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응(熬鷹, 아오잉): 밤에 잠을 못자게 하다.(매를 괴롭히다)
북경에서 밤을 새우는 것을 오응이라고 하는데, 특히 어쩔 수 없이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를 '오응' 또는 오대응(熬大鷹)'이라고 한다. 이 말의 어원은 문주족이 매를 길들이는 방식에서 유래한다. 매는 맹금류이므로, 작은 매로부터 황응이나 해동청에 이르는 큰 매까지 잡은 후에 훈련을 강하게 시켜야 사냥용으로 쓸 수 있게 된다. 맹금이므로 성질이 사나워서 사람들에게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 쉽지는 않다. 일단 붙잡으면 모자를 씌우고 두 눈을 가려서, 횃대위에 둔다. 2일정도 지나면 잠을 못자게 하기 시작한다. 사람이 횃대앞에 앉아서 매가 눈을 감기만 하면 바로 작은 막대기로 한대 쳐서 잠을 깨운다. 한참이 지나서 매가 다시 눈을 감고 졸기 시작하면, 다시 막대기로 한대 친다. 이렇게 밤새도록 전혀 잠을 못자게 만들어버린다. 며칠이 지나면 매의 야성이 점점 약화된다. 이것이 '매를 길들이는' 방법이다. 여기에서 '오응' 또는 '오대응'이라는 속담이 생겨나서,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아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를 일컫게 되었다.
2. 흘관반방사낙타(吃官飯放私駱駝, 츠관판팡쓰뤄투오) : 정부에서 급여를 받으면서 개인적인 이익을 챙기다.(관청 밥을 먹으면서 개인 낙타를 기르다)
북경말로 월급받고 일하면서 개인 일을 처리하는 것이나 공적인 일을 처리하면서 개인적인 일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이 속담의 어원도 청나라 팔기군이 낙타를 기르는 제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 당시에는 기차, 자동차, 비행기등의 교통수단이 없으므로, 청나라때의 팔기병사는 언제든지 명이 떨어지면 전국각지로 달려가서 군사임무를 수행하여야 했고, 대부문은 변방지방으로 가야하므로 많은 말고 낙타가 필요하였다. 팔기의 참령(參領)에게는 모두 관마(官馬)와 관타(官駝)가 있었고, 좌령(佐領)에게는 관마는 있으나 관타는 없었다. 군용 말과 낙타는 수량이 많았으므로 이를 기르는 것이 군대에서는 중요한 일중의 하나였다. 팔기군은 관외등에 대규모의 목장을 가지고, 전문적으로 군용 말과 낙타를 기르고 있었다. 북경팔기군의 주둔지에도 각 좌령은 모두 말을 가지고 있으므로 군용마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각 참령은 낙타를 기르는 장소까지 가지고 있었다. 청나라 후기가 되면서, 제도가 점점 느슨해졌고, 개인들이 기르는 말과 낙타를 군대의 목장에 위탁하여 기르는 일이 나타났다. 관마, 관타의 수량은 무척 많으므로 거기에 개인이 기르는 말과 낙타가 약간 섞여들어가도 발견되기 어려웠다. 개인이 목장관리인과 내통하여 개인의 말과 낙타를 관마, 관타에 섞어서 기르는 일이 생겨난 것이다. 이로 인하여 국가의 공적인 시설을 이용하여 개인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경우에 이런 말을 쓰게 되었다.
3. 소불정남, 노불소북(少不征南, 老不掃北, 샤오부쩡난, 라오뿌싸오베이) : 젊어서는 남방에 근무하지 않고, 나이들어서는 북방에 근무하지 않는다.
이 말은 순전히 만주팔기병이 남긴 말이다. 여기서 소(少)는 청년을 가리키는 말이고, 노(老)는 노인이 아니라 중년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청나라 군대는 병사를 전국각지로 보내어 작전을 수행하였는데, 군인의 나이를 고려하여 배치하였던 것이다. 남방으로 보내서 작전을 수행하는 병사들은 대체로 나이 있는 사람으로 선발하였다. 그리고 북방으로 보내서 작전을 수행하는 병사들은 대체로 젊은 사람으로 선발하였다. 그 이유는 반대로 하면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남방은 풍속이 개방적이고, 젊은 사람들이 쉽게 유혹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나이가 있는 병사들은 세상 경험도 있고 하여 쉽게 외부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북방은 기후조건이 열악하므로 나이든 사람이 근무하기에는 적당하지 않고, 젊은 사람들은 근무하더라도 별문제가 없을 것으로 본 것이다. 청나라 때 북경성내에는 팔기들만 거주하였고, 청나라 이백여년동안 여러차례의 큰 전쟁과 작은 전투가 있었다. 그러므로 북경성내의 팔기들은 수시로 전쟁터로 나가곤 하였다. 이 때 젊은이들은 대체로 북쪽으로, 중년인들은 대체로 남쪽으로 파견되어 갔으므로 이런 말이 생겨난 것이다.
4. 규료왕승은(叫了王承恩, 지어우러왕청은) :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다.(왕승은을 부르다)
왕승은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환관이다. 숭정제는 이자성이 북경으로 공격해 북경성을 함락시키자 매산(후에 경산으로 개칭)으로 가서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한다. 자살하기 전에 황궁을 나와 귀족관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어쩔 수 없이 매산에서 목을 매달아 죽게 된다. 그 때 그를 따른 사람은 환관 왕승은 딱 1사람뿐이었고, 왕승은은 숭정제를 따라 목을 매 자살한다. 숭정제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목을 매 자살한 일은 북경사람들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주었고, 이로 인하여 "왕승은을 부르다"는 말은 이미 궁박한 상태에 처해서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경우라는 의미로 쓰인다. 물론 이 말이 반드시 죽음을 앞에둘 정도로 심각한 경우에만 쓰이는 것은 아니고, 일반 사람들이 어쩔 도리가 없다거나 어찌해볼 방법이 없다고 할 때도 쓰인다.
5. 타랑(打狼, 따랑) : 사람들이 많이 몰려가다.(이리를 잡다)
북경말에 여러 사람이 몰려가는 경우에 "뭐하는 거야? 이리잡으러 가는 거야?"라고 하고 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몰려갈 때 이리잡으러간다는 말을 하는 걸까? 이 말의 기원은 만주족의 전통적인 사냥방식에 있다. 만주족의 선조들은 사냥을 할 때 위렵(圍獵)의 방식을 썼다. 많은 사람들이 열을 지어 큰 원을 만들어서 일정한 지역을 포위하고, 포위권내의 짐승을 가두고 때려잡았는데 이를 위렵이라고 하였다. 위렵에는 청장년 남자들만 참여하고, 노약자나 여자는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리를 잡을 때에는 뒤처졌던 사람들도 모두 참여하였다. 청장년남자들이 앞에 서고, 노약자와 여자는 뒤에 서서 사람들마다 곤봉칼창을 들고 고함을 치며 잡았다. 이리를 잡을 때에는 반드시 사람이 많아야 하고, 고함소리가 커서, 하늘을 진동할 정도가 되어야 이리들을 놀라게 해서 붙잡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냥방식은 만주족들이 동북지방에서 북경까지 가지고 왔다. 세월이 흐르면서 북경사람들에게는 깊은 인상을 주었고, 이러한 속담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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