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안사의 난(安史之亂)의 진실은...? (3)

중은우시 2024. 10. 13. 17:06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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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의 난을 평정한 여러 충신과 공신들 중에서, 곽자의는 유일하게 선종(善終)한 인물이다. 이건 항제가 그에 대해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서가 아니고, 곽자의 본이니 뛰어난 EQ를 지니고 있었으며, 인욕부중(忍辱負重)했고, 심지어 심지어 자오(自汚, 스스로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파란만장하고 궤이한 정치투쟁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사서(史書)에서 말하기를 안사의 난 이후, 천하의 안위는 곽자의 한 사람의 몸에 이십년간 달려 있었다. 당시, 곽자의는 "권력이 천하에 미치지만 조정의 의심을 사지 않았고, 공로가 세상을 뒤엎을 정도이지만, 황제의 의심을 사지 않았다. 호화사치를 다 했지만, 그것에 대해 죄로 처벌받지 않았다." 실제로 이름을 날린 후의 곽자의는 경심동백(驚心動魄)이었고, 수시로 인생의 낭떠러지로 몰리곤 했다.

안사의 난이 발발한 후, 곽자의는 이미 나이 60에 이르렀다. 삭방군의 총사령관으로서, 그는 혼자의 힘으로 내란을 평정하고 외적을 막아냈다. 그는 강력한 호소력과 높은 군사적 재능을 발휘한다. 당숙종은 일찌기 그에게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비록 나의 집이고 나라이지만, 실로 경이 다시 만들어 준 것이다(雖吾之家國, 實由卿再造)!" 그러나 공로가 너무 커서 군주의 자리를 흔들 정도가 되는 것은 실로 관료로서 장수로서 일대금기이다. 당숙종이 이런 말을 했을 때, 곽자의의 공명과 위기는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나타나게 된다.

지덕2년(757년), 양경(장안, 낙양)의 수복이 가까워지자 당숙종은 벌써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그를 골치아프게 만든 것은 어떻게 하면 하루빨리 안사의 난을 평정할 것인가에 있지 않고, 어떻게 삭방군의 두 장수 곽자의와 이광필을 대우할 것이냐에 있었다. 그는 이필(李泌)을 불러 사적으로 묻는다: 곽자의, 이광필은 이미 재상인데, 양경을 되찾고, 사해를 평정하면 더 이상 줄 관직이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이필이 그에게 제시한 대책은 이러했다. 관직을 공신에게 상으로 내리지 말라. 그렇게 하면 장수의 권한이 커지고, 공이 높아서 견제하기가 힘들어진다. 천하가 태평하게 된 후에 토지와 작위를 공신에게 내려라. 그렇게 하면, 그들은 자신과 자손의 기득이익을 보호하려는 생각에 감히 딴 생각을 품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건의를 당숙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는 오히려 반대로 행동한다. 천하가 아직 태평해지지도 않았는데, 대당의 목숨을 연장시켜준 공신들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장수의 권한이 커지면 견제가 어렵다면, 권한을 커지지 못하게 막는다; 공신의 공이 크면 상을 내리기 어렵게 된다면, 그들이 높은 공을 세우지 못하게 만든다.

안사의 난을 평정하는데 8년간이나 걸린 것은 실제로 당숙종이 종횡으로 제왕술을 펼친 것과 큰 관계가 있다. 그에게 있어서, 전쟁에서 이기는데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 당연히 장수의 권위를 세우는 게 아니라, 황제 자신의 권위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 장수로 반군을 물리치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수시로 그들의 전공과 권력을 견제하였다.

업성전투의 패배이후, 군대통수권이 없던 곽자의는 어쩔 수 없이 통수권자의 책임을 지고 직위를 면직당하여 장안에서 한가하게 지내게 된다. 꼬박 삼년여동안 전체 제국이 전쟁에 휘말려 있는데 그는 장안에서 그저 지는 해나 보고 있어야 했다. 설사 조정이 그를 기용하더라도, 일이 끝나면 다시 불러들여 계속 석양이나 보고 있게 했다.

사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곽자의가 삭탈관직당한 것은 어조은의 시기로 인하여 모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만, 모함이 작용을 발휘하려면 황제가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황제가 믿은 것은 그에게 믿어야할 필요가 있었거나 혹은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역사상 군신관계를 이간하는 소위 모함은 까놓고 말해서 주군이 소인의 입을 빌어 마음 속의 말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윗글에서 얘기한 것처럼 안사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로가 가장 큰 인물은 곽자의가 아니라 이광필이었다고. 이것은 바로 업성전투이후, 곽자의는 기본적으로 주변에 밀려나 있었기 때문이다. 적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전선에 나갈 힘이 없었다. 자연히 더욱 큰 공로를 쌓을 기회가 없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곽자의는 목숨을 지킬 수 있었고, 전공제일의 장수 이광필은 목숨이 위험해지게 된 것이다.

당숙종 재위기간, 곽자의는 한때 다시 기용된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여전히 화장실의 휴지와 마찬가지였다. 쓰고나면 버린다. 당대종이 즉위한 후, 환관 정원진은 "명잘들을 질투하고, 곽자의의 공이 너무 커서 제압하기 어려워" 다시 모함을 한다. 당대종으로 하여금 곽자의의 군직을 다시 파면하게 만든다.그리하여 곽자의는 "숙종산릉사(肅宗山陵使)"가 되어 당숙종의 능묘를 축하게 된다.

광덕원년(763년) 십월에 이르러, 토번이 장안을 공격헤 들어온다. 그러자 당대종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적합한 장군을 구하지 못하자, 할 수 없이 곽자의를 불러 적을 막도록 한다. 곽자의는 두 말 하지 않고 병사를 이끌고 성을 나선다.

그렇다. 이때 그의 부하는 겨우 20여기의 기병만 남아 있었다. 이런 규모라면 현재 대형아파트단지의 보안인원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장수들을 상대하는 측면에서, 당대종은 당숙종보다 훨씬 더 나갔다. 당숙종은 장수의 권한이 커지는 것을 막고, 그들을 이리저리 이동시켰다. 그래도 그들에게 살 길은 마련해 주었고, 나중에 전투가 발생하면 그들로 하여금 다시 대당의 연명을 위해 싸울 수 있도록 했다. 당대종에 이르러 안사의 반군이 이미 수습되자 천하는 태평한 겉모습이 나타난다. 토사구팽이 나타난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당숙종은 그들의 권한을 빼앗았지만, 당대종은 그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당대종은 즉위한 후 2년동안, 대당의 연명을 위해 공헌한 공신드리 하나하나 죽어나간다: 내전은 먼저 쿠데타혐의를 받고 나중에 사사당한다; 복고회은도 시기를 받아 반기를 들었다가 금방 병사한다; 이광필은 시기를 받은 후 울분과 두려움에 싸여 죽는다; 유일하게 곽자의만이 잘 살아남았다...

왜냐하면 곽자의는 손에 쥔 병권이 없었고, 겨우 "이십기"만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그걸 신경쓰지 않았다. 이때의 곽자의는 목숨을 지켜낼 수 있었을 뿐아니라, 당대종에게 중용되어 제2의 봄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권모술수에 능한 황제에 있어서 사람을 쓰고 사람을 기르는 것은 항상 한 무리를 죽이고, 한 무리를 남겨두는 것이다. 중흥장수를 모조리 주살해버린 후에는 어쨌든 누군가 나서서 국면을 수습하고 정리해야 했다. 곽자의는 더 할 나위없는 선택이다. 그는 남겨져서 그런 임무를 맡게 된다. 첫째는 병권이 없고, 둘째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시간대는 음미할 만하다. 당대종이 딸 승평공주(昇平公主)를 곽자의의 아들 곽난(郭暖)에게 시집보낸다. 그때가 영태원년(765년)이다. 이해에, 안사의 난으로 굴기했던 공신, 장수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수습된 이후이다. 확실히 곽난과 승평공주의 결혼은 정치성이 매우 강하다. 당황실이 곽자의를 중용하면서도 경게해야하는 상황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번 정략결혼은 외부인들은 곽씨집안의 영광을 보게 되지만, 곽자의 내심의 초조함은 보지 못한다.

당대종이 다른 공신을 강력하게 타격하고 목숨까지 빼앗는 동시에 유독 곽자의에 대해서는 중용하게 된 것은 한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황제가 비록 곽자의를 진정으로 신임할 수는 없었지만, 곽자의의 일처리방식은 최소한 신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든 황제의 명이 있으면 그는 모든 일을 내려놓고 즉시 장안으로 달려왔다. 그가 황제 주변 총신의 모함을 받았을 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든, 그것이 설사 적군과 전투하는데 중요한 순간에 접어들었더라도, 그는 밤을 새워 황제의 곁으로 달려와서 충성심을 나타냈다.

그리고, 곽자의의 충성표현은 단지 형식주의에 그치지 않았다. 바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았다. 스스로 조정에 자신의 병권을 해제하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지덕2년(757년), 명성을 만천하에 떨친 후, 그는 계속하여 사직을 청하고, 자신의 일부 혹은 모든 관직을 내놓는다. 광덕2년(764년), 복고회은이 핍박에 몰려 반란을 일으킨다. 토번, 회흘군과 결탁하여 남하했다. 당대종은 곽자의에게 한 무더기의 관직을 내리면서, 병력을 이끌고 가서 막도록 했다. 곽자의는 말했다. 초무사(招撫使)라는 직위는 반군을 막는데 필요하니 감히 사양할 수 없지만, 태위(太尉)의 직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는 태위직을 사양하면서 황제에게 충성심을 표시한다. 저는 일찌감치 범려(范蠡)와 같이 소요자재하는 나날을 보내고자 행각했습니다. 그러나 "적군이 가까이 다가오고, 나라가 안정되지 못했으니, 신하의 마음으로 감히 편안하게 지낼 수 없습니다." 이렇게 겨우 중임을 맡기는 하지만, 실제로 자신은 권력에는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것을 표명했다.

당대종은 크게 감동받는다. 그러나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곽자의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글을 올려 사양한다. 그제서야 당대종은 마침내 동의한다.

곽자의가 성공적으로 복고회은과 토번, 회흘연합군을 막아내 장안의 위협을 제거한 후, 당대종은 그의 전공을 포상하기 위하여 조서를 내려 그를 상서령(尙書令)에 임명한다. 상서령이라는 관직은 대단한 것이다. 당태종 이세민도 이 직위를 가진 적이 있다. 그후 이 직함이 수여된 경우는 아주 적었다. 그러자 곽자의는 놀라서 취임할 수 없다고 간절하게 말한다. 당대종은 그러나 그에게 하루빨리 취임하도록 독촉하고, 조정에서 이미 그의 성대한 취임식을 준비했다고 말한다.

곽자의가 죽어도 취임하지 않겠다고 버티자 당대종도 어쩔 도리가 없어 결국 명을 거둔다. 그후 어조은에게 조서를 전하게 한다. 곽자의에게 6명의 미인, 8명의 시종을 내리고, 한 무더기의 거복(車服), 유장(帷帳), 진완지구(珍玩之具)를 내린다. 이번에는 곽자의도 기꺼이 받는다.

어떤 것은 받아도 되고, 어떤 것은 받아선 안되는지 곽자의는 너무 잘 알았다. 권세있는 관직은 하나의 유혹이다. 황제가 진심으로 하더라도, 곽자의는 시종 이런 마음으로 대했다: 이건 황제의 나에 대한 시험이다. 실은 '인사출동(引蛇出洞)'이다.

두 군신간의 힘겨루기에서 당대종이 항상 피동적으로 시험을 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그가 적극적으로 곽자의를 도발하고, 고의적으로 자극하면서 그의 반응을 보기도 했다.

대력10년(775년), 곽자의는 부하관리들을 임명하려고 허가해달라는 신청을 한다. 그러나 조정에서 계속 허가문서가 내려오지 않았다. 그의 부하는 기분나빠하면서 내뱉었다. 공꼐서는 이렇게 높은 공로와 덕을 가졌는데, 이런 자그마한 관리를 임명하는데도 견제를 받고 있으니, 조정의 재상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냐.

실제로 모두 알고 있다. 최종결정권은 황제 당대종에게 있다는 것을. 단지 직접 황제라고 말을 하지 못하고, 재상을 끌어내서 얘기한 것이다.

곽자의는 그 말을 듣고, 즉시 그들에게 설명한다: 너희가 잘못한 것이다.

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인가. 곽자의는 말했다. 군벌들이 각 지방에 버티고 있으면서 그들이 요청한 것을 황제는 거절할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승인한다. 나의 청구에 대해 허가가 나오지 않는 것은 황제가 나를 군벌로 여기지 않는 것이고, 나를 신임하는 것이다. 너희는 마땅히 나를 축하해주어야 한다.

이런 기발한 해석으로 곽자의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았다. 아마 이 일이 금방 당대종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는 곽자의에 대하여 더욱 마음을 놓게 된다.

<구당서>, <신당서>이건 아니면 <자치통감>이건, 모두 곽자의에 대하여 신하로서, 장수로서 사람됨으로 모두 극히 높은 평가를 한다. 그에 대하여, "재조왕실, 훈고일대(再造王室, 勛高一代)", "대아군자, 사직순신(大雅公子, 社稷純臣)". 그러나, 역사가들에게는 그저 천추에 모범이 될 신하의 전형적인 인물이 필요했을 뿐이지만, 그들은 이 모범신하가 내심으로 받은 압박,그리고 공고개세(功高蓋世)이후 고처불승한(高處不勝寒)의 초조함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직순신"의 "순(純)"자는 곽자의가 얼마나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조정의 중신이 모함, 시기와 시험을 계속하여 당하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자신은 멍청하고 하얗고 깨끗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주 '순결'하다, 백지와 마찬가지이며, 오직 황권에 충성하고 죽을 때까지 두 마음을 먹지 않는다고 했어야 했던 것이다.

대력년간, 곽자의는 영주에서 토번군을 대파한다. 바로 이때 그의 부친의 장안의 무덤을 누군가 도굴한다.

조상묘가 도굴당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사람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었다.

장안의 관계에서는 이것이 곽자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어조은이 지시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곽자의 본인도 이에 대하여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전선에서 돌아와 당대종을 알현할 때, 조정의 문무대신들은 걱정이 많았다. 그가 분을 참지 못하고 정변을 일으킬까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눈물을 흘리면서 바닥에 꿇어앉아 황제에게 보고했다. "신은 일년내내 병력을 이끌고 바깥에 있으면서, 병사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 군대내에서 다른 사람의 조상묘를 발굴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이 나를 벌하는 것같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 신과 원한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그는 아무리 큰 타격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더라도,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역시 황제를 안심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황제가 가장 꺼리는 중신으로서, 곽자의가 '희생'한 것은 아주 많다. 예를 들어, 개인비밀공간이다. 그의 집은 황제가 하사한 것으로 면적이 상당히 넓었다. 장안 친인리(親仁里)의 1/4이었다. 다만 곽자의는 담장을 만들고 자신의 저택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개방했다. 장삿군이건 지나가는 사람이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 곽씨집안의 딸들이 거울을 보며 화장하는 모습도 다른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의 자식들은 불만이었다. 속속 원망의 말을 내뱉는다. 부친은 국가의 중신인데, 어찌 스스로를 조그만치도 존중하지 않는 겁니까?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식구들의 침실안으로 드나들 수 있게 하면 체통이 서겠습니까? 고대의 현신인 이윤(伊尹), 곽광(霍光)도 이러지는 않았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이 곽자의는 자식들을 교육시켜야 했다. 우리 집은 황제에게 받은 좋은 말이 오백필이고, 일하는 사람이 천명이 넘믄다. 만일 문을 높이 만들고 집을 크게 지으면서 외부인이 드나들지 못하게 막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분명 내가 반역을 도모한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무슨 말로 변명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조정에는 곽자의를 꺼리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들은 기회만 노리고 있었고, 죽어라 곽자의가 실수하기를 기다렸다. 건중초년 당덕종은 십월에는 살생을 금했다. 다만 곽자의의 집안사람이 양을 죽였다. 어떤 사람이 그것에 주목하여 즉시 상소를 올려 보고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황제는 그에게 관직과 작위를 내렸지만, 곽자의는 모조리 거절했다. 그러나 황제가 그에게 내린 미녀와 돈은 곽자의가 감사해하며 받았다. 그는 사생활에서 호화사치했고, 한번 연회를 베푸는데 3,40만을 썼다. 손님을 만날 때도 희첩들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들이 말한 곽자의가 "치궁인욕(侈窮人欲)"했다고 말한 것이다.

곽자의의 생각에 이런 연회에 참가한 사람은 분명 바로 황제에게 보고할 것이라는 것이다. 곽자의가 향락에 빠져 가슴 속에 큰 뜻을 품고 있지는 않고, 갈수록 쓸모없는 인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곽자의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황제는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황제가 안심하는 것을 보면서, 곽자의도 안심했다.

이야기의 마지박은 당덕종이 즉위하면서 표면상 곽자의를 "상보(尙父)"로 존경하며 지고무상의 영예를 준다. 그러나 암암리에 곽자의의 권한을 빼앗아 여러 명이 나누어 갖게 한다. 이렇게 하여 나이 팔순인 곽자의는 그저 제국의 상징으로 남는다. 신황제는 더 이상 일찌기 위고권중(位高權重)의 신하가 무슨 역모의 마음을 품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제국의 모범관리를 선전할 때, 위협이 되지 않는 곽자의를 내세웠고, 그는 이전보다 더욱 신임받게 된다. 그의 당황실에 대한 충성은 이전보다 더욱 많이 더욱 크게 선전되었다.

곽자의는 일찌감치 황제에게 충성심을 나타낸 바 있다: "발섭간조(跋涉艱阻), 출몰사생(出沒死生), 소장유천(所仗惟天), 이지금일(以至今日)" 그때 당대종은 아마 그의 말에 반신반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당덕종은 깊이 믿고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건중2년(781년), 곽자의가 85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당덕종은 그를 위해 조회를 5일간 파한다. 그리고 죽은 후에 큰 영광을 누리게 해준다. 그는 무측천시대에 태어나서, 당덕종시대에 죽는다. 전후로 7명의 황제를 겪었다. 그의 일생에서 마지막 20여년은 황제와 계속하여 소리없는 전쟁을 벌였고, 이제 함께 묻혀졌다. 이제부터 공고부진주(功高不震主), 군신무혐극(君臣無嫌隙)의 곽자의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사(正史)이고 우리가 볼 수 있는 역사(歷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