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역사황금도(歷史黃金島)
일반인들의 생각으로는 안사의 난 이후 대당제국이 사분오열되고, 이미 완전히 쇠퇴하였으며, 당나라가 흥성한 것은 안사의 난 이전의 100여년간이라고 여긴다.
기실, 대당은 화하역사상 보기 드물게 강력한 인성(靭性)이 있었떤 왕조이다. 안사의 난이라는 다른 왕조같으면 왕조가 멸망할 동란을 겪고서도 150년간이나 더 존속할 수 있었다.
그뿐아니라, 안사의 난 이후의 중당(中唐), 만당(晩唐)은 절대로 암흑시기가 아니었다. 반대로 안사의 난이후 당나라는 강력한 생명력을 폭발시켰고, 중고(中古)에서 근고(近古)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천년변국(千年變局), 천년곤국(千年困局)에 각 방면에서 중요한 돌파구를 마련한다.
그 배후의 원인은 아주 복잡하다. 필자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이 그냥 보아넘기기 쉬운 요소이다. 그것은 바로 대당이 안사의 난을 겪었지만, 중추의사결정체계는 여젼히 효율적으로 운용되고 있었던 강인한 제국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요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첫번째 요소는 중당이후의 황제들이 대부분 장년에 즉위하였고, 즉위전에 여러 직위에서 단련을 거쳤으며, 통치기간도 비교적 길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대당의 황위계승을 "금위군계승제(禁衛軍繼承制)"라고 놀리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대당의 후계자 자리는 쉽게 오르지 못했다. 많은 경우 강력한 수단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 이는 한편으로 혼란을 조성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장점도 분명했다. 그것은 바로 황위에 오른 당나라황제들은 대부분 성숙되고 능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대당황제로 18세이전에 즉위한 사람은 단지 4명이다. 각각 당상제(唐殤帝) 이중무(李重茂, 16살), 당경종(唐敬宗) 이담(李湛, 16살), 당희종(唐僖宗) 이현(李儇, 12살), 당애제(唐哀帝) 이축(李柷, 13살)이다. 이중무는 자리에 앉자마자 이융기(李隆基)에게 끌려내려왔고, 당애제는 주온(朱溫)의 꼭두각시였으므로 언급할 필요도 없다. 안사의 난 이후에 18세 이하의 나이로 즉위한 사람은 당경종과 당희종 두 사람이다. 고인들은 조숙하였으로 16살에 즉위한 당경종은 기실 이미 철이 들었을 것이다.
나머지 안사의 난 이후에 즉위한 당나라황제들은 모두 장년에 즉위한다. 각각 당대종(唐代宗) 이예(李豫, 37살), 당덕종(唐德宗) 이적(李適, 38살), 당선종(唐宣宗) 이침(李忱, 37살), 당헌종(唐憲宗) 이순(李純, 27살), 당목종(唐穆宗) 이항(李恒, 26살), 당문종(唐文宗) 이앙(李昻, 19살), 당무종(唐武宗) 이염(李炎, 27살), 당의종(唐懿宗) 이최(李漼, 27살), 당소종(唐昭宗) 이엽(李曄, 21살). 이들 황제들은 즉위전에 대부분 이미 천하병마대원수등의 직위를 맡아 단련을 거쳤고 경험이 쌓여 있었다.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황제는 즉위시에 이미 '완전체'였다.
장년에 즉위하면 좋은 점도 있다. 그것은 장수한다는 것이고, 통치기간이 길어진다는 것이다. 안사의 난이후의 당나라황제들 중에서 30살까지 살지 못한 사람은 당경종 이담(18세), 당희종 이현(27세), 당애종 이축(17세)의 세 명 뿐이다. 재위기간이 1년이하인 경우는 당순종(唐順宗) 이송(李誦) 1명뿐이고, 2-5년도 겨우 3명이다. 당목종 이항(5년), 당경종 이담(3년), 당애제 이축(4년). 당애제를 제외하고 당목종의 5년도 기실 비교적 긴 편이다. 나머지 당나라황제들은 재위기간이 모두 6년이상이다.
황제가 장년에 즉위하고, 즉위전에 여러 직위를 거치면서 경험을 쌓고, 재위기간이 길며 안정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대당의 중추시스템이 강인했던 첫번째 요소이다.
두번째 요소는 대당의 의사결정시스템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었으며, 커뮤니케이션비용이 아주 적게 들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가정제(嘉靖帝)가 상조(上朝, 조회에 나가다)하지 않고도 조정국면을 통제했으니, 대명의 중추의사결정시스템이 아주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효과적인 점으로 본다면 대명은 대당만 못했다.
"상조"의 중요성이 무시되고 있다. 상조가 의미하는 것은 최고의사결정권자가 관료집단과 나라를 다스리는 이슈를 놓고 토론을 진행하는 것이다. 관료집단과 황제가 수수께끼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되면 커뮤니케이션비용이 크게 올라가게 된다.
가정제가 상조하지 않아도 대명이 돌아간 원인은 명청때는 이미 극도로 보수적이고 내향적인 왕조였기 때문이다. 개착과 혁신이 줄어들면 처리할 사무의 대부분은 '조제(祖制)'에 따라 처리하면 그만이다. 만일 대명중후기에 대당과 같은 국면을 맞이했으면, 수십년간 상조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몇년 몇개월만 상조하지 않더라도 수습불가능한 상황이 펼쳐졌을 것이다.
당나라의 최고의사결정회의는 주로 4가지이다:
하나는 상참결책회의(常參决策會議)이다. 매년 정원원일(正月元日), 매월 1일과 15일. 당나라황제는 대명궁 선정선에서 5품이상 관리들을 만난다. 다만 이런 방식은 너무 단조롭고, 시간간격이 비교적 길어, 나중에 이런 화의는 예의적 성격으로 바뀌고, 의사결정을 하지는 않게 된다.
둘은 장하후결책회의(仗下後决策會議)이다. 당나라황제가 백관을 만날 때는 위사(衛士)가 의장(儀仗)과 경위(警衛)를 먼저 배열하고, 회견이 끝나면 백관은 위사들과 함께 떠난다. 위사가 떠난 후에 황제는 재상등 고위관료와 만나는데, 이를 장하후결책회의라 한다. 장하후결책회의는 상참결책회의보다 훨씬 신축성이 있고, 참여인원도 더욱 적다. 그리하여, 아주 핵심적인 의제에 대해 충분히 토론할 수 있다. 다만 이런 방식은 탄력성이 없다. 그리하여 제3의 결책방식이 나타난다.
셋은 연영결책회의(延英決策會議)이다. 연영결책회의는 대명궁 연영전에서 거행되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이런 결책회의는 거행시간이 비교적 탄력적이고, 효율이 높다. 토론의제와 참여인원은 광범위하고 합리적이다. 의사결정절차는 과학적이다등의 장점이 있다. 중만당의 최고층결책회의라 할 수 있다.
(1) 연영결책회의의 거행시간은 비교적 탄력적이고 효율이 높았다. 연영결책회의는 황제가 조서를 내려 거행할 수도 있고, 재상 심지어 6부장관이 신청할 수도 있으며, 업무처리는 효율적이었다. 황제와 재신(宰臣)은 모두 연영결책회의개최를 요구할 수 있고, 이것은 오늘날과도 별 차이가 없다.
(2) 연영결책회의에서 토론하는 의제는 광범위하고 합리적으로 층이 나뉘어 있었다. 군국대사는 연영결책회의의 주요토론내용이다.예를 들어, 중당이후의 양세법(兩稅法)은 바로 양염(楊炎)이 연영결책회의에서 제기하고, 당덕종이 동의하여 추진한 것이다. 양세법은 안사의 난 이후 제국의 부역을 크게 늘어 인구가 흩어지고 국가재정수입이 급격히 감소하는 곤란한 국면을 해결하는데 핵심작용을 한다.
다만, 어떤 때는 군신간에 다른 정보교류의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가 의제를 다 논의한 후에 한담을 나누는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당헌종 시기에는 "연영에서 회의를 할 때 공무를 끝내면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선종때도 연영결책회의에서 "매번 재상이 업무를 보고할 때면, 곁에 아무도 서는 자가 없었다. 위엄이 감히 쳐다보지 못할 정도였다. 보고하는 일을 마치면, 갑자기 편안하게 '한담을 나눕시다!'라고 하며, 항간의 이야기나 궁중이 연회를 얘기하는 등 못하는 얘기가 없었다."
당헌종과 당선종은 모두 능력있는 제왕이었다. 그들은 연영결책회의를 충분히 이용하여 내외상황을 파악하는 통로로 삼았다. 심지어 군신관계를 가깝게 하고,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방식이기도 했다.
(3) 연영결책회의의 참가인원은 매우 광범위하면서도 합리적이다. 당나라의 중앙최고의사결정회의로서 삼성, 육부의 장관등은 연영결책회의의 핵심참가인원이다. 나중에 참가인원이 확대되어, 당대종때는 연영회의에서 차례를 나누어 중서사인과 간관을 만났다. 당덕종시기부터는 각사(司)의 장관도 참가하게 했고, 당헌종시기에는 "중서문하성, 어사대, 습유, 감찰어사, 및 상육품, 제사사품이상관리, 동궁의 사, 부, 빈객, 첨사, 및 왕부청등"으로 더욱 확대된다.
(4) 연영결책회의의 절차는 역대당나라군신들이 보충하여 최종결책절차가 아주 과학적이 된다.연영결책회의의 의사결정절차는 주로 의제제출 - 회의토론결책 -황제혹은 재상/군사에서 문서작성 등의 여러 단계가 있다.
의사결정은 아주 신곡했고, 단계도 과학적이다.예를 들어, 사원로(謝元魯) 선생의 <당대중앙정권결책연구>라는 책에 따르면,당문종시기에 재상 송신석(宋申錫)의 무고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을 언급하고 있다.
당시 권세를 지니고 있던 환관인 신책군 중위 왕수징(王守澄)이 말하기를 송신석이 장왕(漳王)과 모반을 꾀한다고 말한다.이건 큰 일이다.당나라의 중추가 그 주장(奏章)을 받은 후, 신속히 움직인다:
"대화5년 이월 무술, 즉 이월 이십구일, 환관이 송신석이 장왕 이주를 옹립하려고 했다고 무고한다. 그날은 비록 휴일이었으나, 문종은 즉시 송언석과 함께 재상으로 있던 우증유, 이종민과 노수 세 사람을 연영전에 불러 회의한다. 동시에 관련인원을 체포한다. 삼월 삼일, 상사절 휴일이지만, 문종은 연영전에서 재상 이하 고위관료들을 불러 송언석의 '반장(反狀)'을 공표한다. 삼월 사일은 국기일(國忌日)인데, 간관이 집단으로 연영전에 진입하여 송신석이 억울하다고 호소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문종은 다시 재상을 연영전으로 불러 회의한다. 삼월오일 문종은 송신석을 유배보내고, 장왕을 처리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보면, 이월 이십구일 왕수징이 부하를 시켜 상소를 올리게 지시한 때로부터 삼월 오일 당문종이 송신석을 유배보내고 장왕을 처리하기까지 모두 5,6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중간에 이틀은 휴일이었다. 당문종은 연영전결책회의 매커니즘을 통해 3차례에 걸쳐 고위관료를 불러 토론하고, 중간에 한번은 간관들이 집단으로 연영전으로 가서 송신석이 억울하다고 호소한다. 최종적으로 이 중대사건은 타당하게 해결된다. 금군(환관), 문관집단의 요구사항을 균형을 맞추어 처리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정무처리의 매끄러운 매커니즘으로 대당제국은 안사의 난 이후 극히 복잡한 정치국면에서도 효과적으로 반응할 수 있었다.
넷, 즉 마지막은 연영결책회의의 보충으로, 한림학사소대회의(翰林學士召對會議)이다. 한림학사는 당나라황제의 싱크탱크이다.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된 후 고위문관으로 승진하는데 중요한 과도기적 직위이다.한림학사를 맡은 관리는 국가대사에 아이디어를 낼 수 있고,이를 통해 그들은 장래 재상에 오르는 기초를 닦는 것이다.
한람학사소대회의는 연영결책회의처럼 정식으로 광범위한 참여인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주로 황제와 한림학사간에 일어나고, 황제의 의사결정을 보충하는데 큰 의의가 있다.많은 한림학사는 이 플랫폼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간언하고, 심지어 황제와 부닥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백거이가 한림학사를 맡고 있을 때는 비교적 젊었을 때였다. 한번은 참지 못하고 직접 당헌종에게 이건 폐하가 잘못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해버린다. 당헌종은 그의 말을 듣고 불쾌해했고, 당시의 한람학사 이강(李綱)에게 투덜거렸다. 백거이 이자는 언동이 불손하다. 반드시 그를 한림원에서 내보내야겠다고. 이강은 당헌종에게 해명하여 말하기를 백거이는 충성심이 강한데, 폐하가 그를 내쫓으시면 다른 사람들이 감히 의견을 말할 수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여, 당헌종은 백거이를 계속 한림학사로 남겨두게 된다.
이런 사례는 아주 많다. 한림학사는 자주 황제와 국가대사를 토론하였고, 중추결책체계를 효과적으로 보완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안사의 난이후 당나라가 기능을 잃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강인하고 효율적이며 적시에 제국의 각종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추결책체계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바로 이런 시스템이 잘 이끌어주어서 대당은 점차 안사의 난으로 조성된 치명적인 상처를 치유하며 회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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