드시 동관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사기>>, <<한서>>의 기재에 따르면 "구리를 제련하여 그 안을 공고히 하고, 그 바깥을 칠했다", "주옥으로 두르고, 비취로 장식했다", "관의 아름다음이 더이상 뛰어날 수 없다"는 등의 문구가 있는데, 바깥을 칠한다거나 비취로 장식하려면 목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일 동관이나 석관이라면 이런 것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나라이전이나 한나라때까지의 기록을 보면,  "황장제주(黃腸題湊)"의 대형 나무목관을 쓰는 것이 천자의 특권이었다. 스스로 삼황오제보다 공이 뛰어나다고 본 진시황이 황장제주의 대형나무목관 이외에 딴 것을 썼을 것으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일곱째, 지궁에는 빈 공간이 있을까?

 

현재의 고고학적인 조사로 발견한 것은 진릉의 지궁은 수혈식이라는 것이다. 묘내에는 아마도 황장제주의 대형목관이 있을 것이다. 만일 수혈식 목관묘라면, 묘도(묘에 이르는 길)나 목관위는 모두 흙으로 밀봉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묘실은 바깥이 둘러싸이고 더 이상 공간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진시황릉을 만든 당시의 재상 이사(李斯)는 "착지불입, 소지불연, 고지공공, 여하무상(鑿之不入, 燒之不燃, 叩之空空, 如下無狀: 개략적인 의미는 뚫어도 들어가지 않고, 태워도 불타지 않으며, 두드려도 비어있고, 마치 아무 것도 없는 것같다)라고 한 바 있다. 이사의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특히 두드려도 비어있고라는 부분은 외각이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이사의 이 말은 스스로 황제에게 말한 것이므로 거짓은 아닐 것이다. 이로써 추단하건데 가운데가 비어있지 않을까 하고 있다.

 

문헌기재를 근거로 추정하기로는 아마도 공간이 있을 것이고, 그것도 큰 공간이 있을 것으로 본다. 다만, 고고학적 조사가 아직 지궁의 주요부위까지는 진행되지 않았으므로 지궁내부가 비었는지 채워져 있는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여덟째, 자동발사기가 있는 것인가?

 

진시황은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장치를 한 것으로 나온다. <<사기>>에 따르면 "진릉지궁에는 장인을 시켜 기계활화살을 만들게 하여, 함부로 들어오는 자는 쏘도록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장치한 것은 자동으로 발사되는 석궁일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대 최초의 자동도난방지장치가 될 것이다.

 

진나라에서는 일찌기 연속 3발을 쏘는 석궁을 개발한 바 있다. 당시에 지궁에 장착하였다는 기계활도 아마 이런 석궁일 것으로 보인다. 외부의 물체가 부딪치면 자동으로 화살이 발사되게 되어 있을 것이다. 2200년전의 진나라 때 어떻게 이런 고도의 자동발사기를 만들었는지도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아홉째, 진시황의 유체는 완벽하게 보존되었을 것인가?

 

1970년대 중반에 장사 마왕퇴의 한묘에서 발견된 여자시체는 사람을 놀라게 하엿따. 그 시신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는데, 지금까지 드문 것이었다. 이로써 어떤 사람들은 진시황의 유체도 완벽하게 보호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시신보호기술에서 본다면 진나라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서한때의 여자시신이 그렇게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으므로, 진나라때도 시신을 보호하는 방부기술은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진시황이 순시도중에 사망하였고, 사망시기가 한여름이었다는 것이다. 시체를 운반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냄새가 나기 시작하여, 시체냄새라는 것을 감추기 위하여 조고와 호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전복을 잡아오게 하여 그 건복을 시체와 같이두어 시신냄새임을 모르도록 하였다. 이렇게 50여일의 장거리를 운송하여 9월에야 비로소 함양에서 발인하게 된다.

 

진시황이 죽은 때로부터 묻힌 때까지는 약 2개월의 시간간격이 있는데, 당시의 시신보호경험으로 보면 시신은 반드시 죽자마자 처리를 시작했어야 하고, 약간만 시간을 놓치면 시신은 이미 부패하기 시작해버린다. 아무리 선진적인 기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진시황의 시신이 완전하게 보존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