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대부(趙大夫)
통계에 따르면, 지원군전쟁포로중 6,673명이 대륙으로 돌아가고, 14,334명이 타이완으로 갔으며, 그외에 12명은 인도로 갔다.
이들 전쟁포로들이 대륙으로 돌아온 후 여러가지 불공정대우를 받다가 나중에 명예회복된 것과 관련한 자료는 비교적 많으니 여기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타이완으로 간 이들 14,000여명은 어떻게 지냈을까?
1. 대만으로 가는 과정
1954년 1월 20일, 새벽 9시, 14,00여명의 전쟁포로는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를 휘날리며, "대만으로 돌아간다"는 구호를 외치며, 한국의 판문점부근의 유엔군전쟁포로수용소를 떠난다. 손중산, 장개석의 대형사진을 든 대만대표단이 이들을 맞이하러 왔고, 전쟁포로들을 열렬히 환영했다.적지 않은 전쟁포로들은 속속 손중산과 장개석의 사진에 경례했다. 미국 육군 제8군의 호송하에, 530대의 트럭은 전쟁포로들을 인천까지 수송한다. 여기에서 그들은 15척의 미군운송선을 타고 타이완으로 간다. 미국 제7함대와 미공군 제5군은 이들을 호송한다.
바다에서 88시간을 항해한 후, 그들이 도착한 목적지는 타이완의 지룽항(基隆港)이다. 나머지 142명의 중상을 입은 환자들은 먼저 군용기로 직접 타이페이로 이동해 치료를 받고 있었다.
2. 타이완에 도착한 이후
타이완방면에서는 극히 높은 규격으로 지원군포로들이 타이완에 도착하는 것을 맞이했다. 장개석은 장경국(蔣經國), 장기윤(張其昀), 곡정강(谷正綱)등을 부두로 보내어 이들을 환영했다. 해안에 서 있던 장경국은 심지어 눈물을 흘렸다. 환영장면은 엄청났고, 매체는 열렬히 보도한 것도 더 말할 필요는 없다. 상륙후, 다시 225대의 군용트럭에 나누어타고 5개 지대로 나누어 오토바이의 인도하에 구호차량, 통신차량이 뒤를 따랐다; 그외에 국민당이 안배한 방송차량이 연도에서 노래를 틀고 전단을 뿌렸다. 차량행렬이 타이페이에 도착한 후, 주요도로를 따라 행진했고, 연도의 사람들은 연이어 폭죽을 터트렸다. 경축분위기가 물씬 났다.
1월 23일, 흥분한 장개석은 부상병전쟁포로들이 군용기를 타고 평안하게 타이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타이페이로 패퇴한 후, 불면증에 시달리던 67세의 노인은 9시간동안 숙면을 취했다. 다음 날,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실로 금년들어 가장 편안하게 잔 하루였다." 일기에서, 장개석은 이 일을 "5년만에 정신적으로 대러투쟁의 중대승리이다."라고 적었다.
타이완에서는 성대한 환영집회를 거행했다. 행정원장 진성(陳誠)은 집회에서 치사를 한다. 얼마 후, 장개석은 '총통부 참모장" 계영청(桂永淸)을 파견하여 그를 대표하여 각 "의사신촌(義士新村)" 및 각 병원에서 전쟁포로들을 위문했다. 2월 4일, 그는 다시 직접 모습을 드러내어 전쟁포로대표 30여명을 접견하고, 그들을 '위문하고 격려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이번에 자유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마치 도적에게 일질로 잡힌지 오래된 자제가 기나긴 항쟁과 투쟁을 거쳐 마침내 불려난 것과 같고, 부모형제가 함께 모여서 기쁨을 나누는 것보다 더욱 의의가 크고, 가치가 있다. 이는 더할 나위없는 즐거움이고 승리이다." 그는 전체 전쟁포로들에게 "삼민주의를 위하여 분투하자"고 말한다. 1955년 1월 23일, 타이완당국은 전쟁포로들이 타이완으로 온 1주년을 기념하여, 이 날을 "자유의 날"로 정한다.
3. 타이완의 약속과 안치상황
그러나 경축행사가 끝난 후, "전쟁포로들이 타이완으로 간 후에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수 있으며, 타이완에 남고 싶지 않은 사람은 중립국으로 갈 수 있다"는 등의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행정원장 진성은 대호(大湖), 양매(楊梅)등 지원군전쟁포로주둔지를 시찰하면서 일찌기 이런 식으로 약하게 말한 바 있다: "국가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는 뗄레야 뗄 수가 없다. 개인의 자유를 쟁취하려면, 반드시 국가의 자유를 먼저 쟁취해야 한다."
환영활동이 끝난 후, 전쟁포로들은 즉각 '자유평민'이 될 권리를 상실하고 자유를 잃는다. 그리고 강제로 국민당 방면에서 수여하는 '의사(義士)'의 '영예'를 받고, 집단으로 타이페이시 근교의 쿠링령(苦苓嶺)에서 세뇌를 받는다. 타이완국군의 '총정치부'는 여기에 '심전총대(心戰總隊)'라는 부서를 설치한다. 그리고 집중과정을 통해 '의사'들이 수업을 듣도록 강제하고, 당국사상교육을 주입시킨다. 타이완당국은 다시 소위 '청영종군운동(請纓從軍運動)'을 일으켜, 전쟁포로들이 서명하도록 강요한다. 2달간의 '사상교육'이후, 타이완당국은 1654년 4월 5일 공개적으로 선포한다: 전체 지원군전쟁포로들은 '국군부대에 가입하기로 선서했다.' 편입전에 장경국의 영도하에 '의사취업보도처(義士就業輔導處)'는 전체 전쟁포로의 상황에 대하여 상세히 조사를 한다. 비교적 핵심적인 몇 가지 수치는 다음과 같다: 전쟁포로총수 14,334명, 그중 21-35세의 연령대인 사람이 12,229명, 학력정도가 대학인 사람은 오직 4명; 무학력자가 6,986명; 장교, 사병비율은 1:10. 이들 조사자료는 직접적으로 타이완방면의 전쟁포로 분배 배치에 영향을 주게 된다.
"취업보도처"에서 제정한 지원군전쟁포로의 '지원가입국군'의 문턱은 16세이상 40세이하로 체격검사에 합격하고, 정치고찰에 합격해야 한다. 그 결과 개략 12,300명이 국군에 편입된다. 이는 전쟁포로총수의 86%에 해당한다. 나머지 2,000여명중 겨우 1,000여명이 나이가 맞지 않아 불합격되어 도태되고, 평민신분으로 별도로 배치된다. 그외에 나머지 1,000여명은 도대체 어떤 원인으로 국군에 편입되지 못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의 구체적인 거취에 대하여도 통계자료가 나와 있지 않다.
이들을 소화하기 위하여, 모든 군사단위에는 단지 1명의 전쟁포로를 배치한다. 그들은 먼저 신병교육대에 편입되어 기본군사, 정치훈련을 받는다. 그후에 '각개격파'식으로 각 구체적인 단위에 분산배치된다. 원칙은 매 단위에는 오직 1명의 전쟁포로를 배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전쟁포로들이 고립된 후, 신속히 국군에 '융합'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일부 군사단위에 배치되어 마음 속으로 계속하여 불만을 품고 있는 전쟁포로들은 많은 경우 특별히 설치한 "반공의사감훈단(反共義士感訓團)"으로 보내어저 제2차 세뇌를 받는다. 정치사상에 합격한 후 다시 군대로 돌아왔다; 그래도 불합격하면 "화소도(火燒島)"로 보내 수감하였을 것이다.
전쟁포로들이 군대에 들어간 후의 구체적인 대우는 그들 자신의 학력수준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진성은 타이완에서 '행정원장'으로 있는 기간동안 전문기술자를 아주 중시했다. 이런 류의 공직인원의 급여는 일반 공직인원들보다 훨씬 높았다. 군대계통도 예외는 아니었따. 전쟁포로들은 신병교육대에 들어간 후, 자주 각종 기술류의 특훈반 및 각 병종의 전문학교에 가도록 독려된다. 어느 정도 학력수준을 가진 전쟁포로들은 그로 인하여 혜택을 많이 받았다. 문맹이나 반문맹인 전쟁포로들은 대부분 열병, 화부, 마부, 근무병으로 배치된다. 비록 연차에 따라 급여가 오르는 우대는 받지만, 학력있는 전쟁포로와 비교하면 차이가 아주 컸다. 특히 전역후 많은 사람들은 그저 하층의 3D업종에 종사해야 했고, 생활도 대부분 빈곤했다. 당연히 가장 실질적인 것은 역시 1954년 10월 5일 통과된 국군사병을 위한 <수전조례(授田條例)>이다. 이 조례에 따르면, 모든 전역한 전쟁포로들은 연간쌀생산량 2천근인 논을 수여받게 된다. 단지 타이완은 논이 원래 적어서, 이들 '의사'들에게 논을 나눠주어야할 때가 되었을 때는 이미 남아 있는 논이 없었다. 마지막에 당국은 땅값과 같은 금액의 현금을 보상금으로 주었다.
4. 전쟁포로들의 국제활동
1954년 2월부터 11월까지, 타이완당국은 각종 '의사방문단'을 조직하여 섬내외의 도처에서 활동했다. 타이완당국은 이들 전쟁포로들이 가져다주는 선전효과를 아주 중시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 전쟁포로들을 국군에 들어가도록 강제하고, 다른 한편으로, 타이완당국은 각양각색의 '의사방문단'을 조직하여 곳곳을 방문한다. 1954년 2월부터 3월까지, '의사방문단'은 주로 대만현지의 각 현, 시 및 각급부대를 돌아다닌다; 4월부터, '의사방문단'은 차례로 해외에 파견된다. 방문단에 참가한 전쟁포로들은 주로 원래 전쟁포로수용소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친국민당핵심들이다. 이들 핵심분자중 일부는 원래 국민당의 간부이거나 사병이었고, 어떤 사람은 타이완에서 전쟁포로수용소에 진입시킨 특무였다. 그리고 각 방문간에는 모두 타이완당국의 정보인원을 '고문'으로 배치하여 감독했다. 필리핀, 태국, 일본, 베트남, 미국, 쿠바,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등 국가에 여러번 '의사방문단'의 족적을 남긴다.
5. 전쟁포로들의 말년
전쟁포로들의 선전가치가 날이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들과 보통국군간의 차이도 갈수록 줄어들었다. 전쟁포로들은 군대를 퇴역한 후의 처지를 보면 보통국군퇴역군인 즉 소위 '영민(榮民)'들의 말년의 처지와 대체로 같았다. 한편으로 그들은 외성인으로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습속도 달랐다. 원래 타이완본토사회에 융합되기가 어려웠다. 다른 한편으로, 50년대에는 '반공대륙(反攻大陸)'의 필요에 따라, 타이완당국은 그들에게 가혹한 특수제한을 두었다. 예를 들어, 복무기간연장, 결혼조건제한등등. 그리하여 '영민'들은 결혼, 취업, 의료보험, 양로가 모두 문제되었다. 심지어 사회사건으로 비화하기까지 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이완당국은 1954년 11월 장경국이 주재하는 "퇴역관병보도위원회"를 설립한다. 장격국이 '퇴보회'를 주재한지 반년도 지나지 않아, '영민'들은 전후로 병동애료농장(屛東隘寮農場), 가의대포농장(嘉義大埔農場), 의란삼성농장(宜蘭三星農場), 화련수풍농장(花蓮壽豊農場), 창화이수농장(彰化二水農場)등이 만들어진다. '영민'들이 농업에 종사하면서 자급자족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나중에 병동, 화련, 대남, 신죽등지에 "영민지가(榮民之家)"를 만들어 나이많은 '영민'들의 양로문제를 해결해준다. 1956년 6월 6일 타이페이 "영민총의원"도 장경국의 주도하에 건설에 착공되고, 3년후에 완공된다. 이 병원은 많은 '영민'들이 진료를 받는 곳이고, 설비도 선진적이고 전문가진용도 강대하여, 많은 국민당고위층도 진료를 받을 때 가장 선호하는 병원이 된다.
혼인은 전쟁포로들에게 가장 큰 아픔이었다. 아마도 타이완으로 온 전쟁포로들의 특수성을 고려하여서인지 처음에 타이완의 도원현(桃園縣)에는 "의사지가(義士之家)"를 건립하여, 전문적으로 퇴역후 혼자서 살아갈 수 없거나 아무데도 의탁할 수 없는 '의사'들을 수용한다. 나중에 '의사지가'는 '영민지가'로 이름을 바꾼다. 전쟁포로들과 일반국군간의 차이는 사라진다. 보통 '영민'과 마찬가지로, 전쟁포로들의 최대의 고통은 양로와 의료보험이었다. 이들 문제는 타이완당국의 정책으로 점점 해결되었고, 타이완당귝이 해결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혼인문제였다. 도원의 '의사지가'에서 수용한 단신 '의사'는 한때 3천여명에 이르게 된다.
1988년, 타이완당국은 지원군전쟁포로들에게 대륙으로 친척을 방문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리고 무상으로 그들의 몸에 새겨진 정치적구호가 있는 문신을 제거해준다.
1989년 1월 3일, 대륙은 <아군포로로 타이완에 간 인원이 대륙에 돌아와 정착을 요구하는 것에 관한 처리의견>을 내놓는다. 이에 따라, 전쟁포로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친척을 만날 수 있을 뿐아니라, 대륙에서 정착하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게 된다. 이 처리의견에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아군중 전투과정에 포로로 잡혀 타이완으로 간 인원은 일반적인 타이완동포나 타이완의 국민당노병과는 다르다. 그들이 대륙에 돌아와 정착할 것을 요구하면, 대륙의 생활여건등에 대한 설명을 하고, 그 설명을 듣고도 정착을 요구하면, 원칙적으로 허락한다. 그리고 적절히 배치한다.....허가를 받아 정착한 타이완으로 간 전쟁포로인원의 정치역사는 심사하지 않고, 책임추궁하지 않는다. 그들이 포로가 되기 전에 참가한 아군의 일반역사는 인정한다. 그러나 복귀, 전업과 은퇴절차는 취하지 않는다....."
이들 선배들은 정말 힘들게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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