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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왜 이전에는 장진호(長津湖)전투를 꺼내지 않았을까?

by 중은우시 2023. 5. 18.

작자: 운(雲)

 

한국대통령 윤석열이 4월 27일 미국의회에서 연설하면서, 미국해병대가 1950년 장진호전투에서의 공헌을 찬양했다. 윤석열의 연설은 장진호전투를 다시 한번 조명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도 장진호전투에 관해서 몇가지를 얘기를 해보기로 한다.

 

첫째, 왜 이전에는 장진호전투를 꺼내지 않았을까?

 

10년전 대륙에서는 기본적으로 장진호전투를 꺼내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은 장진호전투를 몰랐다. 이건 무엇때문이었을까? 먼저 유백승(劉伯承) 원수가 장진호전투에 대하여 평가한 말을 들어보자: "하나의 병단(兵團, 3개軍)이 한개 사단을 포위해서, 거대한 댓가를 치른 후에도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적을 궤멸시키지도 못했다. 적은 편제를 갖추어 전투에서 철수했고, 모든 장비와 부상병까지 데려갔다." 유백승 원수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미군은 유비처럼 인자하여, 10만의 백성도 데려갔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한국의 전대통령 문재인의 부모도 포함되어 있다.

 

제9군단 사령관 송시륜(宋時輪)은 1950년 12월 11일 동부전선작전(장진호전투를 포함함)이 잘되지 않았다고 인정한 바 있다. 미군1사단과 7사단을 섬멸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투력이 심각하게 감소했고, 이로 인해 중앙군사위에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26군의 군장 장인초(張仁初)도 마찬가지로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그래서 이전에는 장진호전투를 전혀 선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시대에는 달랐다. "패배를 승리라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反敗爲勝)"

 

둘째, 누가 장진호전투를 지휘했는가?

 

공개된 자료를 보면, 장진호전투기간 제9병단은 모택동이 직접 지휘했다고 추단할 수 있다. 현재 공개된 문헌자료를 보면,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 겸 정위인 팽덕회(彭德懷)는 장진호전투에 관하여 주고받은 전문(電文)이 비교적 적다. <팽덕회자술>에서 제2차전투에 관한 내용중에도 동부전선전투에 관련된 부분은 빠져있다. 그리고 모택동은 장진호전투에 관하여 주고받은 전문이 비교적 많다. 그중 대부분은 제9병단의 작전임무에 관한 것이다. 이를 근거로 연구자가 쓴 논문 <모택동은 어떻게 제9병단 장진호작전을 지휘했는가>에서 이렇게 결론내렸다: "공개관 자료에 근거하면, 장진호전투기간동안 제9병단은 모택동이 직접 지휘했다고 추단할 수 있다." 아래의 전문을 보면 모택동이 어떻게 지휘했는지 알 수가 있다.

 

12월 3일 모택동이 팽덕회, 등화(鄧華), 송시륜, 도용(陶勇)에게 전보를 보내면서, 참조로 고강(高崗), 하진년(賀晋年)에게 이렇게 지시한다: "(장진호) 유담리(柳潭里) 지구의 적에 대하여, 그 일부를 섬멸하는 외에, 잠시 대부분은 보류하라. 포위하되 섬멸하지 말라. 그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지원군을 요청하게 하라. 그래야 지원군이 반드시 오도록 유인할 수 있고, 우리가 칠 수 있다." 이는 모택동이 전지지휘관들과는 크게 다르게 낭만적인 색채를 지니고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당시 미군이 유담리를 지원하지 않았고, 유담리에 고립된 미군 제5, 제7해병대는 이미 12월 1일 8시부터 하갈우리(下碣隅里)방향으로 돌파하기 위하여 행군하고 있었고, 그날 모두 유담리를 떠났다. 미군이 철수할 때 모든 155밀리미터 포탄을 쏘고, 휴대할 수 없는 물자는 모조리 불태웠다. 이런 현상은 이미 미군이 유담리를 포기하지, 끝까지 고수하면서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택동은 전쟁터의 상황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누가 9병단에게 방한복도 없이 한반도로 들어가 전투하게 하였는가?

 

모택동이 4번이나 지시를 내리면서 재촉하는 바람에 지원군 제9병단은 군복을 갈아입을 틈도없이 한반도로 들어가게 된다. 모택동이 그들에게 부여한 전략임무는 2개의 한국군사단과 1개의 미군사단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군대열차가 심양(瀋陽) 기차역에 도착한 후, 명을 받아 장비를 검사하러 온 동북군구 부사령관 하진년은 관병들이 화동지구에서 입고 있던 얇은 솜옷을 입고,  머리에는 귀를 가리지 않는 모자를 쓰고, 고무신발을 신고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리하여 기차를 2시간 정차하도록 하고 긴급히 방한복을 조달했다. 그러나 9병단은 엄명을 받아 쉴 수가 없었고, 화급하게 전선으로 배치되어야 했다. 북한의 혹한을 잘 알고 있는 하진년은 장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너희가 이렇게 한반도로 들어가면 싸우는 건 고사하고 얼어죽을 것이다!"

 

하진년은 즉시 명을 내려 창고에 있던 5만벌의 방한복, 솜신발을 모조리 꺼내서 9병단에 주었다. 도중의 동북변방부대 간부들도 속속 자신의 방한복과 방한모를 벗어서 9병단 전사들에게 건네주었다. 아쉽게도 하진년이 조달한 방한복, 방한신발이 기차에 실리기도 전에, 9병단은 출발해버렸다!

 

동북군구 부사령관 하진년이 2시간만 정차해서 방한복으로 갈아입게 하자는 것도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하진년은 "너희가 이렇게 한반도로 들어가면 싸우는 건 고사하고 얼어죽을 것이다!"라는 말까지 내뱉게 된 것이다. 결국 정차하지 말라는 명령은 모택동에게서 내려왔을 것이다. 결국 전체 장진호전투기간 9병단은 3만여명의 동상을 입고, 4천여명이 동사하게 된다.

 

넷째, 협객도(俠客島)는 67년전에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북한이 침략자라는 것을 인정했다.

 

2017년 5월 4일 인민일보 해외판의 위챗계정인 협객도에 글이 올라온다 <조중사(朝中社, 북한의 중앙통신사를 가리킴), 네가 중국을 비판하는 말은 무리하다>라는 글에서, "만일 김일성이 반도통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반도에 어찌 전쟁이 일어났겠는가? 중국은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말려들어갔고, 수십만명의 생명을 댓가로 치렀으며, 미중간에 20년이라는 장기간의 대치를 가져왔다. 심지어 양안문제도 지금까지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북한이 당시 '마음대로' 저지른 망동의 대부분 댓가를 부담하고 있다."

 

이 '경천동지'할 글은 67년전에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북한이 침략자라는 것을 인저하는 것이고, 중국은 그저 말려들어간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 '빙조련(氷雕連, 장진호전투때 중국인민지원군 20군 59사 177단 6연대, 20군 60사단 180단 2연대, 27군 80사 242단 5연대는 2명의 생존자(1명은 탈영병, 1명은 통신원)를 제외하고 모조리 동사한 것을 가리킴, 빙조는 '얼음조각상'임)'을 가지고 '애국', '애당'교육에 활용하는데, 왜 아무도 묻지 않는가. 이들 지원군을 죽인 도살자가 누구인지. 미국인인가? 그들은 대부분 죽기 전에 미국인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인이 어떻게 그들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병사들의 목숨은 그저 모택동의 눈에 승리의 댓가일 뿐이고, 그들이 가장 즐겨하는 말은 '일체의 댓가를 치르고서라도'라는 것이다. 모택동은 아무 것도 신경쓰지 않고 9병단에 빠른 속도로 한반도에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그 부대는 장진호의 지옥같은 환경속에서 얼어죽고 굶어죽은 자가 수도 없이 나오게 된 것이다. 

 

왜 이전에는 장진호전투를 꺼내지 않았을까? 1번의 전투에서 동사하고 동상입은 사람이 수만명에 이르는 낯부끄러운 일을 조금만 염치있는 사람이라면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시대'는 다르다. 그걸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영광으로 여긴다. 인성(人性)이 없어야만, 염치가 무엇인지 몰라야만 비로소 '빙조련'을 찬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