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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진시황(秦始皇)의 생부가 여불위(呂不韋)인가?

by 중은우시 2006. 11. 9.

<<사기(史記)>>가 재미있는 이유중의 하나는 사마천이 괴이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잘 풀어놓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가 쓴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은 영씨가 아니라, 여씨인 것이다.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불위는 조나라 한단에서 아름다운 무녀(舞女, 나중에 趙姬로 불림)와 동거를 시작했고, 임신을 하였다. 한번은 여불위가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와 있던 진나라의 공자 자초(子楚, 당시의 이름은 異人)를 불러 같이 술을 마셨다. 자초는 조희를 좋아하게 되었고, 여불위에게 조희를 달라고 하게 된다. 여불위는 처음에는 크게 노했으나, 나중에 자기가 많은 돈을 들여서 자초와 사귄 본전을 생각해서, 결국 조희를 자초에게 바치게 된다. 조희는 자초에게 자신이 이미 임신했다는 것을 속였다. 12개월후 조희는 해산일을 넘겨서 사생아를 낳았고, 자초에 의하여 부인으로 세워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정(政, 후의 진시황)이다.

 

후세의 사가(史家)들 중에서는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처럼 사마천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때부터 왕세정이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하면서, 여불위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날조하였을 가능성과 여불위의 문인들이 진시황에게 원한을 푸는 방법으로 진시황을 여불위의 사생아라고 욕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이후 근대의 곽말약은 첫째, 사기에만 기재되어 있고, 전국책에는 기재가 없으며 다른 방증이 없다는 점, 둘째, 사기의 기록상으로 조희에 대하여 무녀와 호족의 딸등으로 모순되게 기재하고 있는 점, 셋째, 내용자체가 같은 책에 실린 춘신군과 여환에 얽힌 이야기와 같이 소설적이라는 점등을 들어 역시 여불위가 생부라는 점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사마천의 글이 아무런 이유없이 쓰여지진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여불위를 생부라고 주장하기도 하여,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현재의 소설, 연속극들에서는 모두 여불위가 생부인 것으로 쓰고 있다. 원래, 소설이나 연속극이야 재미있어야 하고, 신기해야 하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근 백가강단에서 유명대학의 교수까지도 이러한 시류에 영합하여 아무런 의심없이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고 단언하는 것은 좀 심하다는 느낌이다.

 

여러가지로 보면 여불위가 생부일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첫째, 진시황이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여불위가 이러한 음모를 일찌감치 꾸몄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 즉, 여불위는 자기의 아들을 황제로 만들기 위하여 사전에 조희를 임신시킨 후 자초에게 시집보내고 그 조희가 아들을 낳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시황 영정에 태어난 것은 진소왕48년때였다. 진소왕은 진시황의 증조부이다. 중간에 조부인 진효문왕과 부친인 진장양왕 즉 자초가 있다(아주 우연인지 몰라도 진효문왕과 진장양왕은 모두 몇달 몇년내에 죽어 단명하고 진시황이 왕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자손이 아주 많아서, 영정은 그저 진소왕의 많은 손자중의 한명일뿐이고, 그것도 자초는 부친에 의하여 거의 버려진 상태였다. 그리고, 여불위의 나이는 자초보다 많았을 것인데, 자초를 황제로 만드는 것까지는 몰라도, 미리 자기의 아들을 황제로 만들 것까지 음모하였다고 보기는 아무래도 억지로 짜맞추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여불위가 조희를 자초에게 보낼때부터 그러한 음모가 없었다면,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라고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둘째, 과학적으로 보더라도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가 되기는 힘들다. 조희는 12개월만에 진시황을 낳았다는 것인데, 사람의 임신기간은 9개월 266일이다. 그리고 10개월만 지나도 이미 위험한 상태가 되는데, 2달이나 더 늦게 낳았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믿기 어렵다. 여자들의 임신기간이 길다고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대부분 자기가 정조를 지키지 못한 것을 속이기 위하여 거짓말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아니면, 중간에 유산되고 다시 임신하였거나...그러므로, 조희가 아들을 낳은 기간으로 볼 때 자초의 아들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셋째, <<전국책>>등 나머지 사서에는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라는 내용등이 전혀 나와 있지 않고, <<사기>>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사람들이 이것을 아직까지도 완전히 허위로 버리지 못하는 것은 바로 사마천이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각도에서 보면 <<사기>>는 그다지 엄격하게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쓴 책은 아니다. 그 안에는 신화, 귀화, 소문, 소설이 포함되어 있다. 여불위에 관한 것만 보더라도 사기내에 한 곳에서는 조희르 여불의의 무녀라고 하였는데, 다른 곳에서는 조희가 조나라의 세력가의 딸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여불위와 자초가 어떻게 안국군(나중의 진효문왕)으로 하여금 자초를 후계자로 앉히게 할 것인지에 대한 대화를 아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읽는데는 재미있지만, 두 사람만의 밀담을 어떻게 제3자, 나중의 사마천이 알 수 있었을까? 이것은 사마천의 문학적인 재능이 빛을 발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조희의 결혼전에 임신에 관하여 여불위와 조희가 밀담을 나누는 것도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중에 조희가 남편인 자초까지도 속였는데, 어떻게 들통났단 말인가? 이것은 명백히 꾸며낸 것이다.

 

넷째, 여불위의 생전에 진시황은 여불위가 생부라는 말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여불위를 처치하겠다고 결정했을 때 여불위에게 "그대가 진나라와 무슨 친한 게 있다고..."라고 쓰게 되었던 것이다.

 

다섯째,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라는 주장은 대체로 여후(呂后)가 한고조 유방이 죽은 후에 한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후, 여씨들이 지어서 퍼뜨린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즉, 여씨들은 당시 매우 득세하여 유방의 유씨를 압도할 정도였는데, 여씨들이 정권을 잡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을 백성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하여 진시황이 원래는 여불위의 아들이어서 여씨였고, 원래 여씨는 천자가 될 성씨라는 점을 은연중에 밝히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여러가지 점을 보면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일 가능성은 매우 적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