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은 중국 최초의 황제이다. 고대의 황제들은 모두 황후를 두었는데, 진시황은 황후를 세우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진시황의 능원에는 자신의 묘만 있고, 황후릉은 없다. 진시황은 6국을 멸하면서 6국의 후궁들을 전부 데려와 자신의 후궁으로 삼아 3천이라는 설, 만명이 넘었다는 설등이 있다.
고대의 제왕은 많은 후궁을 두지만 후궁중 '첫째의 지위에 있는 부인'을 황후라 칭하고, 황후를 두는 것은 고대 후궁제도와 군주정치의 중요한 구성부분이었다. 진나라도 진효종이후 황후를 두고 태자를 두는 것은 이미 제도화되어 있었다. 황제의 정처를 황후라고 하고, 모친을 황태후라고 칭하는 것은 이미 제도화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진시황은 일생동안 황후를 두지 않았는데, 그 이유에 대하여는 사람들의 의견이 갈리고 있다.
진시황은 13세에 즉위하여 22세에 친정(직접 다스리기 시작)을 한다. 중간의 9년간은 아무 일없이 노는 천자였고, 옛날 남자들이 대부분 처를 두는 기간이다. 즉위후 3년내에 보통 황후를 두게 되는데, 진시황은 그 9년간 황후를 두지 않았다. 그리고 22세에서 39세까지의 17년간은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고, 6국을 통일하는 시기였고 국사에 바빴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황후를 세울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39세부터 50세까지는 천하를 통일하고 전국을 순유할 때였는데, 황후를 세우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로써 보면 진시황이 황후를 세우지 않은 것은 절대 바빠서 시간이 없었기 때문도 아닐 것이고, 모후가 황후를 세우는데 반대하거나 신경쓰지 않아서도 아닐 것이고, 신하들이 황후를 세우는데 반대하거나 신경쓰지 않아서도 아닐 것이다. 결국 진시황 스스로 황후를 세울 생각이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이유에 대하여는 몇가지로 추측하고 있다.
첫째, 진시황이 모친의 행위에 실망하였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즉, 진시황의 생모는 조희(趙姬)로 여불위가 진시황의 부친 진장양왕에게 바친 여인이며, 여불위의 아이(즉, 진시황)을 가진 상태에서 진 장양왕에게 시집갔다고 전해지는 여인이다. 조희는 진시황의 부친사망후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 다시 2명의 아들을 더 낳을 정도로 문란하였다. 게다가 조희와 사통한 남자는 술에 취해서 중신들에게 내가 진시황의 계부인데 감히 나와 싸우자는 거냐고 소리지르기도 하였다. 결국 진시황은 모친이 낳은 사생아인 동생 2명을 모두 죽이고, 모친은 함양에서 쫓아내고, 이후 죽을 때까지 다시 함양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한다. 이러한 모친에 대한 원한은 결국 여인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진시황의 마음에 그늘을 드리운 것으로 보기도 한다. 모친의 행위에 대한 실망은 결국 황후를 세우는데 심리적인 장애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후, 6국의 수많은 미녀들이 후궁에 들어왔고, 그 중에 가장 뛰어난 한 명을 뽑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진시황은 스스로 삼황오제보다 뛰어난 최고의 제황으로 생각하였으므로, 황후가 될 여인도 그러한 뛰어난 자격을 갖추기를 원했을 것인데, 진시황의 기준으로 그런 여자를 찾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다.
셋째, 진시황의 성격에서 찾기도 하는데, 의심이 많았고, 스스로 장생불사의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성격도 황후를 세우지 않는데 작용을 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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