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용의 연구계에서, 진경원(陳景元)은 계속하여 비주류였다. 왜냐하면 그는 독특한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병마용의 주인은 기본적으로 진시황이 아니고, 그의 선조인 진선태후(秦宣太后)라는 것이다.
이 관점은 주류의 관점과 완전히 다르다. 1974년 병마용의 발견후, 계속하여 진시황의 배장품(陪葬品)으로 보아왔다. 이로 인하여 병마용의 연구학계에서는 그의 관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뿐아니라, 그의 이름조차도 고의적으로 언급을 피해왔다.
진경원은 올해 69세이다. 고고학계의 권위자도 아니고, 역사학자도 아니다. 그는 단지 건축학 쪽의 학자이고, 퇴직전에는 강소성 국토국에서 근무하였다. "거대한 진릉의 건설은 전부 건축학의 일이다. 지하궁전의 구조, 시공방법, 토목운수 및 능묘건축의 레이아웃, 주축선의 방향등 건축학전공을 벗어나서는 성립하기 힘들다"
의문점.
첫째, 병마용의 발견지점은 진시황의 능과 거리가 너무 멀다. 이것은 진경원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의문점이다. 공개된 자료를 보면, 진시황릉의 면적은 56.25평방킬로미터이고, 주위에는 병마용을 포함하여 여러곳에서 발견된 진시황의 배장품이 포함되어 있다.
"진시황릉은 정말 그렇게 큰가?" 진경원은 의문을 품는다.
진경원이 처음으로 진시황릉을 접촉한 것은 1957년이다. 그가 서안건축공정학원 건축과에 입학하였을 때이다. 이전에 그는 계속 고향인 절강에서 생활했다. 대학에 들어간 후 널리 중국고대사에 접촉했다. "건축은 다른 전공과는 달리, 반드시 각종 역서적 건축의 품격을 연구해야 한다" 그가 말하기를 "그러므로 인문, 역사등 여러 방면의 지식을 모두 이해하여야 한다." 대학입학후 다음날 그는 혼자서 임동의 동쪽으로 가서 황무지인 진시황릉을 살펴보았다.
1961년 3월, 진시황릉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가 되었다. 3개월후, 진경원은 스승을 따라 임동현으로 갔다. 같은 과 학생들과 함께 임동현에서 도시계획설계를 하였다. 진시황릉의 보호는 계획의 핵심문제의 하나였다. 진시황릉의 규모측정은 계획의 첫걸음이었다.
비록 역사에 정확하게 황릉의 규모를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진한시대의 묘에는 시대적인 특색이 있으므로, 그와 그의 친구들은 측량을 하면서 진시황릉을 중심으로 3040평방미터의 보호권을 그었고, 하나의 특별한 삼림공원을 건설하도록 준비했다. "당시에는 문물보호를 위하여 계획한 구역인 이미 능묘의 면적을 한참 초과했다"
1974년 병마용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진경원이 기이하게 생각한 것은, 출토된 지방이 당초 그들이 획정했던 구역보다 바깥에 놓여있다는 점이었다.
더욱 이상한 점은 출토된지 얼마되지 않아 병마용은 바로 진시황의 배장품으로 인정되었다. 진경원은 매우 의문을 가졌다. "우리는 당시에 특별히 매우 넓은 구역을 그었고, 문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리고 배장품을 그렇게 멀리 두는 것은 상식에 부합되지 않는다"
많은 연구자료에 따르면, 병마용에서 진시황릉까지의 직선거리는 1.5킬로미터이다. 이 1.5킬로미터는 두 지방의 중심간의 거리가 아니고, 그들이 대충 계산한 것은 양쪽의 변에서의 거리이고, 중심구역끼리의 거리를 말하면 이 숫자를 넘어설 것이다.
진경원은 자기의 건축학지식에 의거하여 의문을 품었다. 집에서 그는 기자들에게 당시 그렸던 측산도면을 보여주었다. "만일 그들의 해석대로, 진시황릉이 그렇게 크다면, 모든 여산이 다 포함되어 들어가는데, 이게 현실적이냐?"
둘째, 고대 제왕의 능묘는 대부분 남북방향이다. 병마용의 방위는 진시황릉의 동쪽이다. 배장품이라면, 능묘의 중추선상에 놓이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그리고, 진시황릉은 여산을 뒤로 하고, 큰 강을 앞에 둔다. 고대의 건축풍수학설에서보면 아주 좋은 장소이다. 고금이래로 진시황만 풍수를 보았다는 말인가? 왜 출토되자 얼마되지 않아 진시황릉의 배장품으로 인정해버린 것인가?"
증거수집
그러나, 자신의 판단에만 의지해서는 설득력이 없다. 1976년 진경원은 서안으로 달려갔고, 현장에서 본 상황은 그에게 의심만 가중시켰다.
병마용박물관의 해설에 따르면, 이 병마용갱은 진이 전국을 통일한 후 10여년후에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괴한 것은 갱안에 여러 개의 규격이 다른 마차가 있다. 이것은 당시에는 위법행위였다. 통일전에는 진나라 국내에서는 이미 "차동궤(車同軌, 차의 궤는 같아야 한다)"를 실시했다. 그렇지 않으면 국내에서 자유롭게 통행할 수 없었다. 6국을 통일한 후에는 "차동궤"를 전국에 시행했다. 진시황이 이런데도 자기의 배장품의 차궤가 넓은 것도, 좁은 것도 들어가도록 허용했을 것인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정삭을 고치고, "복색"을 바꾸고, 의복, 정려, 절기등에서 모두 검은색을 숭상하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출토된 거의 모든 무사들은 아래에 붉고 녹색의 전포를 입고, 자남색의 긴 바지를 입고 있는데, 이것은 진시황이 검은색을 숭상하는 명령과 크게 어긋난다.
진시황의 시대에는 단지 대량의 보병과 기병을 사용하였다는 기재가 있는데, 병마용갱내의 주력부대는 전차위주이다. 병기에서도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
자료에 따르면, 1974년 병마용이 출토된지 얼마되지 않아. 고고학 전문가들은 즉시 결론을 내렸다 "진용은 진시황릉건축의 일부분이다"
<<진시황릉동측제1호병마용갱시굴간보>>의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용갱의 서단은 진시황릉동쪽벽에서 1,225미터이다. 진시황릉내성의 동북각과 일직선을 이룬다." 여기에 출토된 기물, 도용은 모두 "진시황릉건축의 일부분이다.". 이후의 선전자료에서도 일치하여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으로 설명한다.
왜 결론을 이렇게 빨리 내렸는가? 1974년 3월후에 병마용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
1974년 3월 24일, 임동현 동서양촌의 일군의 농민은 부근에 우물을 파다가, 병마용을 발견했다. 금방, 현문화관의 업무인원이 도착했고, 그들은 초보적으로 이것은 아마도 대형 도용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진시황릉과 거리가 멀지 않은데, 진시황의 배장품일까? 및 그 시대, 작용에 대하여 그들은 일시에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당시에는 바로 상급기관에 보고하지도 않았다.
1974년 5월, 신화사기자인 인안온이 상황을 들었다. 북경으로 돌아온 후 오래지 않아. 내부참고자료를 만들어 인민일보 <<정황회편>> 제2396기에 실었다. 제목은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진나라 무사용>>, 4,5백자에 불과한 글자로 상세히 묘술하였는데, 이것이 진시황의 배장품인지에 대하여는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글은 이미 병마용과 진시황릉을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었다.
이 소식은 모택동, 주은래 및 당시 국무원 지도자들의 주의를 끌었고, 국가문물국의 책임자에게 잘 보존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당시 국가문물국과 섬서성문화관의 책임자는 모두 이 일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재빨리 전화로 물어봤다.
진경원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당시 임동현 문화관의 업무인원이 받은 스트레스는 매우 컸다. 문화관의 직원이 말하기를 도용이 출토된곳은 진시황릉에서 거리가 매우 멀었고, 당시 갱의 크기, 내용, 시대, 성격등 여러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들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계속하여 논의하고, 현지도자들에게 의견을 물은 후에 상급기관에 보고하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고, 좀 더 조사해서 명확해진 후에 상급기관에 보고하려고 하였었다.
내부참고소식에 보도된 이후 흥미를 느낀 것은 강청이었다. 유가를 공격하고 있던 중이므로 강청은 진시황을 법가의 전형적인 인물로 보고 있었고, 새로 출토된 병마용은 유가를 비판하고 법가를 평가해주는 운동에 아주 좋은 실물자료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하급기관이 이러한 중요한 발견을 상급기관에 보고하지 않은 것을 비난하고, 고고업무자들에게 이 문물을 잘 보호하도록 지시했다.
바로, 중국사회과학원의 전문가와 섬서성문물기관의 전문가들이 함께 임동에 왔다. 현장조사후 의문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되었다.부근에는 대형 묘가 없었고, 멀지 않은 곳에는 진시황릉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진시황릉의 배장갱이 어떻게 이렇게 먼 곳에 있을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도용의 시대, 성격, 주인등의 문제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굴간보>>에는 병마용의 주인에 대하여 판단을 내렸다.
진경원은 이러한 배경을 이해한 후, 더욱 자신의 의문에 대하여 확신을 가졌다. "당초에 병마용의 성격은 정확하게 학술적으로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정치적인 압력하에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의문이 들지 않는가?"
도전
진경원은 관련정보를 수집해서 "진용신탐. 용갱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라는 글을 썼다. 그리고 사회과학원의 정기간행물에 투고했고, 학술계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토론하기를 기대했다.
논문을 발표하기 위하여, 진경원이 사방으로 뛰어다녔으나, 벽에 부딛쳤다. 어느 학술잡지도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문회보>>의 한 기자는 이 일을 알고, 이 것을 내부참고소식간행물에 올렸다. 1983년 1월 정치국위원이며, 사회과학원 원장인 호교목(胡喬木)이 이 사실을 알고, 이 논문을 "미정원고"의 방식으로 발표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진경원은 승복하지 않고, 저명한 학자인 우광원(于光遠)을 통하여 다시 호교목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호교목은 다시 지시를 내렸고, 이 논문을 공개발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사회과학원의 정기간행물에는 이 논문이 실리지 않았다.
자기의 관점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진경원은 암도진창의 방법을 생각했다. 사회과학원을 피해서, 자연과학원의 정기간행물로 우회한 것이다.
1984년 제3기 <<대자연탐색>>잡지에 진경원의 논문이 전문 게재되었다. 진용의 주인이 진시황이 아니라는 의문외에도, 자신의 고증에 따르면 무사용의 진정한 주인은 진선태후 미(芈)씨라는 것을 밝혔다.
<<서안부지>>에는 이에 관한 기재가 있다. "진선태후, 지양여산에 묻었다. 신풍현에서 14리 떨어져 있고, 즉 임동지역이다." <<임동현지>>에는 "진선태후릉은 신풍현남"에 있다. 지리위치는 병마용의 출토지점과 일치한다.
<<사기. 우리자열전>>의 기재에 따르면, "진소왕, 왕의 모친은 선태후이고 초나라 여자이다" 이로써 미씨는 진소왕의 생모이고, 그녀는 또한 초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왜 병마용의 머리장식과 복장이 당시의 소수민족과 비슷한지를 설명할 수 있다.
기원전 306년, 소양왕은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 선태후는 섭정을 한다. 태후가 임종할 때, 명을 내려 근신들을 순장하게 한다. 그러나 소양왕은 따르지 않았다. 당시 사람을 순장하라는 명을 따르지 못하는 대신, 자신의 생모에 대한 효도를 다하는 마음에서, 명을 내려 진짜 사람과 같은 크기의 인형을 만들어 차부대와 함께 배치하여, 상징적으로 태후가 자신의 초나라 고향에 가 있는 것과 같이 만들어주었다.
진경원은 자기의 해석을 이렇게 내놓았다.
논쟁
이 논문은 큰 파란을 일으켰다. 국내외의 연구자들은 계속하여 병마용 고고팀에 이에 대한 입장을 물어봤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진용의 주인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 대한 것이었다. <<중국고고학의 풀리지않는 수수께끼>>에는 작가가 진용의 주인을 수수께끼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런 여론의 압력을 돌리기 위하여, 병마용연구학자들은 서안에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나중에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회의에 참석한 전문가 학자들은 모두 진경원의 관점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진경원은 회의에 참가한 학자들에게 하나하나 전화로 물어보았다. 물어본 것은 자기의 관점에 반대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회의에 참가한 일부 학자들은 그와 동일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 중국진한사연구회회장인 임검명은 진경원에게 그 자신도 이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고, 그의 학술문장 <<진용의 수수께끼>>에서 진경원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사만행, 양비, 장만흠등의 학자들도 각자의 학술저술에서 주류의 입장과 다른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의 목소리는 모두 당시의 여론의 흐름에 밀려 묻혀버렸다. 1984년 12월 11일 <<섬서일보>>에는 <<진병마용갱의 주인은 진시황제 : 진용연구학술토론회회의록요약>>라는 글을 실었다.
병마용박물관의 전임 관장인 원중일은 병마용은 확실히 진시황의 배장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당시 병마용 고고대의 대장으로 "중국병마용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기자의 취재에 응한 그는 "그 후 얼마되지 않아. 병마용내에는 '여불위'라고 끈 과(戈)가 발견되었다. 여불위는 진선태후보다 100년후의 사람이다. 선태후의 묘라면 어찌 후세 사람의 물건이 있을 수 있겠는가?"
원중일은 고서상에 이미 기재가 있다고 한다. 진시황이 공사상황을 점검하러 왔다가 재상 이사에게 능묘의 범위를 바깥으로 "삼백장" 확대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사람들의 측량에 따르면 서양촌에서 도용이 발견된 지점이 바로 이 "삼백장"의 거리 내라는 것이다.
진경원은 이에 대하여도 반박한다. "그는 그 책을 뒤져보았으나 "삼백장"이라는 글자는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양보하여 진나라때의 1척이 단지 현재의 23센티미터라고 보다러도, 삼백장은 현재의 길이로 환산하면 단지 690미터에 불과하다. 서양촌은 진시황릉의 중심에서 거의 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삼백장"의 범위내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여불위" 과에 대하여도 진경원은 자신의 해석을 내놓았다. "이 과가 발견된 위치는 묘의 아래쪽이 아니고, 중간쯤이다. 만일 병마용과 같이 배장되었다면 그것은 당연히 바닥에 놓여있어야 할 것이다. 병마용갱의 내부에는 매년 진흙의 퇴적이 일어났는데, 과가 별견된 위치는 개략의 년도로 환산해보면, 선태후 이후의 연도가 된다. 그리고, 병마용은 이미 파괴되었는데, 이 과는 아마도 후세인들이 가지고 들어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논쟁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학술잡지에도 진경원의 목소리는 실리지 않았다.
견지
지금 진경원은 거의 7순의 노인디다. 아래쪽 이빨도 이미 다 빠졌다. 그는 기자에게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모두 진시황릉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1957년 그가 고향인 절강 금화를 떠나서 서안건축학원에 합격하였고, 학교에 도착한 다음 날 혼자서 황무지인 진시황릉을 살펴보고, 건축학의 측면에서 진시황릉의 공사를 연구하면서 흥미는 점점 농후해졌다.
대학졸업후, 그는 심양의 설계원에서 근무하면서, 근무지는 심양이었으나, 공사는 감숙, 섬서 두 지방이었다. 진시황릉은 그의 시선을 벗어나지 않았다. 1974년이전에 그는 <<여아집>>이라는 글을 완성했고, 글에서 아방궁의 건설과 진시황은 관련이 없고, 진시황은 생전에 여산묘를 수리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에 이미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관점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병마용에 대하여 제출한 놀랄만한 의견은 여전히 억눌려있다.
진경원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퇴직후에는 시간이 많아서 더욱 적극적으로 증거수집에 나섰고, 집안에는 진나라 역사에 관한 연구서적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우광원은 일찌기 그를 격려한 바 있다. "학술연구는 민주집중제로 할 수 없고, 더구나 소수는 다수에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은 계속하여 진경원을 격려하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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