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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유지단(劉志丹)>: 소설 한권으로 6만명이 연루되는 사건이 되다.

by 중은우시 2023. 2. 28.

글: 왕우군(王友群)

 

1954년, 중공중앙선전부는 공인출판사(工人出版社)에 '중공열사' 유지단에 관한 책을 출판할 것을 요청했고, 공인출판사는 유지단의 제수(弟嫂)인 이건동(李建彤, 리젠통)에게 집필을 부탁한다.

 

1962년 여름, 6차례나 원고를 수정한 소설 <유지단>이 <광명일보>, <공인일보>, <중국청년보>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옛날 유지단과 충돌이 발생한 바 있는 윈난성위 제1서기 염홍언(閻紅彦, 얜홍얜)이 이의를 제기하여 연재가 중단된다. 염홍언은 반대의견을 중공중앙에 제출한다.

 

염홍언에 따르면, 소설 <유지단>에 나오는 긍정적인 이미지의 인물은 고강(高崗, 가오강)을 모델로 한 것이며, 이 소설은 "고강"의 명예회복을 위해 쓴 것이라는 것이다. 

 

고강은 섬북근거지의 창건자중 한명이다. 1940년대 연안정풍때 염홍언은 중공고위층에 고강의 문제를 보고한 적이 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당시, 고강은 중공중앙에서 섬북근거지의 대표로 인정되었고, 계속 중용되었다. 염홍언은 계속 중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신중국이 건립된 후, 고강은 관직이 중공정치국위원, 중앙정부부주석, 중앙군사위부주석, 국가계획위원회주석에 이른다. 다만, 1954년에 이르러, 고강은 돌연 "고요반당연맹"으로 타도된다. 고강은 도저히 이를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건동은 <유지단>을 쓰는 과정에 습중훈(習仲勛, 시중쉰)의 의견을 구했다. 시중쉰은 고강, 유지단과 함께 섬북근거지의 창건자이다. 1962년에 이르러, 습중훈은 관직이 국무원부총리 겸 국무원비서장에 이른다.

 

염홍언은 <유지단>은 습중훈이 '주재하여' 쓴 것이고, 나중에 시중쉰이 <유지단>의 제1작가라고 말한다.

 

1962년 9월, 중공은 제8기 10중전회를 개최하고, 모택동은 회의에서 계급투쟁을 강조하고 '번안풍(飜案風, 사건을 뒤집는 것)'을 비판한다. 윈난성위 제1서기인 염홍언의 <유지단> 소설에 대한 의견은 모택동의 생각에 부합했던 것이다.

 

모택동은 회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소설을 이용하여 반당행위를 진행하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발명이다. 무릇 하나의 정권을 무너뜨리려면 항상 먼저 여론을 조성해야 한다. 항상 먼저 이데올로기방면의 공작을 해야 한다. 혁명의 계급도 그러하고, 반혁명의 계급도 마찬가지이다."

 

모택동의 이런 말이 나오자, <유지단>은 즉시 '반당소설'로 규정된다. 이때부터 이 소설 한권으로 인하여 17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6만여명이 연루되는 중대한 사건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반당소설"을 둘러싸고, 먼저 습중훈, 가탁부(賈拓夫), 유경범(劉景範)의 습가류반당집단을 치고, 가탁부가 죽임을 당한 후, 인터뷰를 받은 바 있는 당시 노동부장 마문서(馬文瑞)를 끼워넣어 습류마반당집단으로 공격한다. 그후 다시 팽덕회(彭德懷), 고강, 습중훈의 팽고습반당집단이 되고, 다시 업그레이드되어 '서북반당집단'으로 발전한다. 

 

이 소설에 연루된 주요 인사는 다음과 같다.

 

시진핑의 부친 습중훈

 

습중훈은 <유지단>을 검토하기 위해 본 적이 있다는 이유로, '습가류반당집단'의 총두목으로 규정된다. 이 소설은 습중훈이 당과 국가를 찬탈하려는 강령이라고 '인정'된다. 습중훈은 '야심가' '음모가'로 규정되어 3년여간 정직당한 상태로 조사를 받는다. 나중에 하남성 낙양광산기계공장으로 하방되어 부공장장이 된다. 문혁이 발발한 후에는, 8년간 감금된다. 1975년 5월, 낙양내화재료공장으로 다시 하방되고, 1978년에 이르러 북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62년부터 1978년까지 습중훈은 이 소설때문에 꼬박 16년간 숙청당한 것이다. 그의 일가 남녀노소가 모두 연루되었다.

 

유지단의 동생 유경범

 

유경범은 유지단의 동생이다. 당시 역시 섬북근거지의 창건자중 한명이다. 신중국이 건립된 후, 정무원 감찰위원회 당조서기,제1부주임을 역임했다. 1954년, 고강사건에 연루되어, 1955년 지질부 부부장으로 옮겨가지만, 직위만 가졌을 뿐 권한은 없었다.

 

이건동이 <유지단>을 쓰고난 후, 당시 시간이 많이 남았던 유경범은 이 책의 수정작업을 도와준다. <유지단>이 반동소설로 규정된 후, 유경범도 정직당하고 조사를 받는다. 그후 집에 연금당한 상태에서 반성하게 된다.

 

문혁이 발발한 후, 유경범은 계속하여 비판을 받는다. 1968년, 중앙문혁소조 고문 강생(康生)의 비밀을 들춰내었다고 하여, '현행반혁명'으로 수갑을 차고, 감옥에 갇힌다. 그후 감옥에서 7년간 지낸다.

 

모택동을 연안으로 안내했던 가탁부

 

가탁부는 유일하게 섬북에서 '중앙소비에트구'로 와서 일하고 다시 '중앙소비에트구'에서 장정을 거쳐 섬북으로 돌아갔던 중공관리이다. 그는 모택동을 '연안으로 인도한 안내자'였다. 

 

신중국이 건립된 후, 가탁부의 관직은 국가경제위원회 부주임이 된다. 1959년, 여산회의때 중공원수 팽덕회와 함께 타도괸다. 그에게 씌워진 죄명은 '우경기회주의반동분자'였다. 면직후, 요녕무순발전소로 보내어져 일한다. 1962년 중공7천인대회때 명예회복된다. 그후 북경으로 돌아왔지만, 새로운 직무를 받지는 못한 상태에서 소설 <유지단>사건이 터진다.

 

작자는 소설을 가탁부에게 보내어 검토받기 위해, 원고를 가탁부의 비서인 장치상(張致祥)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장치상이 가탁부에게 원고를 건네주기도 전에 소설은 '반당소설'로 낙인찍혀버린다. 더 이상 따지지 않고 가탁부도 '반당집단'의 일원이 되어버린다.

 

이 소설과 확실히 아무런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에 가탁부는 중앙학교로 보내어져 3년간 공부한다. 1965년, 수도강철공사로 가서 부경리(부사장)를 지낸다. 1966년 문혁이 발발한 후, 강생이 한 회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섬북의 그 가탁부는 오래된 반당분자이다." 이때부터 가탁부에 대한 투쟁은 가열된다.

 

1967년 5월 7일, 가탁부는 수도강철공사의 묘포(苗圃)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그가 어떻게 죽은 것일까? 지금까지도 수수께끼이다. 그의 시신은 화장한 후, 유골함에 이렇게 썼다: "외죄자살(畏罪自殺, 죄를 지어 처벌을 겁내어 자살하다), 반혁명(反革命)"

 

닝샤(寧夏), 칭하이(靑海), 깐쑤(甘肅)의 관리들

 

이건동은 소설 <유지단>에 이런 이야기를 썼다. 1962년 1월, 중공이 7천인회의를 소집개최한다. 회의기간, 이건동의 남편 유경범은 몇몇 섬북의 고향사람들을 모셔서 메밀국수를 대접한다. 그런데, 이 일이 나중에 화근이 된다. 그의 집으로 가서 메밀국수를 먹은 사람은 모조리 <유지단>을 쓰는데 가담한 사람이며 음모가라고 규정되게 된다.

 

그 결과 메밀국수를 먹은 닝샤회족자치주 주석 나성덕(羅成德), 칭하이성위부서기 담생빈(譚生彬), 깐쑤성 부성장 장붕도(張鵬圖), 란저우시위서기 왕요화(王耀華), 깐쑤성 지우췐지구전원 모응시(毛應時)등이 모조리 조사를 받고 '서북반당집단'의 구성원으로 규정된다.

 

서북출신 혹은 서북에서 근무한 바 있는 고위관료들

 

3대에 걸친 중공중앙서북국서기인 고강, 팽덕회, 습중훈을 제외하고도, 서북에서 근무한 바 있는 하장공(何長工), 주양(周揚), 송임궁(宋任窮), 마문서, 곽홍도(郭洪濤), 반자력(潘自力), 이지주(李志舟), 고등방(高登榜), 주리치(朱理治), 고금순(高錦純), 왕조상(王兆相), 왕은혜(王恩惠), 오량태(吳亮台), 고랑정(高朗亭), 조연벽(趙連璧), 장방영(張邦英), 조요선(趙耀先), 방중유(方仲儒), 진천(秦川), 소일평(蘇一平), 문첩(聞捷), 장수산(張秀山), 장책(張策), 고봉(高峰)등이 타도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박해받아 죽임을 당한다.

 

샨시(陝西), 깐쑤, 닝샤의 하급관리 및 군중

 

이건동은 이렇게 말한다: "섬감녕(샨시,깐쑤,닝샤)지구의 하층간부와 군중들중 만명이상이 '팽,고,습반당집단'의 일당으로 타도당한다. 심지어 필자가 섬북으로 취재를 나갔을 때 길안내를 해주었던 군중도 몇명 맞아죽는다."

 

공인출판사의 직원과 전총(全總)의 지도자

 

<유지단>을 출판한 공인출판사는 사장부터 편집자까지 한명도 화를 피하지 못한다.

 

사장 고려생(高麗生)은 외지로 보내어져 노동개조당하고, 문혁때 다시 비투를 받는다. 비인간적인 폭행으로 결국 죽고 만다.

 

총편집 여녕(呂寧)은 심문도중 맞아서 거의 반죽음이 된다. 나중에는 행방불명이 된다.

 

책임편집자 하가동(何家棟)은 일가족이 시골로 쫓겨난다. 모친과 두 아들은 가난과 병으로 죽고 만다. 그 본인은 문혁때 조반파에게 악독하게 구타당해 두 눈을 거의 실명한다. 

 

또 다른 책임편집자 왕면사(王勉思)와 그녀의 남편 강탁(康濯)도 비투를 당한다.

 

편집실주임 두영(杜英)은 강생에 의해 직접 이름이 거명되며 참혹하게 비판투쟁당한다. 그녀의 남편은 장정에 참가한 바 있는 원로홍군이고 군대의 모부대정위였는데, 그까지 연루당한다.

 

공인출판사의 상급주관부서인 전국총공회의 주석 마순고(馬純古), 서기처서기 장수죽(張修竹)도 비판당한다.

 

왜 모택동은 소설 <유지단>을 문제삼았을까?

 

모택동은 스스로를 "중공혁명의 정통"으로 자부했다. 중공에는 오직 한명의 최고지도자만 있어야 하고, 그는 바로 자신 모택동이다. 중공에는 오직 하나의 사상만 이어야 하고 그것은 바로 모택동사상이다. 유지단을 선전하는 것을 모택동이 그냥 놔둘 리가 없다. 고강을 선전하게 되면 모택동은 어떻게 되는가? 습중훈을 선전하게 되면 모택동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당시 고강은 서북에서 동북으로 옮겨간 후 '동북왕'이 된다. 1954년 모택동은 고강을 숙청하는 동시에 중공내부의 '동북인맥'을 모조리 제거한다. 

 

모택동은 <유지단>을 문제삼아 중공내부의 '서북인맥'을 제거한다. 동시에 다른 인맥들에게도 경고한 것이다. 중공에는 유아독존 모택동만 있을 뿐이다.

 

모택동은 소위 '반당소설'을 이용하여 사람을 숙청했다. 그리고 모택동은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을 신봉했다.

 

<유지단>의 책임편집자였던 하가동은 나중에 이렇게 결론내린다: "<유지단>사건은 처음부터 당시의 숙반(肅反)과 마찬가지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먼저 성격규정을 하고(반당), 그후에 죄명을 찾아서 씌운다. 먼저 치고 보는 것이다. 모택동은 말년에 노선투쟁에 더욱 골몰한다. '노선은 강(綱)이다. 강거목장(綱擧目張, 강을 들면 목을 펼친다)' 강은 바로 무산계급혁명노선이고, 목은 바로 큰 그물을 펼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자파도 잡고, 반동권위도 잡도, 우귀사신도 잡는 것이다. 일단 그물에 걸려들면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한다. 모든 것은 모택동의 개인의지에 달렸다. 그는 하고싶은대로 했다. 전체인민은 이렇게 하여 시비를 판단할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모택동의 한마디면 당의 전국대표대회가 제정한 노선도 뒤집힌다. 아무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아닌지, 합법인지 아닌지, 당장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묻지 않는다. 그저 모택동의 금구옥언이 있으면 절대진리가 된다. 한 목소리로 '만세'를 높이 외쳐야 한다. 대약진시대에 비정상사망자수가 항일전쟁때 희생된 사람수의 총계에 상당했다. 그래도 노선착오라고 말하지 못했다. 잘못된 정책과 잘못된 실천을 비판한 사람이 '노선착오'를 범한 것이 될 뿐이고, 우경기회주의자, 반당집단이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병이 있는데, 남에게 약을 먹으라는 식이다. 그래도 아무도 일어나 비판하지 못하고, 오히려 집단으로 옹호했던 것이다.

 

"맹인기할마(盲人騎瞎馬), 야반임심지(夜半臨深池). 눈먼 장인이 눈먼 말을 타고, 야밤에 깊은 연못에 이르렀다. 분명 죽는 길인데도 왜 아무도 소리치지 않은 것일까?"

 

하가동의 결론은 깊이가 있다. 문제는 "왜 하가동이 말하는 이런 극단적인 이상현상이 나타났느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