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애역사(最愛歷史)
대당 영휘3년(652년), 당고종(唐高宗) 이치(李治)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듣는다: 고양공주(高陽公主)가 무례한 일을 당했다.
고양공주는 당태종의 딸이며, 당고종의 누나이다. 일찌감치 정관연간에 명상(名相) 방현령(房玄齡)의 차남인 방유애(房遺愛)에게 시집갔다. 그런데, 이번에 공주가 무례한 일을 당했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고양공주의 시녀가 한 말에 따르면, 공주에게 무례한 짓을 한 사람은 바로 방유애의 형인 방유직(房遺直)이다. 동시에 궁에 들어와 보고한 시녀는 당고종에게 이런 말을 했다. 방유직이 방씨가족의 가장이 된 후에, 수수로 음모꾼들과 어울리면서, 자주 당고종을 무시하는 말들을 했으니, 실로 대불경(大不敬)에 속한다고.
방유직은 아무런 이유없이 제수에게 무례를 했다고 고발을 당하게 되니, 금방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그는 당고종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즉시 입궁하여 고양공주가 몰래 천상(天象)을 살피면서 모반을 꾸미고 있다고 고발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당고종에게 더욱 놀라운 내막까지 얘기한다. 방유애는 일찌기 설만철(薛萬徹)과 모반을 꾸몄다는 것이다: "만일 국가에 변고가 생기면, 마땅히 형왕(荊王) 이원경(李元景)을 주군으로 모셔야 햔다."
설만철은 당나라초기의 명장이고, 용맹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단양공주(丹陽公主)의 부마이다. 즉 당고종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성격은 공주가 무례한 짓을 당하고, 방유직이 망언을 한 것보다 훨씬 중대한 일이다. 당고종은 즉시 장손무기(長孫无忌)에게 전권을 주어 조사하게 한다.
그리하여, 집안내부의 자잘한 싸움은 이렇게 하여 고양공주와 방유애 부부의 모반사건이라는 엄청난 사건으로 비화된다. 그후 일부 사람들의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모를 조치를 통해, 당나라초기 황실에 대한 대숙청으로 승격된다.
1
고양공주가 방유직에게 무례한 짓을 당했다는 고발은 당고종이 확실히 믿지 않았다.
어쨌든 정관초기, 고양공주가 현장(玄奘)의 제자인 고승 변기(辯機)와 사통한 일로 시끄러운 적이 있었다. 나중에, 당태종이 변기를 사사함으로써, 이 황실의 추문은 더욱 큰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를 보면, 고양공주의 풍류는 이미 유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태종의 딸로서, 고양공주는 불행한 여인이기도 하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친에 의해 그녀의 자매들과 마찬가지로 명문거족들을 회유하는 정략결혼의 도구가 된다. 고양공주가 성년이 되자, 당태종은 서둘러 그녀를 재상 방현령의 둘째아들 방유애에게 시집보낸다.
방현령은 지모(智謀)가 뛰어나서 두여회(杜如晦)와 함께 "방모두단(房謀杜斷)"으로 불렸다. 그러나 방유애는 성이 방씨라는 것을 빼면 전혀 부친의 족지다모(足智多謀)를 닮지 않았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그는 "탄솔무학(誕率無學), 유무력(有武力)"했다고 한다. 즉, IQ는 뛰어나지 않았고, 힘이 센 것외에는 다른 장점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고양공주의 눈에 들 리가 없다.
그렇게 하여 고양공주가 처음 방씨집안에 시집갔을 때,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이 계속된다. 그녀는 자신의 존엄과 취미를 보완받기 위하여, 대담하게 스님들과 연애를 하고, 자주 집안에서 방현령 부부에게도 '위세'를 부렸다.
그런데, 방현령의 부인 범양노씨(范陽盧氏)도 정관연간에 유명한 "하동사(河東獅, 남편이 기를 펴지 못하게 만드는 드센 부인을 말함)"여서,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태종이 예전에 방현령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하여, 그에게 미녀를 몇명 하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방현령은 놀라서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면 처가 자신을 산 채로 잡아먹을 것이라고. 당태종은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노부인을 궁으로 불러 그녀에게 '독주'를 담은 잔을 내리면서, 그녀에게 죽을 것인지 남편이 첩을 취하는 것에 동의할 것인지를 양자선택하도록 명한다. 노부인은 '독주'를 들어 한번에 마셔버린다.
고양공주는 집안싸움에서 노부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스님을 만나서 연애하는 것은 세속에서 허용되지 않는 일이다. 그리하여 이리저리 생각한 끝에 그녀는 방유애를 시켜 극력 집안재산싸움을 하게 하고, 집안내의 가장역할을 하도록 부추긴다.
그리하여, 방유애의 형인 방유직은 고양공주가 반드시 제거해야할 눈엣가시가 된 것이다.
당태종은 일찌기 방현령은 양국공(梁國公)에 앉히고, 대우는 군왕(郡王)과 동등하게 했다. 규정에 따르면, 방현령이 죽은 후, 작위는 적장자인 방유직이 계승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규칙을 고양공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방현령이 죽자, 그녀는 방씨집안에서 싸움을 벌인다. 황실공주라는 위세를 내세워, 방유애가 원래 형인 방유직이 가져야할 작위를 빼앗도록 종용한다. 방유직은 부득이, 스스로 당태종에게 글을 올려, 고양공주가 집안에서 하고 있는 일의 전인후과를 보고한다.
당태종은 그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고양공주를 불러 따끔하게 질책하고, 그녀가 방씨의 작위계승문제에 간여하지 말도록 금지한다.
그러나, 당태종이 붕어한 후, 고양공주는 다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는 즉위한 당고종을 찾아가서, 방유직을 방씨집안에서 쫓아내달라고 요구한다. 당고종은 당태종만큼 과감하지는 않지만, 인후하기로 유명했다. 고양공주와 방씨집안의 체면을 고려하여, 당고종은 방유직과 방유애를 각각 산서 습주자사(隰州刺史,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 습현)와, 호북 방주자사(房州刺史, 지금의 호북성 십언시 방현)로 내보낸다.
고양공주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잠시 가만히 있다가 직접 방유직이 자신에게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고 고발한 것이다. 그리하여 앞부분에 말한 고양공주와 방유직이 서로 고발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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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종은 사건을 장손무기에게 처리하게 맡긴다. 장손무기는 황제의 외삼촌이다. 집안일을 집안사람에게 맡겨서 처리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다. 고양공주의 성격을 장손무기는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이번 가정분쟁은 심리하기에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당고종이 이런 자잘한 일을 탁고대신(托孤大臣)인 그에게 맡겼다는 것은 당고종이 보고 싶어하는 것이 일반적인 심리결과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손무기는 이 사건을 어떻게 심리할 것인가?
통상적인 규칙은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통상적인 규칙인가? 이런 사건같은 경우에는 고양공주가 무례한 일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고양공주로 하여금 사실증거를 제공하게 하여 확인하면 그만이다. 마찬가지로, 방유직도 공주가 모반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관련증거를 제공하여, 그 자신은 혐의를 벗고, 집으로 돌아가 계속 양국공으로 지내면 된다. 그러나 장손무기는 그런 방법을 쓰지 않는다.
<신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장손무기는 당고종의 명을 받은 후, 즉시 쌍방당사자에 대해 '국문(鞫問)'을 진행한다. 소위 '국문'은 붙잡아와서 혹독하게 심문하는 것이다. 필요하면 추가적인 고문수단도 쓸 수 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번에는 고문에 원고와 피고를 가리지 않았다. 즉, 사건관련인원은 장손무기를 만나기도 전에 미리 혹형을 당하고 오게 된다.
국문이 실시된 후, 사건의 진전은 순식간에 상당히 분명해진다. 장손무기는 바로 발견하게 된다. 소위 고양공주가 무례한 짓을 당했다는 것은 실제로 고양공주가 방유직을 고의로 모함한 것이고, 목적은 여전히 방현령이 남긴 작위와 재산을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방유직이 말한 고양공주와 방유애의 모반건도 실질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공주부부가 모반했다는 증거가 지금 없다고 하여, 그것이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이태(李泰)는 정관연간에 고도로 위험한 인물이었다. 당시 태자(太子) 이승건(李承乾)이 모반으로 폐위된 후, 이태는 당태종에게 충성심을 표시한 바 있다. 자신이 만일 태자에 오른다면 향후 자신의 아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황위를 동생인 이치(李治)에게 넘겨주어, 대당강산의 만년태평을 지키겠다고. 그리고 옥중의 이승건도 나중에 진술한다. 자신은 어쩔 수 없이 몰려서 모반한 것이고, 수하들의 교사외에 가장 큰 유인은 바로 이태가 계속 압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태는 형인 이승건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태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불만이었고, 그리하여 계속하여 태자의 자리를 빼앗을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태종은 고의로 이태를 홀대한다. 이승건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후, 당태종은 이태를 동래군왕(東萊郡王)으로 강등시키고, 균주(均州)에 안치시켰다.
아마도 가족의 정때문인지, 당태종은 이태를 쫓아내면서 그의 주변인물들까지 연루시키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여 이태의 심복인 부마도위 시령무(柴令武), 방유애등 20여명의 황친국척들은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당고종이 즉위한 후 완전히 상황이 바뀌게 된다.
비록 이태가 태자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목적이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었다. 방유애, 시령무같이 일찌기 태자의 자리를 노리는 일을 추진하던 자들이 새로운 음모를 꾸미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이때, 이태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는 장손무기에게 경각심을 갖게 만들었다. 당고종을 둘려싸고 있는 잠재적인 위협이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원래 가정갈등을 조정하는 명을 받은 장손무기는 또 다른 사건의 '지옥판관'으로 변신하게 된다.
3
장손무기는 가정분쟁을 모반사건으로 바꾸려고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일까?
당연히, 쉽지 않다.
고양공주가 모반을 꾀했다는 것은 단지 방유직의 말 뿐이다. 자세히 추궁해보면, 기껏해야 '동기'라고 할 수 있을 뿐, 모반의 계획도 없고, 목표도 없고, 행동시간도 없다. 모든 것이 탁상공론이다.
그러나, 방유직이 당초 고양공주의 모반을 고발할 때, 나열한 증언에는 이런 말이 있다: "고양공주는 자주 액정국(掖庭局)의 우두머리인 환관 진현운(陳玄運)을 찾아가서 별과 달을 관찰하면서 천상을 점쳤다"
당나라때의 액정국은 궁녀를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환관기구이다. 고양공주가 환관의 우두머리를 찾아가서 별자리를 관찰했다. 오늘날로 보자면, 별 일이 아니겠지만, 당나라때 특히 궁정내에서, 별자리를 관찰할 자격이 있는 것은 황제를 제외하고, 흠천감(欽天監)의 천문가들 뿐이었다. 만일 다른 사람이 궁내에서 천상을 관찬했다면, 그것은 분명 음모를 꾸미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마음 속에 모반의 마음을 가져야만 천상을 몰래 관찰하기 때문이다.
고양공주가 한밤중에 환관들과 어울려 천상을 관찰했다면, 부마는 또 무엇을 했는가?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장손무기는 방유애의 교유권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놀라운' 비밀을 발견한다: 같은 관료자제로 부마가 된 시령무외에 장군 설만철, 시중(侍中) 우문절(宇文節), 형왕 이원경등 종친, 원로들이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이었다.
설만철은 당태종의 여동생 단양공주의 부마일 뿐아니라, 당나라초기 첫째 둘째가는 맹장이었다. 일찌기 당태종을 따라 두건덕(竇建德)을 격파하고, 유흑달(劉黑闥)과 싸우고, 동돌궐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당태종이 살아 있을 때 이런 말을 한 바 있다: "당금의 명장은 오직 이적(李勣),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 설만철 뿐이다. 이적, 이도종은 비록 대승을 거둘 수 없지만, 대패를 겪지도 않는다; 설만철은 대승을 거두지 않으면 대패한다." 방유애와 설만철이 함께 어울리다니, 장손무기는 거기에 분명 남에게 알릴 수 없는 비밀이 있다고 느낀다.
시중 우문절은 방유애의 사건이 터진 후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나 그를 용서하자고 주장한 조정중신이다. 형왕 이원경은 방유애의 동생인 방유칙(房遺則)의 장인으로 당시 대당종실내에서 배분이 가장 높은 왕야였다.
부마가 장군, 재상, 종왕과 자주 왕래하다나, 그리고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니, 그건 큰 일이었다.
그리하여, 장손무기는 방유애를 체포하고, 중점적으로 심문한다. 이번에 방유애는 마침내 '진실'을 토로한다.
방유애의 진술에 따르면, 그가 설만철과 왕래한 것은 확실히 당금 천자의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 조정의 일에 대하여 열을 내며 의견을 말하던 설만철은 막 다시 영주자사(寧州刺史, 지금의 감숙성 경양)로 기용된 때였다. 어느 날, 설만철이 조회에 참석한다. 조회를 마친 후, 두 사람은 방유애의 집에서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 설만철은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이 도졌고, 술김에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비록 다리에 병이 걸려있지만, 경사에 앉아 있으니, 여러 무리들이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설대장군의 위명을 생각하곤 방유애는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당고종의 통치를 전복시키고, 형왕 이원경을 황제로 앉힐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형왕 이원경을 선택했는지에 대하여, 방유애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형왕이 동생 방유칙의 장인일 뿐아니라, 더더욱 그가 당고조의 여러 아들중 가장 연장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형왕 이원경은 이전에 자신이 해와 달을 가지고 노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건 천명이 그에게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렇게 하여, '방유애모반사건'은 그 싹을 찾아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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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번 모반사건의 핵심인물은 방유애와 설만철이다. 두 사람은 비록 모두 황실과 많은 관련이 있지만, '방유애모반사건"이 무르익을 때, 그들 둘은 모두 외지의 자사로 나가 있었다. 즉, 전혀 병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지방관료이다. 모반을 일으킨다는 것은 미치광이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다시 방유애가 가까이 지낸 모반참여자를 보자. 시령무, 우문절과 이원경. 우문절이 비교적 중추권력에 가까운 것을 제외하면, 시령무, 이원경은 전혀 세력이 없었다.
당시 실행하고 있던 <당률>에는 부마, 종친간에 사적으로 교류할 수 없다는 규정이 없었다. 만일 이를 근거로 방유애가 외신과 결탁하여, 당고종의 통치를 전복시키려는 모반의 증거라고 한다면, 확실히 근거가 박약했다.
설사 이들 '말로 떠드는' 황친국척들이 정말 무슨 '대불경'한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당률>에 따르면 기껏해야 '구진욕반지언(口陳欲反之言)"의 죄이다. <당률>에 따르면, 구진욕반지언의 죄에 대한 처벌로는 이천리 유배를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장손무기는 여전히 고양공주, 방유애를 물고 놓지 않았다.
문제의 핵심은 아마도 설만철에 있지 않을까
당태종이 임종하기 전에, 3대명장중 한명으로 불리던 이적은 첩주(疊州, 지금의 감숙 질부)이 도독(都督)으로 나가 있었다. 그 목적은 등극후의 당고종이 이적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도록 해주어, 새로운 천자의 명을 듣게 하며, 탁고대신 장손무기가 독보적으로 힘을 갖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설만철은 정관말기에 역시 재주를 믿고 오만했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했다. 그리하여 고발을 받아 상주(象州, 지금의 광서성 내빈)로 유배갔다가, 영휘2년(651년)에 사면을 받아 돌아온 것이다.
설만철의 성격은 그대로였다. 당태종은 그와 여러 해를 지냈으니, 그때 그런 성격을 몰랐을 리 없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설만철은 처음에 조정의 처리결과에 불만을 가지고, 당태종을 계속 원망했다. 그리하여 이적이 당태종에게 그를 죽이라고 건의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결국 당태종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영휘2년에 사면을 받아 돌아온 후, 원래 군대내에서 제명된 설만철이 다시 신속히 당고종시대에 영주자사로 나간다. 이를 보면, 여기에는 분명 당태종이 사전에 준비한 측면이 있다.
영주의 지리적 위치는 중요하다. 거기는 서북의 변방으로, 당나라때 변방의 중요도시이다. 또한 돌궐등 서북 각 부족이 남하하여 당나라로 침입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당태종이 설만철의 목숨을 남겨두어, 그로 하여금 당고종기 봉강대리가 되도록 한 것이 우연이라면 너무나 우연이 심하다고 할 수 있다.
장손무기는 당고종의 명의로 '방유애모반사건'을 크게 키운다. 진실한 목적은 분명 이 기회를 틈타 정적을 죽이고, 조정신하를 압박하며, 자신의 위신을 세우려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장손무기는 그런 목적을 생각하자, 가장 좋은 방법은 '방유애모반사건'을 가지고 대거 사람들을 잡아들여 마음은 있으나 실행에 나서지는 않은 자들을 일망타진하는 것이다.
황제가 처리하고 싶었던 사건을, 이렇게 외삼촌이 처리하게 된 것이다.
이런 배경하에서, 방유애를 세번째 심문할 때, 마침내 최종적으로 '방유애모반사건'의 관건을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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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유애모반사건'의 영향을 확대시키기 위해, 핵심은 방유애가 더 무엇을 얘기할 수 있느냐이다. 그리하여, 장손무기는 폐태자 이승건의 호위무사 흘간승기(紇干承基)가 태자의 반란을 고발하는 공을 세운 사례를 들먹이며, 방유애로 하여금 모반에 관한 더 많은 내막소식을 털어놓게 유도했다. 관대한 처리를 받을 수 있도록.
방유애는 원래 지능이 높지 못했다. 그는 흘간승기가 죽임을 면한 진정한 원인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흘간승기가 폐태자 이승건이 모반한 범죄자실을 완벽하게 진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장손무기가 지금까지 심문했지만, 진술한 것은 단지 '막수유'의 죄상뿐이다. 근본적으로 근거도 없고, 범죄를 구성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반대로, 그가 이전에 진술한 모든 것은 <당률>이 규정한 또 다른 대죄에 더욱 부합했다. 무고(誣告). 거짓증언을 하는 자는 무고와 동일하게 본다. 상황이 엄중하면 극형에 처할 수 있다.
방유애는 장손무기에게 속았다. 장손무기의 유도하에 살고 싶었던 방유애는 계속하여 오왕(吳王) 이각(李恪), 강하왕 이도종,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집실사력(執失思力)을 포함한 일련의 황실친척, 대신 및 군대고위층의 명단을 털어놓는다.
그중 앞에서 말한 설만철과 유사하게, 이도종, 집실사력도 군인출신의 고위층이다. 다만 이 두 사람은 장손무기와의 관계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오왕 이각이야말로 장손무기가 방유애에게 가장 듣고싶어하던 이름이었다.
오왕 이각을 장손무기가 신경쓴 가장 큰 이유는 당태종이 살아 있을 때, 이각이 "영과(英果)하여 나와 같은 류이다"라고 말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치를 태자로 세운 후에도 3,4번 이치를 폐위시키고 이각을 태자로 세울 생각을 품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당태종은 일찌기 장손무기와 논의한 바 있다. 그러나 장손무기는 외삼촌의 신분을 내세워 극력 다투었다. 이치의 사람됨이 더욱 인애(仁愛)하고, 폐하께서 태자를 세운 조서를 이미 내렸으니, 다시 조령석개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그리하여 이치의 계승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각은 조정내에서 명망이 여전히 아주 높았다. 후세의 사관들까지도 이렇게 말한다: "태종의 여러 아들들 중에서, 오왕각(吳王恪), 복왕태(濮王泰)가 가장 뛰어났다."
이때 복왕 이태는 이미 목숨이 간당간당하고 있었고, 당고종의 황제위를 위협할만한 인물은 오직 오왕 이각 1명뿐이었다.
장손무기의 유도에 따라, 방유애는 설만철과 상의하여 정한 반란계획에서 형왕 이원경은 단지 예비인선일 뿐이고, 진정 황제로 세우려 한 사람은 오왕 이각이라고 진술한다.
장손무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방유애모반사건"의 심리를 종결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급히 심리결과를 당고종에게 보고하여, 집행지시를 기다린다.
"장손무기의 심리결과는 다음과 같다: 방유애, 설만철, 시령무는 우두머리이므로 모두 참해야 한다. 그들의 맹우이자 친척인 고양공주, 파릉공주(巴陵公主, 시령무의 부인), 형왕 이원경, 오왕 이각은 자진(自盡)을 명하여야 한다. 우문절, 이도종, 집실사력등의 '방흉(幇凶)'은 방유애 설만철등의 친척인 방유직, 설만비(薛萬備)등과 같은 죄로 만황(蠻荒)의 땅으로 유배보내고, 부르지 않는한 경성으로 돌아올 수 없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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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삼촌 장손무기가 심리를 통해 얻어낸 결과를 보고, 기이하다고 여긴 당고종은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는 조회를 열어 대신들에게 묻고, 눈물을 흘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삼촌에게 가볍게 판결할 수 없을지 간청한다: "짐은 형제가 많지도 않다. 형왕은 짐의 숙부이고, 오왕은 짐의 형이다. 그들을 죽게만들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장손무기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태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다른 조정대신들도 모두 침묵을 지킨다.
조정의 분위기가 난감하기 그지없게 되었을 때, 장손무기와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하는 병부상서 최돈례(崔敦禮)가 겨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비록 은햬를 베풀고자 하시나, 찬하의 법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그 말에 숨은 의미는 태위의 심판이 공정했고, 방유애등은 중죄를 저질렀으니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라. 조정에서 황제가 고립무원이고, 여러 신하들은 오직 장손무기의 말만 듣는다. 이런 장면은 옛날 한헌제의 곁에서 동탁, 조조가 했던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장손무기는 모반사건을 빌미로 오왕 이각등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 주요목적은 최선을 다해서 당고종의 황제위를 지키려는 것이었다. 근본이익으로 보자면, 당고종의 생각은 장손무기와 같아야 한다. 그러나 황제의 존엄이 필요한 당고종의 입장에서 보자면, 옛날에 조조도 직접 한헌제의 명의를 빌어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지 않았던가?
장손무기의 이번 행동은 자세히생각해보면 매우 무서운 일이다.
당연히, '방유애모반사건'의 촛점은 어떻게 당고종의 황제지위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하느냐이다. 사실상의 수혜자로서, 능구렁이같은 속을 지닌 당고종은 실제행동으로 장손무기의 최종결정을 지지한다.
영휘4년(653년), 이월 초이틀, 오왕 이각은 모반죄로 액살(縊殺, 목을 매어 죽다)당한다. 같은 날 오로지 살고 싶어했던 방유애와 그의 친구 설만철이 함께 목이 잘린다. 이번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고, 평생 시끄럽게 일을 저질러왔던 고양공주는 이번에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가장 비참한 사람은 방유직이다. '방유애모반사건'의 주모자인 방유애의 형으로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생의 모반에 참여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장 먼저 방유애모반사건을 고발한 공신이다. 그러나, 그는 방유애의 형이었고, 모반죄는 연좌가 적용되어, 춘주(春州, 지금의 광동성 양춘) 동릉위(銅陵尉)로 좌천되어, 머나먼 영남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이렇게 보면 장손무기가 승리자로 보인다. 그러나 그도 몰랐던 것은 도필리가 각종 형구를 가지고 와서 이각에게 마지막 길을 가도록 재촉할 때, 오왕 이각은 천지를 놀라게만들 저주를 남긴다: "장손무기는 권력과 위세를 훔쳐서 가지고 놀며, 선량한 사람들을 모함했다. 종사에 영혼이 있다면 그는 오래지 않아 멸족될 것이다!"
그렇다. "방유애모반사건"이 끝난지 겨우 6년만에, 장손무기도 당고종에 의해 같은 죄명으로 자살을 강요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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