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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병마용의 병사들은 왜 투구를 쓰고 있지 않은가?

by 중은우시 2006. 4. 28.

진시황의 병마용을 가서 본 사람들은 한가지 사실에 의문을 느꼈을 것이다. 많은 사병들이 머리에 작은 동그란 모자를 쓰고 있는데, 고고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것은 마포(麻布)로 만든 두건이라는 것이다. 장교모양을 한 사람들은 소가죽으로 만든 판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다. 더 많은 사병들은 머리카락을 머리위에 묶어서 상투를 만들었다. 사병이건 장교건 진나라 군인들은 투구를 쓰지 않고 있다.

 

그들은 투구를 쓰지 않았을 뿐아니라, 몸에 입고 있는 갑옷도 매우 간단하다. 갑옷조삭도 최소한도로 줄였다. 주력보병의 갑옷은 단지 앞가슴과 뒷등을 가릴 뿐이다. 가장 앞쪽에 서있는 궁병부대는 몸에 갑옷조가리 하나 걸치고 있지 않다.

 

병마용갱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은, 진용은 모두 간편한 복장을 하고 있고, 그들이 입은 갑옷이 보호하는 면적도 넓지 않으며 경장(輕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당시의 위(魏)나라군대가 중무장을 했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진나라는 당연히 군대에 충분한 갑옷을 보급할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상앙(商鞅)의 변법이후, 진나라는 당시의 제후국들중에서 가장 부유했다. <<사기>>에 따르면, 진나라는 갑옷을 입은 병사가 100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용으로 복제된 군사들은 매우 의외라고 느껴진다. 이러한 기괴한 현상의 배후에 있는 역사의 진실은 무엇일까?

 

2천년전에, 진나라에 형벌을 기록했던 "희(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이러한 현상을 연구하는데 하나의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일찌기 세번이나 군대를 따라나섰던 그는 죽간(竹簡)에 진나라군대가 형구를 공격할 때에 부대내에서 발생했던 두 건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형구를 공격하는 전투중에, 사병 "갑"이 적군의 수급을 하나 베었다. 사병 "을"은 사병 "갑"을 죽이고 그 수급을 자신이 가지려고 했으나, 제3의 병사에게 발견되었고, 이와 같은 나쁜 짓을 저지른 사병 "을"은 즉석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또 다른 몇개의 죽간에서는 두명의 사병이 하나의 수급을 서로 갖기 위하여 서로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진나라병사들은 전쟁터에서 적군의 수급 하나를 놓고 왜 자기들끼리 서로 치고받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려고 했던 것일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적군의 수급을 이토록 갈망하게 하였던 것일까?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135년전에, 개혁가인 상앙은 진나라를 위하여 다른 나라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같은 가혹한 법률을 제정했다. 이후, 모든 진나라는 엄격하게 이 법률시스템에 따라 운영되었고, 그것은 6대를 걸쳐 진시황에 이르렀다.

 

상앙은 이렇게 규정했다: 진나라의 사병이 적군의 수급 1개를 획득하면, 바로 작위1급을 획득하고, 밭과 집 1채 및 노비 몇명을 얻는다. 죽인 적군의 수급이 많을 수록 받는 작위는 더욱 높아진다.

 

네가 전쟁에서 잘 싸우기만 하면 작위를 받을 수 있고, 작위를 받으면 토지도 가지고, 집도 얻게 된다. 결국 모든 생활은 싸움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앙의 유명한 "군공수작제도"이다. 오늘날 우리는 "희"가 쓴 죽간에서 이러한 제도의 일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한 사병이 전쟁터에서 두개의 적군의 수급을 얻었다면, 그의 감옥에 갖혀있던 죄수인 부모는 즉시 자유인이 될 수 있고, 만일 그의 처가 노예였다면 즉시 평민이 될 수 있었다.

 

가족관계를 중시하는 중국인에게 군공작은 아들에게도 전해졌다. 만일 부친이 전쟁터에서 사망하면 그의 공로는 아들에게 기록되어진다. 한 사람이 군공을 얻으면 모든 가족이 그 이익을 누린다.

 

진나라의 군공수작제도는 평민 심지어 노예에게도 신분상승의 기회를 주었다. 국민들에게 전쟁에서 적군을 죽이도록 유도하는 국가법률은 당시에 아마도 진나라사람들에게나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희"의 죽간에 따르면, 군대내에서도 작위의 고저에 따라, 매번 식사하는 밥도 틀렸다. 3급작위를 가지면 좋은 쌀 한말, 장 반승, 채소고기 1판을 얻고, 2급작위인 경우에는 일반쌀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사병들이 적군의 수급을 두고 다투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진나라병사의 눈에는 적군의 수급은 바로 지위와 재산과 바꿀 수 있는 화폐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당시의 진나라 사람에게 전쟁터는 단순히 국가를 위하여 싸우는 곳이 아니라 스스로의 재산과 명예를 위하여 싸우는 곳이기도 하고, 빈곤과 비천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이기도 하였다.

 

중국역사상 진나라 사람들의 문화의 심성은 유일무이한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진나라의 역사와 관련될 것이다. 진나라는 서북의 초원에서 나타났고, 유목민족과 혼거하였다. 당시에 문명이 고도로 발달했던 중원국가의 눈에는 그들은 낙후한 야만민족이었다. 비록 진나라 사람들이 열심히 중원의 문명을 배우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진정으로 중원문명의 우아하고 정치한 윤리도덕을 배우지는 않았다. 진나라 사람들의 눈에는 무를 숭상하고, 이익을 위하여 경쟁하는 것이 바로 하늘의 도리였다.

 

한비자는 전국시대의 대사상가인데, 그는 처음 진나라 사람을 접촉한 느낌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진나라 사람들은 듣기에 싸우면 바로 맨발 맨팔로 나가서 기다리지 않으며, 기본적으로 생사는 도외시한다.

 

당시 유명한 유세객은 전쟁터에서의 진나라군사를 이렇게 묘사한 적도 있다. "그들은 맨머리에 맨팔로 용감하게 앞으로 나간다. 6국의 군대는 진나라 군대와 비교하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그들은 왼손에 사람의 머리를 잡고, 오른 팔에는 포로를 끼고 자기의 상대를 쫓아가서 죽인다." 이 유세객이 본 진나라의 군대는 정말 사람으로하여금 간담이 서늘하게 한다.

 

상앙의 저작중에서 군공수작제도에 하나의 특수부대에 대한 풍성한 보상을 규정하고 있다. 상앙은 이를 "함대지사(陷隊之士)"라고 불렀다.

 

병마용갱에는 한 무리의 매우 특이한 부대가 있다. 그들은 손에 날이선 격투용의 찌르는 병기를 들고 있는데, 몸에는 갑옷을 전혀 걸치고 있지 않다. 모든 지하군단에서 그들의 모습은 매우 특수하다. 이 부대는 도대체 뭐하는 부대인가? 연구학자들은 확실하게 알지는 못한다. 가능한 하나의 추측은 이들이 전투중에 지극히 위험한 임무를 부여받은 자들이고, 기본적으로 한번 가면 다시 살아올 수 없는 임무를 받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크게 상을 내려서 이렇게 완전히 생사를 돌보지 않고 참여하겠다는 자들을 고르는 것이다. 이러한 병사들은 아마도 결사대와 같은 함대지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희"의 죽간에는 이러한 기재도 있다. 진나라군대는 전쟁전과 전쟁후에 모두 엄청나게 술을 마신다는 것이다. 큰 사발의 술은 피를 들끓게 하고, 작전명령이 하달되면 바로 전쟁이 개시된다. 전쟁터에서 죽든지 아니면 공을 세워 작위를 받는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술은 아마도 모든 병사들에게 하나의 충동만 가지게 할 것이다. 용감하게 싸워서 적을 죽이고 공을 세워 작위를 얻자.

 

연구자들은 또 하나의 기괴한 현상을 관찰하였는데, 많은 진나라 사병들의 배는 모두 약간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장기간 술을 마신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지 않을까?

 

다시 투구를 쓰지 않은 것에 대하여 보면, 갑옷을 많이 걸치지 않은 진나라 장교와 병사들은 단지 하나의 이유로 이러한 죽음을 경시하는 행위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무거운 투구와 갑옷은 그들이 적을 죽이고 작위를 얻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이뿐아니라,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쟁터에서 진나라 군사는 가슴을 내놓고 맨팔일 뿐아니라 심지어 갑옷도 벗어버린다." 이러한 진용의 병사들은 후세인들에게 진나라 사람들의 강렬한 상무정신을 전해주고 있다. 진나라 사람들은 선진적이고 강력한 공격무기를 가졌으나, 갑옷은 중시하지 않았다. 이것이 전군의 규정이었을까? 아니면 사병들이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일까? 아니면 진나라 사람들의 호전적인 본성이 아래위로 공통되어서일까?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에는 아무도 이에 대하여 답변을 하기 힘들 것이고, 그저 추측만 할 뿐이다.

 

상앙이 만든 제도에서 군공작위는 모두 20급으로 나뉜다. 이것은 현대군대의 계급제도와 비슷하다. 계급을 사용하는 것은 군대사상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이것은 군대가 엄격한 관리제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계급은 군인의 명예의 표지이다. 그렇다면 2천년전의 진나라 군대는 어떤 계급제도를 시행했을까?

 

계급은 반드시 식별되어야 한다. 2000년전의 병마용의 진용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들의 머리모양, 모자와 옷에서 모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계급과 연관이 있을까? 고고학자인 원중일과 그의 동료들은 다음과 같이 합리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군단의 가장 앞에는 3줄의 궁병이 있다. 이들은 가벼운 복장을 하고 머리카락은 통일적으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상투를 하고 있다. 몸에 갑옷을 이은 보병은 머리카락을 뒤로 땋아 머리 뒤로 내렸다. 많은 보병들은 마포로 만든 동그란 모자를 쓰고 있다. 그들의 위치나 배열로 보면, 사병등의 복장과 머리모양이 서로 다른 것은 단지 생활습관의 차이에서 유래된 것은 아니고, 작위나 계급의 차이에 따른 것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진나라의 궁병. 당시 궁병이 사용하던 노(弩)는 가장 정확한 사격무기였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러한 상투를 하고, 간편한 복장을 한 궁병은 아마도 1급작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작위가 가장 낮은 "공사(公士)"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몸에 갑옷을 입고 머리를 빗어넘기며 동그란 모자를 쓴 보병은 분명이 2급작위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명칭은 상조(上造)였다. 이 거대한 병마용에서 공사와 상조는 대부분을 차지한다. 바로 이러한 보통병사들이 진나라군대의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진나라의 장교는 어떻게 계급이 나뉘었을까?

 

이 군사들중에서 팔뚝을 앞으로 내밀고, 손에는 밧줄을 잡고 있는 것은 전차를 모는 어수(馭手)이다. 그들은 전혀 예외없이 모두 판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고, 갑옷도 보통전사들보다는 정교하다. 어수의 신분이 매우 중요한데, 그들은 직접 전차 1대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다. 그들은 장교였을까?

 

병마용을 발견한 이후 일부 학자는 하나의 의견을 내놓았다. 하나의 전차의 두목은 누구일까? 바로 어수이고, 과거에 얘기했던 것처럼 차좌(車左)나 차우(車右)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서의 기재를 참조하면, 어수의 작위는 최소한 3급이상이다. 이것은 진나라 군대에서 가장 낮은 장교이다. 그들의 권리는 바로 1대의 전차를 관리하는 것이다. 단지 1대의 전차만으로는 하나의 작전단위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부대를 통할하는 지휘관은 또 누구인가.

 

군관은 두 손으로 검을 잡고 있고, 기세가 비범하며 모자의 모양도 매우 독특하다. 그의 갑옷은 모든 진용중 가장 졍교하고, 갑옷조각도 세밀하며 적고 정치하다. 앞가슴과 뒷등에 모두 화결(花結)이 있는데, 이것은 마치 현대 장교의 계급장과 유사하다. 전문가의 고증에 따르면 이러한 군관은 분명히 도위(都尉)일 것이고, 작위는 대체로 7,8급정도일 것이며 그들은 적어도 하나의 종대를 통할했을 것이다.

 

도위와 어수 사이에는 이러한 장교들이 있다. 그들이 쓴 것은 넙적한 모자이다. 넙적한 모자의 가운데에는 하나의 선이 있다. 아마도 군후와 같은 하급장교일 것이다. 종대에 소속된 하나의 분대를 통할했을 것이다.

 

진나라 군대의 내부편제에 관하여 병마용이 풀어주는 수수께끼는 빙산의 일각이다. 더 많은 구체적인 사항은 여전히 알 방법이 없다. 세계군사상 진나라 군대는 아마도 가장 먼저 비교적 완벽한 계급제도를 갖춘 군대일 것이다. 그의 조직과 관리는 이미 현재의 군대와 많이 닮아있다. 이러한 계급이 분명하고, 체계가 확실한 것은 진나라군대의 작전효율이 다른 나라의 군대보다 높이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완벽한 지하군단, 사병과 장교가 각자 자기의 위치에 서서 군장을 갖추고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당연히 여기에는 최고지휘관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바에 따르면, 병마용에서 계급이 가장 높은 장교는 단지 도위이다. 도위는 대체로 현재의 대대장에 해당한다. 진나라군대를 상징하는 이 군단에 왜 최고사령관이 없을까?

 

기원전 238년, 22세의 진왕 영정은 진나라의 대권을 장악했다. 영정은 13세에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 국가대사는 태후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다. 함양궁안에서 그에게 면류관을 씌우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것은 권력이양의 표시이다. 이로부터 진나라의 운명은 이 젊은이의 손에 달렸다.

 

황궁의 밖에는 오랫동안 축적된 반란의 조짐이 시작되었다. 요독이라고 부르는 한 사람이 자기의 인마를 이끌고 함양궁을 쳐들어왔다. 그는 권력을 빼앗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반란은 실패로 끝나고 요독은 극형을 받는다. 사마천은 이번 무장반란은 수백명의 목을 베는데서 끝났다고 적었다. 왜냐하면 반란을 일으켰던 요독은 군대의 지지를 받지 못하여 반란에 참가한 것은 그와 가까운 사람 수천에 불과하였기 때문이고, 그들은 순식간에 일망타진된다.

 

요독의 권세는 국왕의 바로 다음이었다. 20급작위의 최고직위었다. 사마천이 묘사한 바에따르면, 진나라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요독이 결정했다. 그러나, 그는 군대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는 심지어 태후와 국왕의 도장을 훔쳐서 군대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도장도 소용이 없었다. 진나라에서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은 누가 가졌는가?

 

호부(虎符)이다. 진나라 법률은 전쟁기간을 제외하고는 50인이상의 군대를 움직이려면 반드시 호부를 가져야 한다. 호부는 두 개로 나뉘어져서 왼쪽은 병사를 이끄는 장교가 가지며, 오른족은 국왕이 가진다. 두개가 합쳐져야만 비로소 부대 하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호부는 군대지휘권의 표지였다. 그리고 호부는 국왕 1인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다.

 

진나라의 국왕은 무수한 호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갈 것이다. 반란의 소식이 들이면 진시황은 신속히 대량의 어림군을 모아서 가볍게 반란을 진압했을 것이다. 호부는 훔칠 수 없었으므로 모반을 꾀했던 요독은 기본적으로 군대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고, 실패라는 결과는 미리 예정되어 있었다.

 

진나라 군대의 상징으로서, 병마용에는 단지 1명의 최고지휘관이 있을 뿐이다. 그 사람은 바로 진시황인 것이다. 병마용으로부터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대한 진시황이 안장되어 있다.

 

강대한 진나라 군대는 1사람의 명령만 들었다. 이것은 진나라 군대의 행운이다. 진나라군데는 6대를 내려와서 중국을 통일하였다. 아니, 아마도 이것이 진나라 군대의 불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순행도중 사망한다. 그의 사후 3년이 지나지 않아 이 위대한 군대는 역사에서 사라진다.

 

진의 중국통일은 중국역사의 하나의 전환점이다. 그러나, 동시에 진이 멸망하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진제국은 겨우 15년을 유지했다. 일찌기 백전무패의 군대는 제국이 무너지면서 같이 사라졌다. 제국이 무너질 때, 진나라군대도 전투를 했다. 그러나 이미 15년전의 그러한 전투력은 없었다.

 

진나라군대의 최후의 모든 중국사람들이 잘 알고 있듯이 다음과 같다. 큰 비가 내리던 저녁 900명의 장정들이 소집되어 변방으로 이동하였다. 큰 비로 행군이 늦어졌는데, 진나라 법에 따르면 도착시간을 어기면 즉시 참형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각지의 민중이 호응하고 의거는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인 것처럼 제국의 곳곳으로 번져갔다.

 

이 반란군이 함양을 진입하고자 할 때, 떨쳐일어나서 막은 것은 제국의 정규군이 아니라, 죄수들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진시황을 묻을 때, 지하능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수십만의 죄수들이 지하능묘공사에 동원되어 있었다. 도자기파편에 새겨진 이름은 바로 이들이 일을 한 증거였다.

 

반란군이 진시황릉에서 10리되는 곳까지 접근하였을 때, 즉위한 진2세 호해는 이들 죄수를 사면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들고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한다. 문제는 진나라의 주력부대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느냐는 것이다.

 

진의 통일이후, 정규군대는 두 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광서계림부근에 엄관이라고 부르는 요새였다. 50만의 진나라군대는 이 곳으로 남하하여 토착인들과 전투를 벌였다. 반란이 돌연 일어났을 때, 이 진나라군대는 막 남부강토를 평정했을 때였다. 제국존망의 관건적인 시기에 이들은 침묵했다. 사마천의 기재에 따르면, 현지의 최고지휘관은 명을 내려, 남북의 모든 통로를 봉쇄하도록 지시하고 군대가 북상하여 작전을 벌이는 것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남부의 진나라 군대는 이렇게 스스로 창건한 대제국을 스스로 포기해버리고 만다.

 

다른 하나의 주력부대는 제국의 북방에 있었다. 흉노기병을 물리치고 30만의 정예군은 남으로 내려오지 못했고, 장성을 지켰다. 도성에서 위급함을 알렸을 때, 이 진나라군대는 남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부대의 남하속도는 이상하게도 느렸다.

 

도성을 보위하는 임무는 결국 죄수들로 구성된 진나라군대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의외인 점은 이 부대는 아주 대단한 전투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들은 매우 짧은 시간내에 수십만의 농민반란군을 쳐부수고, 만신창이가 된 제국에 희망을 보여준다. 그러나, 초나라에서 온 한 귀족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이 사람이 바로 항우이다.

 

지금의 하북성에 거록이라고 부르는 지방이 있다. 마지막 두 개의 진나라부대가 마침내 만난 곳이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이번 회합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는 것이다. 진나라군대는 항우의 군대와 거록에서 결전을 벌인다. 초나라 사람들의 믿기 어려운 용감무쌍함 앞에서 수십만의 진나라군대는 모두 패하고, 남은 사람은 모두 투항하여 진나라군대는 철저하게 궤멸된다.

 

역사학자들의 추측으로는 이 병마용을 불태우고 훼손한 사람이 아마도 항우일 것이라는 것이다.

 

위대한 군대의 종말은 이처럼 사람을 쓸쓸하게 한다. 500년동안 전혀 쇠락하지 않던 전투력이 일순간 와해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도 쉽게 믿기지 않는 점이다.

 

진나라제국은 급속히 등장했다가 순식간에 없어질 운명을 타고났다. 마치 일종의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조종하듯이 이 깊숙이 숨어있고 드러나지 않는 힘은 마찬가지로 이 군대의 부침을 결정했다.

 

중국역사상 진나라 문화는 유일무이하다. 진나라 사람들은 공리적이고 실용적이며, 개척적이고 진취적인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질서와 규칙을 숭상하고 무력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마도 이러한 문화전통은 그들의 발전을 이끌었고, 동시에 멸망으로 이끄는 씨앗이 되었다.

 

진시황은 이 부대를 가지고 최고의 휘황한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 제왕은 시대를 초월하려는 야심때문에 제국의 국력을 소모하게 된다. 진나라 군대의 마지막 날에, 제국의 질서는 이미 붕괴되었고, 사병들이 전방에서 전투에 참여해 적군을 죽일 때, 그들의 집은 이미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 멸망은 예정되었고,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