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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조복전(曹福田): 의화단(義和團)의 2인자

by 중은우시 2022. 1. 2.

글: 여소뢰(余少鐳)

 

오랫동안 의화단이 사람들에게 심어준 ㅇ니상은 '봉양필반(逢洋必反)' '봉양필멸(逢洋必滅)' 즉 외국 것은 모두 반대하고 없앤다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 소위 '양'자가 붙은 물건은 국가를 따지지 않고, 브랜드도 따지지 않고 모조리 서양인이 중국을 해치기 위해 가져온 것이니 없애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화단이 한양멸양(恨洋滅洋)한 사료는 차고 넘치도록 많다. 그저 뒤져보기만 하면 나온다.

 

예를 들면, 청말민초의 광동 순덕 사람 나돈융(羅敦曧)이 쓴 <경자국변기(庚子國變記)>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의화단은 철로, 전선은 모두 서양인들이 중국을 해하지 위한 것이니 철로는 불태우고 전선은 철거한다. 무릇 집안에 서양책, 서양지도를 보관하고 있으면 모두 '이모자(二毛子)'이니, 잡아서 반드시 죽여야 한다"(<청조야사대관.권3 청조사료에도 수록되어 있다)

 

중방씨(仲芳氏)가 작자로 되어 있는 <경자오월의화단진경축일견문기략(庚子五月義和團進京逐日見聞記略)>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각 집에 말을 전하여 외국물건은 남기지 못하게 했다. 크고 작고를 떠나 모조리 부숴버리도록 했고, 만일 명을 따르지 않고 남겨두었다가 수색해서 나오면 방을 불태우고 사람을 죽인다. 이모자와 같은 죄로 처리한다."

 

<권비기사(拳匪紀事)>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어, 사람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다:

 

"권비가 일어날 때, 서양물건을 통한(痛恨)하여, 이를 어긴 자는 반드시 죽이고 살려두지 않았다. 작은 담배, 작은 안경, 심지어 양산, 양말까지 쓰는 자는 극형에 처했다. 일찌기 학생 6명이 황급히 피난가면서 몸에 연필 1자루, 서양종이 1장을 가지고 있었다가 권비를 만나 난도질당해 모조리 비명에 죽는다."

 

외국어를 가르치던 동문관(同文館)은 더더욱 제거대상이었다. 당당한 대청의 백성이 어찌 외국어를 배운단 말인가.

 

<서순회란시말(西巡回鑾始末) 진문전후기(津門戰後記)>에 따르면, 이홍장의 영문비서이자 북양해군의 창시자중 한명인 나풍록(羅豊祿)에게는 나희록(羅熙祿)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하남에서 천진으로 가면서 두 상자의 외국어서적을 가지고 있었다. 의화단이 서양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죽인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차마 버리지 못했다. 그 결과, "가는 도중 권비에 붙잡혀 나무에 묶인다. 지나가는 권비들이 한번씩 찔렀는데, 칼이 무뎌서 여러번 찔러도 죽지 않았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울부짖는다. 칼로 찌는 자들은 돌아보며 즐거워했다; 따라가던 종이 자신은 이 분을 여러 해동안 모셨는데, 주인은 절대로 이모자가 아니라고 말하다가 역시 죽임을 당했다. 오로지 마부만 목숨을 건졌다. 그들은 양물을 이처럼 통한해 했다."

 

이렇게 상상해볼 수 있다. 이런 시대에 서양명절을 지내다가는 스스로 죽으려고 환장하는 짓인 것이다.

 

다만 나돈융의 또 다른 책인<권변여문(拳變餘聞)에는 의화단에서도 별종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의화단의 세력이 가장 흥성했던 천진에서 '서양물건을 파는 가게가 많이 파괴될 때' 이 조직에서는 공개적으로 이에 반대한다. "그럴 필요없다. 서양물건은 중국에 들어온지 이미 오래되었다. 상인과 백성이 무슨 죄인가?" 

 

감히 이런 말을 하다니.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의화단에서의 지위가 장덕성(張德成) 바로 다음가는 2인자 조복전(曹福田)이었기 때문이다. 

 

조복전은 천진 정해현 사람이다. 원래 지방군의 유용(遊勇)이었는데, 아편을 피우다가 부대에서 쫓겨났다. 

 

천진에 막 도착했을 때 천진성내에는 이미 권단(拳壇)이 있었다. 그는 신공을 보여주어 사람들을 따르게 하기 위해 성루에 오른다. 그리고 묻는다. 서양인들의 조계가 어느 쪽인가? 현지인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동남쪽이라고 말한다. 조복전은 그 말을 듣고 즉시 동남방을 향해 꿇어앉아서 몇번 절을 한다. 조금 시간이 흐른뒤 일어나서 손바닥을 치면서 담담하게 말한다: "조계의 서양건물은 모두 내가 부숴버렸다."

 

그의 말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동남쪽에서 짙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그에게 탄복하여 바로 그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진상은 이러하다. 조복전이 사전에 사람을 사서 민가에 불을 지르게 했고, 연기를 펼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조복전은 일약 명성을 떨친다. 천진의 권민들은 모두 그의 말을 따랐다. 그는 다른 의화단의 두목들과는 달리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는 스타일이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서양물건을 파괴하는데 반대하였을 뿐아니라, 천진시민들이 무릎을 꿇고 그를 맞이하자, 그는 말 위에서 손을 흔들면서, "무릎꿇을 필요없다"고 한다. 심지어 권단에서 시민들에게 채식을 하도록 명령했다는 말을 듣자, 그는 반대한다. "그럴 필요없다. 나도 술과 고기를 먹는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인간적인 태도는 즉시 효과를 나타낸다: "천진의 백성들이 더욱 그를 신봉했다." 

 

이를 보면, 한 조직이 아무리 반인류적이더라도 그 구성원 중에서 누군가가 인간적인 말을 하고 인간적인 일을 하면 즉시 민중의 옹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조복전이 감히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의화단내에서 최고위직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정말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간단하다. 인간성이 있는 인물이 어떻게 의화단의 대사형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의화단운동을 기록한 글에서는 모두 이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조복전이 권민을 이끌고 천진조계의 자죽림고묘로 쳐들어간다. 거기서 공부하고있던 학생들을 붙잡고, 잉크와 펜등 서양물건을 찾아낸다. 그후 십여명의 학생들을 모조리 서양인의 간첩이라고 하여 일거에 모조리 죽여버렸다.

 

인간성이 있는 인물이라면 아무런 무기도 갖고 있지 않은 학생들을 이처럼 무참하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전투에 나설때의 모습은 이러하다:

 

조복전이 말을 타고, 큰 선글라스를 끼며, 입에는 서양담배를 물고, 긴 옷에 붉은 허리띠를 매고, 비단신발을 신었으며, 등에는 빠른 총을 매고, 허리에는 작은 서양총을 찼다. 손에는 수숫대를 들고, 길가의 사람들에게 전투를 구경하라고 말했다.

 

큰 선글라스, 서양담배, 서양총. 이것들은 모조리 서양물건이다. 다만 조복전이 걸친 것에 그다지 위화감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서양인은 반대하지만 서양물건은 반대하지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하면: 멸양(滅洋)은 직업이고, 서양물건을 쓰는 것은 생활이다.

 

이는 홍등조(紅燈照)의 두목 임흑아(林黑兒)와도 같다. 그녀도 서양물건에 반대했지만, 외출할 때면 반드시 서양총으로 자신을 보호했다.

 

이러한 난세에 살아가는 일반백성들은 얼마나 힘들 것인가. <권변여문>의  첫머리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6년전인 청일전쟁때 천진은 전쟁의 피해를 크게 입어 민중들이 집을 잃고 떠돌았다. 당시 북향에서 강을 파니 비석이 하나 나왔는데, 거기에는 참어(讖語) 비슷한 말이 쓰여 있었다: "이 고생은 고생이라 할 수도 없다. 이사가일오(二四加一五), 홍등조만가(紅燈照滿街) 그때가 비로소 고생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천진백성들은 이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6년후 "홍등조만가"라는 말은 비로소 현실이 되었다.

 

의화단이 득세할 때, 서양물건은 무차별적으로 없앴다. 민중들은 서양물건과 관련되면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그러다가 팔국연합군이 오자, 의화단의 허위는 들통이 났고, 그들이 말하는 신공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북경을 버려두고 서안으로 도망친다. 민중들은 부득이 '협양자보(挾洋自保)'할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언급한 <서순회란시말.진문전후기>를 보면 나희록이 죽임을 당한 참상을 기록한 후, 바로 천진의 민중들에 대하여 쓴다.

 

"지금은 전혀 달라졌다. 서양인들의 낡은 모자나 신발 한짝이나 때묻은 옷이나 낡은 바지 하나만 있더라도 그것을 입어서 드러냈다. 집의 빈 곳이 있으면 모두 서양글자를 써놓았다. 어법이 맞든 말든, 제대로 썼건 말건 어쨌든 서양것과 비슷하면 그것을 써놓고 자랑으로 여겼다."

 

심지어 이런 말도 있다:

 

"일본군이 먼저 도착했다. 천진의 백성들은 '대일본순민(大日本順民)'이라고 크게 써서 문에 걸어놓거나 팔에 두르고 자신의 몸을 보호하려 했다. 권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북경쪽에서도 팔국연합군이 진입하자, 관리들과 귀족들중 많은 사람들이 "앞장서서 집앞에 '모국순민기'를 걸어놓았다" "북을 두드리고 폭죽을 울리고, 양과 술을 마련하여 외국군대를 맞이했다." 독일군이 주둔하던 순치문밖에는 "그 지역에 새로 만드는 점포의 이름은 대부분 사대부들이 이름을 지어주면서 이렇게 지었다. '덕흥(德興)' '덕성(德盛)' '덕창(德昌)' '덕풍후(德豊厚)' '덕장풍(德長豊)'등(중국에서 독일을 德國이라 한다). 심지어 전혀 연관이 없는 글자에도 앞에 억지로 '덕'자를 붙였다. 이렇게 외국에 잘보이려는 글은 손가락으로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영국, 미국, 일본, 이탈리아가 주둔한 지역에서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서순회람시말>에는 천진백성이 어떻게 '숭양(崇洋)'하는지를 기술한 후 이렇게 탄식한다: "우리 백성들은 세상에 수치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인가?" 

 

진정으로 후안무치한 것은 서태후를 우두머리로 하는 청나라조정이다. 먼저 기세등등하게 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서, 싸워서 질 것같으니 멀리 도망쳤다.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조정을 뒤집어 엎으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심지어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아부한다. 1902년 2월 3일 <타임즈>의 보도를 보자. 이틀전 서태후가 북경으로 돌아온 후 각국 주북경공사를 접견하는 광경이다:

 

태후는 건물로 들어오자마자 Conger부인(미국공사 Edwin Hurd Conger의 부인)의 손을 붙잡고 몇분간이나 놓지를 않았다. 그녀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오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각국공사관을 공격한 것은 크나큰 과오였다고. 그녀는 후회막급이라고. 후회막급하여 깊이 반성하고 있다. 더더구나 이로 인하여 "중화의 재물을 바쳐서 각국의 환심을 얻겠다"는 비굴한 모습을 보였다.

 

의화단은 청나라조정의 종용하에 무차별적으로 서양인을 죽이고 서양물건을 파괴했다. 민중들이 서양물건을 없앤 것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의화단이 실패하고, 팔국연합군이 들어오자, 민중들은 서양을 숭상한다. 그것도 역시 목숨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천조(天朝)라 자처하던 청나라조정도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서양에 아부하면서, 민중들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숭양하지 말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