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화로치(禾珯茬)
당대종(唐代宗) 광덕원년(763년) 정월, '안사의 난'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었다.
1
사조의(史朝義)는 막주(莫州, 지금의 하북성 임구 북쪽)에서 당군에게 패배하고, 성안에 들어가서 사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조의는 연(燕)의 마지막 황제이고 반란군장수 사사명(史思明)의 아들이다.
대세가 기운 것을 보자 부장(部將) 전승사(田承嗣)는 기운빠진 얼굴로 달려와 사조의를 만난다: "폐하, 당군의 공세가 너무 맹렬합니다. 신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같습니다."
사조의는 원래 무능한 자였다. 전승사의 말을 듣자 더욱 당황해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경,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전승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아,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저 위험한 전략을 써야할 것같습니다."
사조의는 구명도초를 만난 것처럼 전승사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빨리 말해보라!"
"폐하께서 직접 유주(幽州)로 가서 병력을 모집하십시오, 신은 남아서 막주를 사수하겠습니다. 병력을 모아 앞뒤로 협공하면 당군이 분명 대패할 것입니다."
사조의는 그 말을 듣고 눈이 반짝 빛났다. 확실히 좋은 아이디어같았다.
전승사는 이어서 말한다: "이 전략은 비교적 위험합니다. 만일 신이 폐하가 올 때까지 버티지 못하게 되면, 폐하께서 제 가족을 잘 보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사조의는 충의스러운 표정의 전승사를 보면서 감격하여 말한다: "경은 안심하시오. 짐을 절대 경의 충성심을 잊지 않을 것이오."
군신 두 사람이 상의를 마친 후, 사조의는 정예기병 5천을 선발하여 북문으로 포위망을 돌파한다.
전승사는 등짐을 지고 성루에 서서, 서조의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이어서 곁에 있던 장령들이 고함을 지른다: "성문을 열고, 당군의 입성을 맞이하라!"
2
사조의가 막주를 벗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3만의 당군이 추격한다.
당군은 왜 이렇게 빨리 쫓아왔을까? 설마 전승사가 패배한 것일까? 사조의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그의 일가족은 아직 막주성내에 있었다. 그는 지금 그저 유주로 가서 구원병을 데려올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당군이 죽어라 쫓아오고 있어, 사조의는 그저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물러나야 했고, 그렇게 범양현성(范陽縣城)에 이른다.
범양현은 반군의 근거지였다. 반군장수 범양절도사(范陽節度使) 이회선(李懷仙)의 관할지역이다. 그는 부하장수 이포충(李抱忠)을 이곳에 보내 지키게 하였다.
성문 아래에 도착한 후, 사조의는 사람을 시켜 성을 향해 소리지르게 한다: "황제폐하가 납시었다. 빨리 성문을 열어 맞이하라!"
얼마 후, 수비장수 이포충이 성루 위에 나타난다.
사조의는 조급하게 소리쳤다. "이장군, 막주가 위험하다. 신속히 병력을 이끌고 지원을 가달라."
이포충은 잠시 침묵하더니, 차마 사조의를 보지 못하고, 이렇게 소리쳤다: "갈 필요없습니다. 전승사는 분명 이미 배신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군이 어떻게 이곳까지 올 수 있겠습니까?"
원래, 사조의가 막주를 떠나자마자, 전승사는 성문을 열고 당군에 투항했다. 그리고 사조의의 모친, 처, 아들을 당군에 예물로 바쳤다.
사조의는 믿지 못하고, 막 이포충에게 반박하려 하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자신이 당군에 이렇게 빨리 추격당한 것은 전승사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포충은 사조의가 말을 하기도 전에 이어서 소리친다: "하늘이 대연(大燕)을 보우하지 않으니, 오늘 저도 당에 귀순했습니다. 원래 폐하를 속여서 성안으로 들여서 붙잡아 당군에 바칠 수도 있지만, 군신간의 정의를 생각하여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빨리 여기를 떠나십시오."
사조의가 범양현에 도착하기 전에, 그의 범양절도사 이회선은 이미 스스로 당군에 투항을 청했고, 병마사 이포중은 장병 3천을 이끌고 범양현을 지키고 있던 것이었다.
사조의가 범양에 도착했지만 성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3.
당군이 곧 닥칠 것이므로 사조의는 "군신충의"로 이포충을 설득하고자 했다. 이는 이때 그가 해볼 수 있는 몇 가지 안되는 것중 하나였다.
가소롭게도 사조의가 일생동안 한 두 가지 역사책에 기록될 큰 일은 두 번 저질렀다: 하나는 부친 사사명을 죽이고 황위를 빼앗은 것이고, 둘은 동생 사조청(史朝淸)을 죽여버린 것이다.
지금 스스로 막다른 골목에 몰리니, 충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 하는 것이다.
군신을 따진다면 사씨부자는 대당에 반란을 일으켰고, 부자를 따진다면 사조의는 부친을 시해했다. 이렇게 군주도 부친도 모르는 사람이 감히 군부지도(君父之道)를 논한 것이다.
이포충은 전쟁터를 오랫동안 누볐고, 자연히 사조의의 말에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가능성이 없는 것을 보자, 사조의는 화가 날대로 나서 성위를 향해 소리친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길을 나서서 아직 식사도 하지 못했는데, 너는 나에게 밥 한끼도 주지 않는단 말이냐?"
죽기 전에 밥이라도 든든히 먹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이포충도 그의 말이 맞다고 여겨, 사람을 시켜 성의 동쪽성벽아래로 술과 음식을 내려보내 사조의를 접대한다.
술과 밥을 먹은 후, 사조의를 따르던 범양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따라가려 하지 않고, 속속 하직인사를 하고 떠났다.
사조의는 성벽이 무너지니 모든 사람이 밀어버리는 장면에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는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식사를 마친 후, 그는 혼자서 호인기병(胡人騎兵) 수백명과 도망친다.
전승사가 이미 자신을 배신했다면, 다시 유주로 돌아가 구원병을 마련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조의는 그저 다른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동쪽으로 광양(廣陽)으로 갔지만, 광양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다시 북으로 해(奚), 거란(契丹)으로 가고자 온천책(溫泉柵)까지 갔지만, 이회선의 병사들이 추격해왔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조의는 결국 밀림의 한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하는 것을 선택한다. 이회선이 도착해서 그의 수급을 벤 후 당군에게 가져간다.
정월 삼십일, 사조의의 수급은 경사 장안으로 보내어진다.
4
사조의가 죽은 후, 8년이나 끌었던 '안사의 난'은 마침내 평정되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나라조정은 이번 겁난의 최대 피해자이다.
이번 반란은 대당성세를 붕괴시켰고, 대당천자의 천가한(天可汗)이라는 위명은 바닥에 떨어진다; 이어서 백년간 대당황실은 환관, 번진에 의해 짓밟혀지게 된다.
서경 장안과 동도 낙양은 더 이상 번화하지 못했다.
반란이전에, 대당의 인구는 5,300만이었는데, 반란이 평정된 후 인구는 1,700만이 남는다. 사망자가 3,600만에 이르렀고, 전체인구의 3/5가 죽은 것이다.
8년동안 매일 평균 9,863명이 칼날아래 목숨을 잃거나, 길거리에서 굶어죽었다.
강대하기 그지없던 대당왕조는 붕괴하기 시작한다.
내부는 번진이 할거하고, 외부는 토번, 회흘, 당항, 거란이 굴기하며, 대당의 강역을 계속하여 잠식해 들어왔다.
당나라조정은 저항할 힘이 없었고, 심지어 여러번 천자가 장안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발생한다.
5
반란을 평정한 대공신들은 반란이 평정되었다고 하여 영화부귀를 누리면서 말년을 보내지 못한다.
"안사의 난"이 발발한 후, 당현종을 대표로 하는 대당황제의 장수들에 대한 신뢰는 바닥에 떨어지게 된다. 그들은 한편으로 장수를 기용하여 반란을 평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환관을 보내 장수를 감시하고 견제했다.
반란이 평정된 후, 이들 장수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다. 다시 제2의 안록산이 나타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대당황제는 이들 공로가 있는 장수들을 배척하거나 탄압한다.
저명한 반란평정4장수중 곽자의(郭子儀)를 제외하고 기본적으로 모두 최후가 좋지 못했다.
"중흥대당제일신"인 이광필(李光弼)은 환관들에게 음해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죽을 때까지 장안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부장들도 모두 조정이 더 이상 이광필을 신임하지 않는다고 보고 이 노장군에게 불경했고, 이광필은 결국 수치와 분노 속에 죽는다.
병력을 이끌고 사조의를 섬멸했던 복고회은(僕固懷恩)은 회흘과 관계를 좋게 유지하기 위해 딸 둘을 멀리 시집보내고, 일가 46명은 국난에 목숨을 잃는다. 만문충렬(滿門忠烈)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반란이 평정된 후, 환관 낙봉선(駱奉先)의 모함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거병하여 반항한다. 나중에 곽자의에게 패배하여 명사성(鳴沙城)에서 병사한다.
명장 내전(來瑱)도 환관의 모함을 받아 결국 유배가는 길에 사사당한다. 내전의 죽음은 복고회은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곽자의는 비록 선종했지만, 살면서 그저 고분고분하고 전전긍긍해야 했다. 조상묘가 환관에 의해 파헤쳐져도 감히 말한마디 못했다.
"안사의 난"의 원흉인 안록산부자와 사사명부자도 별로 이득을 얻지 못한다.
안록산은 아들 안경서에게 죽임을 당했고, 사사명도 아들 사조의에게 피살당한다. 안경서는 사사명에게 죽임을 당했고, 사조의는 마지막에 목을 매어 자결한다.
대당조정이건, 반란을 평정한 장수이건, 아니면 안록산, 사사명 부자이건 모두 안사의 난의 패배자였다. 차이가 있다면 패배의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최대의 승리자는 누구일까? 바로 안록산부자, 사사명부자를 따라 반란을 일으켰던 장수들이다.
6
사조의가 자살한 후, 대당조정은 잔여반군세력을 제거할 힘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체면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다른 방법이 마땅치않아, 당나라조정은 반군장수들과 합의를 달성한다. 대당에 귀순한다고 선언만 하면 책임추궁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반란이 끝난 후, 황제는 투항한 장수 설숭(薛嵩)을 상주(相州), 위주(衛州), 형주(邢州), 명주(洺州), 패주(貝州), 자주(磁州)의 육주절도사(六州節度使)에 임명하고, 전승사를 위주(魏州), 박주(博州), 덕주(德州), 창주(滄州), 영주(瀛州)의 오주도방어사(五州都防御使)에 임명하고, 이회선을 유주(幽州), 노룡(盧龍)절도사에 임명한다.
반란장수들은 명목상으로 조정에 귀순했고, 조정의 영도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이후, 당나라는 번진할거국면으로 나아가고, 전승사는 위박(魏博)을 점거하고 장충지(張忠志)는 승덕(承德)을 점거하고, 이회선은 유주를 점거하여 저명한 하북삼진(河北三鎭)을 형성한다.
삼진의 군사, 정치와 경제는 모두 절도사가 장악했고, 조정은 간섭할 권한이 없었다. 그리고 절도사는 세습되어 완전히 토황제(土皇帝)나 다를 바 없었다.
이를 보면, 안사의 난의 최대 승자는 바로 안사의 반란에 가담한 장수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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