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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오성홍기(五星紅旗)": 15표를 얻었는데, 185표를 얻은 3호작품을 누르고 국기로 선정된 경위는...?

by 중은우시 2024. 11. 26.

글: 희월담(曦月談)

1949년, 신중국이 성립될 때 전국상하는 신생활에 대한 동경과 갈망으로 충만했다.

이때, 신중국의 정신과 단결을 상징하는 국기는 여전히 결정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정부는 전국에 국기설계모집활동을 벌이게 된다.

후보작들 중에서 "3호작품"으로 명명된 설계가 최고득표수를 기록하여 가장 인기있는 후보가 된다. 이와 비교하면, 오성홍기는 겨우 15표밖에 얻지 못하여, 여러 후보작들 중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신중국을 대표하게 된 것은 그 이름없던 오성홍기로 결정된다.

그렇다면, 오성홍기가 더 많은 득표를 얻은 작품들을 물리치고, 최종적으로 국기로 선정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오성홍기는 무엇을 대표하는가?

눈에 띄는 3호작품

1949년, 신중국이 막 성립되었고, 온 나라가 환호성에 휩싸이고, 모든 일은 새롭게 시작되고 있었다.

이런 배경하에서, 신중국의 기상을 상징하는 국기는 특히 중요했다.

그리하여 정부는 전국각지에 모집공고를 낸다.

이에 많은 호응자가 나타난다. 전문설계자는 물론이고 일반민중들까지도 참여하게 된다.

모집과정에서 최종적으로 3000여개의 설계가 있었고, 평선위원회(評選委員會)이 심사를 하게 된다

그후 여러 단계의 심사를 거쳐 최종적으로 우수한 작품들이 최종투표단계에 올라오게 된다.

그중 3호작품은 홍색을 바탕색으로 했는데, 이건 혁명을 상징했고, 또한 중국인민의 구사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을 대표했으며,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렬한 희망을 나타냈다.

그외에 설계가 전체적으로 간결하고 대담하며 지나치게 복잡한 요소도 없었다.

그리고 광명을 상징하는 별이 그 위에 새겨져 있었다. 이는 중국공산당이 중국인민을 광명으로 인도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이런 설계스타일은 신중국이 향하는 새로운 미래의 상징적인 의미에도 부학했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보여줄 수 있었다.

3호작품이 의외로 낙선하다

3호작품은 전체적으로 설계가 대범하고 간결하며 홍색바탕을 취하며 정중앙에 두드러진 오각형의 별을 두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설계자가 신경써서 그은 횡선이 있다.

이 횡선은 설계상의 "화룡점정"이다. 그 듯은 시각적인 층차감을 주면서 예술성을 체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선때문에 3호작품은 채택되지 못하게 된다.

1949년은 이제 막 국공내전에서 빠져나왔고, 그때 직면한 것은 사분오열되고 만싱창이인 국면이었다.

백여년동안 굴욕을 받아온 중국인들은 국가의 완정과 통일에 대한 갈망이 아주 컸다.

이런 배경하에서 여하한 '분할' 혹은 '분리'의 의미를 지닌 요소는 쉽게 불안과 쟁의를 연상시킬 수 있었다.

평선위원회의 심사위원들은 3호작품의 중간에 있는 횡선을 주목한 후, 그 상징의미에 대해 우려를 하게 된다.

이 선은 설계사의 눈에는 아마도 그저 중립적인 예술적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막 할거와 외래압박을 벗어난 신중국에 있어서 그것은 국가분열을 연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

당시는 신중국이 막 건립되어 아직 통일을 완성하지도 못했는데, 이런 횡선은 마치 사람들에게 아직 회수하지 못한 영토를 떠올리게 만들 수 있다.

그리하여 추가적인 토론을 거쳐 평심위원호는 횡선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키고, 이건 작은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한다.

당시의 중국은 청나라정부의 연약과 열강의 핍박으로 국가주권이 찢어지고, 이때 상실한 토지는 모든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 아픔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만일 횡선이 있는 국기를 채택한다면, 국가의 통일성과 완정성에 의문을 품을 수 있고, 그것은 신중국의 정신이나 추구하는 바에 어긋난다.

그외에 3호작품의 설계는 비록 중국공산당을 상징하는 별이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가 지나치게 규격에 맞추어져 있어서 더욱 세심한 상징성이 부족했다.

최종적으로 여러 차례의 토론을 거쳐 평선위원회는 비록 3호작품이 득표수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점했지만, "분할"설계는 신중국의 단결, 완정 및 불굴의 정신을 나타낼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낮은 득표에도 두각을 나타내다

3호작품이 설계상의 결함으로 부결된 후, 평선위원회는 곤경에 빠진다.

몇 가지 득표수가 높았던 작품들이 차례로 배제된 후, 시종 국기에 적합한 설계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초기투펴에서 겨우 15표밖에 얻지 못한 설계도면이 평선위원들의 시야에 새로 들어왔다.

이 별로 드러나보이지 않는 설계가 바로 지금 누구나 알고 있는 "오성홍기"이다.

전체 깃발은 홍색을 바탕색으로 하고, 좌상각에 두드러진 큰 별을 그려넣고, 주위에 4개의 작은 별이 그려져 있다. 5개의 별은 선명하게 빛나며 상징적인 의미가 풍부하다.

처음에 시야에 들어왔을 때 이 설계는 지나치게 '간단'하다고 보아 평선위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이 도태되면서, 평선위원들은 이 작품의 독특한 점을 다시 살펴보게 된다.

오성홍기의 전체적인 구도는 간결하지만, 깊이도 있었다. 홍색바탕은 혁명을 상징하고, 중국인민이 투쟁과정에서 흘린 피와 희생을 포함한다.

큰 별과 작은 별은 노란색을 채택하여, 홍색바탕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광명과 희망을 상징하여 중국공산당이 인민을 광명의 미래로 이끈다는 점을 잘 표현하고 있다.

황색은 황색인종에 대응된다.

다섯 개의 별 사이의 배치도 정교하다.

큰 별은 중국공산당을 대표하고, 4개의 작은 별은 노동자, 농민, 쁘띠부르조아계급과 민족자산계급을 표현한다. 각 계층이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단결일치, 조화공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작은 별의 한쪽귀퉁이는 큰 별의 중심점을 향한다.

이런 배열방식은 시각적으로 조화롭고 힘이 있을 뿐아니라, 만중일심(萬衆一心)으로 신중국을 함께 건설한다는 상징성도 가진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성홍기의 이런 배치는 '대통일'의 국가기상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분할 혹은 할거의 의미를 지닌 설계요소를 배제했고, 다섯 개의 별의 상호의존과 배열을 통해, 완전하고 조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동시에 오성홍기는 원만한 구도로 당시 중국사회의 통일에 대한 깊은 열망에도 호응했고, 완전하고 단결된 신중국의 이미지를 반영했다.

평선위원들은 보면 볼수록 오성홍기가 간결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품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깊이있게 토론하고나서 그들은 점차 이 설계가 기실 국기가 전달해야할 핵심정신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혁명, 단결, 광명, 희망. 무수한 사람들이 국가가 새로 태어나도록 생명을 바친 배경하에서, 이런 상징의 역량은 가장 귀하다고 볼 수 있다.

최종적으로 오성홍기는 여러 작품들 중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비견할 수 없는 광망을 발하며 신중국의 국기로 선정된다.

오성홍기의 설계자

오성홍기의 설계자는 증련송(曾聯松)이다. 그는 전문적인 설계사도 아니고, 그저 보통의 노동자이다.

증련송은 동탕의 시대를 살았고, 신중국에 대한 갈망과 동경이 충만했다.

1949년, 국기설계모집공고를 보고 증련송은 마음이 움직인다.

이때 그는 상하이의 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생활도 부유하지 못할 뿐아니라, 설계경험도 없었다.

그러나 국가에서 새로운 국기를 필요로 한다는 말을 듣고, 그는 내심이 뜨거워지고 이는 얻기 힘든 기회라고 여긴다.

그는 자신의 두 손으로 막 탄생한 신중국에 자신만의 힘을 보태고자 한다.

그리하여, 낮에는 바쁘게 일하고나서, 매일 틈이 나면 국기설계를 구상한다. 밤에는 등불 아래에서 초안을 잡고, 도안을 수정하며, 계속하여 세부적인 사항을 다듬어간다.

설계과정에서, 증련송은 시종 간결하면서도 상징적인 의미가 풍부해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국기는 미관적으로 아름다워야할 뿐아니라, 정신과 인민의 감정도 그 안에 응집되어 있어야 한다.

무수한 수정을 거쳐, 그는 최종적으로 큰 오각형 별을 주체로 하여, 중국공산당을 상징하고, 4개의 작은 별로 노동자, 농민, 쁘띠부르조아계급과 민족자산계급을 표현했다

그들은 큰 별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고, 각 계층이 당의 영도하에 일치단결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증련송에 있어서 이는 단순한 예술적인 구상만이 아니라, 조국에 대한 당부이기도 했다.

그러나 증련송은 자신의 설계를 투고한 후 그다지 큰 희망을 품지는 않았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작품이 전국각지에서 온 수천수만의 설계와 함께 심사받을 텐데, 자신은 명성도 없고 경험도 없으니 거의 승산이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설계가 의외로 당선된다. 그리고 최종결정된다.

자신의 작품이 국기로 선정되었다는 말을 듣자 증련송은 감격해 마지 않는다.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자신은 평범한 노동자인데, 국가를 위해 국기를 만들 행운을 갖게 될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