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소련군은 중국동북에서 얼마나 많은 재산을 약탈했는가?

중은우시 2022. 9. 21. 12:06

글: 아승설역사(阿勝說歷史)

통계에 따르면, 일본군의 주력인 관동군은 24개사단외에 11개 여단 약 70만명의 군대였다. 그리고 만주국군대가 약 20만명이 있었다. 그외에 한국, 사할린섬남부, 쿠릴열도에 주둔하는 제17방면군, 제5방면군이 있었다. 극동지방의 일본군의 병력은 백만에 달했다.

 

제2차세계대전 후기, 장기간의 협상후, 1945년 8월 8일, 소련이 마침내 출병하여, 동북으로 진입한다. 이는 일본군에 대한 최후의 일격이었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어느 정도 진보적인 의미가 있다. 다만 사실상, 소련군이 동북에서 대거 재물을 약탈한 행위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중국의 동북지구는 일본이 여러해동안 경영하면서, 이미 일본의 해외에서 가장 중요한 공업기지가 된다. 일본이 투항한 후, 일본의 동북에서의 공업은 동맹국이 주목하는 목표가 되고, 특히  소련은 근수루대선득월(近水樓臺先得月)로 절박한 심정이 더욱 명백했다.

 

중국의 각도에서 보면, 9.18사변이후 중국은 일본과 전쟁을 벌였고, 14년이나 지속되었다.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일본의 중국내 기업은 전쟁배상으로 중국이 가져야 하는 것이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당연한 일이었다.

 

1945년, 중국과 소련간에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할 때, 장개석(蔣介石)은 송자문(宋子問)에게 당부한다. 반드시 동북의 원래 공업, 기계는 반드시 중국소유로 돌려주어야 한다고, 이는 일본침략의 보상이고 전쟁배상의 일부분이라고.

 

항일전쟁이 끝난 후, 1945년 9월 18일, 장개석을 우두머리로 하는 중국정부는 다시 한번 소련과 미국에 건의한다: 일본의 중국영토내의 모든 산업, 재산권, 유가증권 및 기타 각종 재산 예를 들어 부동산, 발전소, 선박, 기계, 철로, 차량은 모두 중국소유로 귀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동맹국이 주둔하는 곳에서 동맹군은반드시 일본이 각종 자산을 파괴, 훼손, 은닉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장개석의 이러한 요구는 국제적으로 일치하여 인정받았다.

 

스탈린도 겉으로는 중국의 처지에 동정을 표시하였지만, 뒤로는 음모궤계를 펼친다. 암중으로 동북의 일본공업을 약탈할 계획을 세운다. 얄타회담이 개최되기 전에, 스탈린은 이렇게 말한다: 사할린섬남부, 쿠릴열도는 반드시 소련에 귀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러일전쟁후, 중국의 동북에서 상실한 모든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만일 이익이 없다면, 소련민중들에게 할 말이 없게 되니 어떻게 출병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소련군이 동북에 출병한 진정한 목적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기실 아주 간단한 문제이다. 전면적으로 점유하는 것이다. 일본군의 동북에서의 모든 자산을 가지는 것이다. 그 중점은 일본의 동북에서의 가장 좋은 기계로 모조리 철거해체한 후, 소련으로 운송하여, 자신의 수요를 충족시킨다. 그리고 가치가 크지 않은 부분은 중국과 소련이 협상하여 각자 일부씩 가지고, 경제협력을 진행하며 이를 통해 미국세력이 동북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는다.

 

모두 알아야 할 것은 일본의 당시 만주에서의 공업은 3개이 중요부분이 있었다. 첫째는 중공업이고, 둘째는 전력이며, 셋째는 철로이다. 소련군은 동북에 진입한 후, 1단계로 이 몇개 독점사업의 책임자를 모조리 잡아들이고, 창춘에 구금한다. 그들로부터 각종 자료를 얻어내고, 이를 소련군이 약탈하는 근거로 삼는다.

 

자료수집을 마친 후, 1945년 10월 24일, 소련군은 다카사키 겐노스케(高崎建之助)를 압박하여 만주의 각종 공업을 모조리 소련에 이양하게 한다. 비록 다카사키는 만주는 이미 해산했고, 그는 이미 아무런 권한이 없으며, 이런 문건에 서명할 권한도 없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소련은 이들 재산을 가져가고 싶다면, 반드시 서면명령을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야 향후 중국이 이의를 제기하면 대답할 수 있다. 다만, 소련군은 아주 강경했고, 서면명령은 내려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중국문제는 소련이 알아서 해결할테니 당신은 신경쓸 필요없다고 강조한다.

 

압박을 못이긴 다카사키 켄노스케는 10월 29일, 문건에 서명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주의 모든 기업, 회사는 일찌기 관동군의 필요에 따라 일했으니, 모든 재산권을 소련에 이전한다.

 

이 문건은 겉으로 보기에는 간단하지만, 소련이 가진 것은 72개의 공업, 150개의 보조공업을 모조리 군사기업으로 하여 소련에 넘겨준 것이다. 그 뒤에 이어진 소련군의 주요업무는 바로 기계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기실, 소련군이 동북에 진입하면서 그다지 큰 전투는 없었다. 1945년 9월하순, 동북의 여러 공장은 소련군에 병력을 파견하여 지켰고,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했다. 일본군의 일부 전쟁포로들은 기계를 해체하는 일을 처리하게 된다.

 

이들은 공장내의 기계, 중형설비를 해체한 후 상자에 담아 철로로 운송했다. 다롄을 출발하여 만주리, 수분하 두 철로로 끊임없이 소련으로 운송했다.

 

예를 들어, 안산철강공장은 소련이 8명의 엔지니어, 8천여명의 일본전쟁포로를 동원하여 40여일동은 일을 해서, 모조리 철거완료한 후 소련으로 운송한다. 봉천비행기제조공장, 하르빈분공장, 공주령분공장의 모든 기계부품도 모조리 해체되어 운송된다. 중국에 있어서, 소련은 부저추신(釜底抽薪)하여 동북의 공업기초를 파괴한 것이다. 다만 소련국내의 수요는 만족되었다.

 

일부 자료통계에 따르면, 1946년이전에, 소련이 동북에서 가져간 설비는 가치가 8.58억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여기에 나머지 자잘한 것들을 합치면 가치는 20억달러에 달한다.

 

그외에 소련은 적지 않은 은행도 약탈했다. 예를 들어 창춘만주은행은 현금7억원, 여기에 각종 유가증권이 있어 가치가 75억원, 황금36킬로그램, 백은 31킬로그램, 다이아몬드 3,700캐럿에 달했다. 

 

더욱 나쁜 짓은 일부 농민이 기르는 황소, 시민들의 집에 있는 라디오, 시계까지도 소련군은 그냥 놔두지 않고 모조리 기차에 실어 국내로 운송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