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식도학잡료
1966년, 인민대회당이 완공된지 7년만에, 총탄 한발이 중요한 국가활동을 진행하고 있던 인민대회당 2층의 유리를 깼다. 이는 인민대회당 완공이래 가장 기이하면서도 유일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던 것일까?
1966년 2월 2일 오전 10시, 인민대회당 2층의 접견실에서 중요한 국사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10시 10분, 이상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인민대회당 북쪽의 유리 한 장이 깨트려졌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북경시 공안국의 민경은 총탄이 2층의 유리에 맞아 2겹짜리 유리에 박혔으며, 총탄은 두 겹의 유리 사이에 끼워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인민대회당 완공이래 발생한 첫번째 총격사건이다. 그날, 공안부는 인민대회당에 정예인원으로 특별소조를 구성해서 현장에 배치한다.
특별소조의 전문가에 따르면, 현장에서 찾아낸 총탄은 5.6미리 소구경 소총용이다. 19세기에 많은 소총의 구경으로 사용되었다. 구경이 비교적 적은 편이지만, 유효살상거리는 천미터가 넘는다. 즉, 만일 사람이 1킬로미터 이내에서 이 총알에 맞는다면 죽거나 중상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인민대회당주위의 경계는 삼엄하고 일반적으로 대외에 개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총알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현장의 유일한 단서는 바로 유리에 잔류한 그 총탄이었다. 전문가들이 검사를 해보니 탄공은 1센티미터도 되지 않았고, 원형이었다. 어떤 전문가는 이 총탄의 실제사격거리가 아마도 50미터 내지 60미터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렇다면 발사자의 사격위치는 인민대회당에서 아주 가깝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발사자는 도대체 어디에서 총알을 발사했단 말인가?
총탄을 사격하려면 3개의 점을 하나로 연결하는 조준동작이 필요하다. 즉, 총기의 조준점, 조준경과 사격자의 눈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 조준선이 바로 총탄의 궤적이 된다. 전문가들은 통알이 인민대회당에 남은 총탄의 구멍을 통해서 궤적을 추적해보니 그 연장선은 장안가의 추월차선으로 연결되었다. 그렇다면, 발사자의 사격위치는 장안가의 추월차선이라는 것이다. 다만, 당시에 경계임무에 종사하고 있던 보안요원들에 따르면 총격이 발생했을 때, 장안가에는 아무런 이상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건조사요원들은 다시 추측했다. 사격자는 아마도 차량 속에 숨어있으면서, 인민대회당을 지나갈 때, 차 속에서 인민대회당을 향해 총을 쏘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특별소조는 먼저 혐의를 지나간 차량에 두고 조사하기 시작했다.
총은 10시경에 발사되었다. 오전 9시반부터 10시반까지 1시간 사이에 천안문을 지나간 모든 차량을 하나하나 조사했다. 3일후, 사건조사민경은 모두 1천여대의 차량이 인민대회당을 지나갔다는 것을 찾아낸다. 총격이 발생했을 때 인민대회당을 지나간 차량을 하나하나 조사하다가 민경들은 이들 차량과 운전자들에게서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 총격사건의 조사는 곤경에 빠진다.
특별소조의 민경은 반복하여 총격현장의 모든 세부사항을 검토하였지만, 여전히 가치있는 단서는 발견해내지 못했다. 발사자의 사격위치는 시종 확정할 수 없었다. 더더구나 사격자 본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때 특별소조의 요원중 한명인 진건화(陈建华)는 반복하여 유리의 흔적을 조사한 후에 하나의 대담한 가설을 내놓았다. 그는 인민대회당에서 파괴된 유리의 파손흔적이 고르지 않은 점을 가지고 이전에 총탄으로 유리파괴실험을 해본 것을 결합하여 아마도 더욱 먼 거리에서 사격이 이루어졌을 것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총탄으로 남겨진 흔적은 바로 총탄이 물체에 형성한 탄공의 크기, 깊이 그리고 파괴정도등이다. 이들 흔적은 총탄이 날아온 궤도흔적이 직선인지 포물선인지 추정하게 한다. 그리고 직선 혹은 포물선은 바로 사격자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게 해준다.
진건화는 총탄이 제1층의 유리를 뚫은 후, 역량이 약화된 총탄은 탄도가 바뀌어 직선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 만일 두 개의 유리탄공의 연장선으로 사격수의 위치를 판단한다면 사격위치가 잘못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총탄은 아마도 더욱 먼 북쪽의 주민지역에서 날아온 것일 수 있다.
전문가들은 다시 한번 현장을 조사한 후, 총탄이 유리를 깬 정도와 힘의 강도를 보고 진건화의 견해가 일리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인민대회당의 유리를 깬 총알은 아마도 장안가에서 근거리사격을 통해 날아온 것이 아니라 아마도 더욱 먼 곳에서 날아온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전문가는 5.6미리구경의 총탄이 그렇게 먼거리에서 사격했다면 유리를 깨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데 의문을 표시했다. 그리하여 사건담당요원들은 동일한 구경의 소총으로 북경 서산의 사격장에서 실험을 진행하여 이 가설을 검증하기로 결정한다. 사건담당민경은 인민대회당의 창문의 모양과 동일한 트럭크기의 유리표적을 만들어, 사격거리를 100미터에서 500미터까지로 하여 서로 다른 사격거리에서 유리를 관통하는 효과가 어떻게 나오는지 살펴보았다.
사격실험을 하룻동안 진행되었는데, 사격요원들이 100미터에서 500미터까지의 거리에서 유리표적을 향해서 100여발의 총알을 쏘았고, 10여발이 유리에 명중했다. 최종적으로 표적을 검사한 민경은 그중 400미터가량의 거리에서 발사한 총탄이 형성한 유리탄공이 인민대회당 창문의 탄공과 아주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특별소조는 실험결과를 가지고, 총탄이 원거리에서 발사되었다고 판단한다. 즉, 장안가북쪽 400미터이상의 거리에서 쏜 것이다. 이 결과에 근거하여 특별소조는 조사범위를 정한다. 인민대회당 서북방향 400미터가량의 부채꼴모양의 범위를 하나하나 조사한다. 그중 남장가 서쪽의 범위가 가장 핵심이었다.
비밀리에 조사가 시작된다. 남장가 44호주택을 조사할 때, 한가지 상황이 나타났다. "당시 조사요원은 한 사람이 총을 가지고 있고, 그 총을 쏘았다는 것을 찾아낸다. 그리하여 그들은 총을 압수한다." 진건화는 이렇게 회고한다. 압수한 총은 체코에서 제조한 소총으로 1898년에 생산되었으며, 무게는 2.8킬로그램, 모두 6개의 강선이 있으며, 사용되는 총알은 5.6미리여서 인민대회당 현장에 남겨진 총탄과 같은 구경이었다. 이 총탄의 강선흔적을 실험한 후 전문가들은 인민대회당 유리의 그 총탄은 바로 이 소총에서 발사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총탄흔적과 강선의 흔적이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었다.
총은 찾아냈다. 그리고 특별소조는 총을 소지한 위치인 남장가 44호에서 인민대회당과의 거리가 개략 427미터라는 것도 알아낸다. 이 거리는 사전에 진행한 사격실험에서 얻어낸 수치와 아주 근접했다. 그러나 총을 소지한 인물은 왜 총리가 외빈을 접견할 때 총을 쏜 것일까? 원래 그건 단순한 사고였다.
사건발생당일, 한 아이가 마당에서 새가 계속 울어대자, 집안에 가지고 있던 5.6미리구경 체코소총을 가지고 나와 사격한 것이다. 그런데 새는 맞지 않고, 그 총알이 인민대회당까지 날아가서 두 겹의 유리에 적중한 것이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인민대회당총격사건은 원래 그저 단순한 사고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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