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팔리문예지성(汗八里文藝之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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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조약>의 체결과 더불어, "중화민족은 가장 위험한 시기가 도래했다" 내우외환의 곤경에 혁명당인들은 보편적으로 폭력혁명만이 철저히 청나라 통치를 전복시키고, 중국을 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시대적 배경하에서, 그들은 "구제달로(驅除韃虜), 회복중화(恢復中華)"의 구호를 외칠 뿐아니라, 사상등 분야에서 일련의 "배만(排滿)" 작업을 하게 된다.
첫째, "만주는 중국이 아니다"라는 점을 논증하다.
청나라 통치를 전복해야할 필요성 때문에, 혁명당인들은 '만주인'들이 국가와 민족에 끼친 악랄한 죄악을 상세하게 드러낼 뿐아니라, 만주족과 한족의 구분을 명확히 했다.
예를 들면, 추용(鄒容)은 <혁명군>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무릇 사람이 자신의 종족을 좋아하기 때문에, 반드시 안으로는 단결하고 밖으로는 배척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한족을 '중국인종'의 주간(主幹)으로 보았을 뿐아니라, 일본인도 중국인종의 범주에 넣었다. 오히려 만주인은 '시베리아인종'으로 넣었다.
만주족, 한족 두 민족의 관계를 평가할 때, <혁명군>은 명확히 대한족주의의 경향을 보였다:
"도적 만주인들이 입관(入關, 산해관을 들어와 북경을 차지한 일)이후 이백육십년간 우리 동포의 털을 먹고, 우리 동포의 땅을 짓밟았으며, 우리 동포의 심인후택(深仁厚澤)은 그의 골수가 되고, 그의 살이 되었다. 우리 동포가 소변을 보고 난 후에 만주인들이 우리를 위해 나머지 오줌을 먹고, 우리 동포가 대변을 보고 난 후에 우리를 위해 남은 똥을 핥아도 우리가 길러준 깊은 은혜의 만분의 일도 갚기 부족하다."
왕정위(王精衛, 1883-1944)는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주인의 문제는 이민족이라는 것에 있지 않고, 신명지주(神明之胄)인 한민족에 동화되기를 거부한데 있다." 그가 보기에, "견양천종(犬羊賤種)의 만주민족이, 오히려 피정복된 다수 민족을 흡수하려고 기도했다." 이것은 그로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글에서 크게 소리친다. "무릇 민족은 엄히 그 종족간의 경계를 명확히 하여 잡종이 섞이지 않게 하면 그 종족은 날로 약해지고 순치되어 스스로를 보존할 수 없게 된다. 널리 이민족을 받아들이면, 그 사회는 날로 강성해진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은 혁명당인들은 일종의 잘못된 개념을 갖게 된다. 즉, "만주인을 중국인에게서 배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손중산(孫中山)은 이렇게 말했다. "만청정부는 중국정부가 아니다. 중국인은 현재 자신의 정부가 없다." 왕정위도 이렇게 생각했다: "만주가 입관하기 전에, 우리나라와 달랐다. 종족이 달랐다. 마치 오늘날의 이웃나라와 같았다. 만주가 입관한 이후 중국은 이미 나라가 망했고, 오늘날의 정부는 바로 만주정부이지, 중국정부가 아니다."
앞줄 왼쪽부터 호한민, 당소의, 손중산, 황흥, 왕정위
"만주는 중국이 아니다"라고 설명하기 위해, 왕정위는 특별히 <만주변호자의 후안무치를 질책한다>는 글을 써서 국민예속과 국가관계의 각도에서 논증했다.
먼저, 글에서는 "만주인은 중국의 인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왕정위는 소위 '국민'은 "반드시 소위 영속적인 종속관계에 부합해야 한다" 그는 명나라의 호적제도, 건주여진의 기구설치 및 <명사>에 나오는 "유위불언호구(惟衛不言戶口)"라는 말을 근거로 삼아. "만주인은 명나라때 중국의 국적을 취득하지 못했다"라고 결론내렸다.
그가 보기에 "만주인은 시종 국적을 취득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귀화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귀화되지 않았다면 어찌 중국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주인은 중국인민인 적이 없었다는데 의문이 없다."
"여진의 여러 부족이 명나라에 칭신납공(稱臣納貢)한"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왕정위는 이렇게 보았다. "만주는 비록 중국의 신하로 칭했으나, 중국의 인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주로 두 가지이다. 하나, 쌍방은 "조그만치의 영속적인 종속관계가 없었다. 이를 가지고 신민의 자격이 이미 정해졌다고 할 수 없다"; 둘, "만주인은 귀화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동화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만주는 비록 중국의 관직과 작위를 받고 있지만, 중국의 인민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음으로, 문장에서는 "만주가 건국하기 전에, 중국의 기미주(羈縻州)였다. 건국이후에는 중국의 적국이었다."
왕정위가 보기에, 기미주는 "먼곳에 사는 사람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중국이 특별히 설치한 제도이다. 국제법상으로 소위 보호령과 아주 유사하다."
그러므로, "보호령은 단지 영토주권이 거치는 단계이지, 영토주권의 연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문명국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민족에 대하여 보호권을 행사한다. 명나라때 만주를 다루는 것이 바로 그러했다. 만일 이미 건국했다면, 피보호국이다. 건국하지 않았다면 기미주 즉 보호령이다. 이를 가지고 말하자면, 만주는 중국의 영토가 아니라는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만주인은 중국의 신민이 아니고, 만주는 중국의 영토가 아니라면" 만주가 건국한 이후, 내란으 볼 수 없고 마땅히 중국의 이웃나라로 보아야 한다는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최종적으로 그가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중국이 아닌" 청나라가 명왕조를 대체한 것은 통상적인 왕조교체가 아니라, "중국이 외족에 멸망한 것"이다.
둘째, 무창의거(武昌起義)의 "배만운동"
1911년 10월 10일 밤, 무창의거가 발발한다. 한양(漢陽)과 한구(漢口)의 혁명당인은 각각 11일과 12일 이에 호응한다. 얼마 후, 호북군정부(湖北軍政府)가 성립되고, "십팔성기(十八星旗)"는 이번 혁명의 승리를 상징한다.
자료를 보면, "십팔성기"의 가로세로비율은 8:5이다. 도안은 붉은색 바탕에 흑색구륜각과 18개의 작은 노란둥근별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홍색바탕과 흑구륜은 "철혈정신"을 의미한다. 이는 청나라를 전복시키겠다는 결심을 나타낸 것이다. 흑색구각은 <우공(禹貢)>에 기재된 기주(冀州), 연주(兗州), 서주(徐州), 양주(揚州), 형주(荊州), 예주(豫州), 양주(梁州), 옹주(雍州)등 구주를 대표하고, 18개의 작은 노란별은 "한지십팔성(漢地十八省)"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국가통일, 민족화목, 전도광명'을 상징한다. 둥근별은 금황색을 띄고 있는데 이는 만주민족에 대립하는 '한족염황자손(漢族炎黃子孫)'을 의미한다.
호북군정부가 반포한 <포고전국전(布告全國電)>에는 혁명당인들의 혁명의 미리에 대한 극단적인 전망이 담겨 있다:
"깊이 바라건데 18개 성의 부로형제(父老兄弟)들이 힘을 합쳐 함께 나아가, 같이 원수를 무찔러 우리 나라의 땅을 되찾고, 우리의 국치를 설욕하자. 직접 황룡부를 쳐서 서훈통음(敍勛痛飮)하는 것이 우리 한족의 만대의 영광이다. 우리 십팔성의 부로형제들이여 같이 노력하자!"
이를 반포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장태염의 <토만주격(討滿州檄)>을 고쳐서 <포고해내인사전(布告海內人士電)>도 내놓는다. 이는 내용이 훨씬 급진적이다. "만, 몽, 회, 장등 변방민족과 전면적으로 전쟁을 벌이자"는 자세를 보였다:
"너희 몽,회,장족들은 우리 중화의 품에서 이백여년간 길러졌다. 너희가 만일 우리 한족의 덕을 잊고, 악행을 고치지 않고, 너희 몽골인으로 한족에 귀화한 자들이 다시 접족경해(蹀足警欬)하며 외몽골과 호응하면, 군정부는 장병을 골라서, 너희의 땅을 깊이 들어가, 왕정을 갈아업고, 마을을 없애며, 너희 종족을 멸족시키고, 너희의 시신으로 경관(京觀)을 쌓을 것이다."
한가지 주목할 점은 무창의거가 발발하는 것과 동시에 무창성에 살던 4대 만성(滿姓) 즉 찰(扎), 포(包), 철(鐵), 포(布)의 사대가족은 거의 모두 살륙당했고, 팔기회관(八旗會館)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미국의 역사학자 조셉 에셔릭(Joseph W Esherick, 周錫瑞, 1942- )는 이렇게 말했다: "의거발발후 성내의 기인에게는 거의 도살이었다."
당사자의 회고에 따르면, "혁명당인은 기병(旗兵, 팔기병사)을 잡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거나, 혁명군정부로 보내어 총살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어떤 기병은 체포된 후 죽을 때까지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기병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되었다. 의거성공후 3일이 지나, 군정부가 명령을 내리자 비로소 살인이 멈추게 된다."
기병을 수색하는 과정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했던 사병 만업재(萬業才)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붙잡은 기병의 대다수는 처형되었다. 어떤 기병은 체포된 후에 말을 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호북사투리를 흉내내어 조사에 응했다. 혁명군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는데, 성문을 출입하는 자들에게 모두 '육백육십육'을 말한 다음에 드나들 수 있게 했다. '육백육십육'의 호북사투리는 "lou be lou si lou"인데, 무한의 토박이가 아니라면 똑같이 따라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로이터 기자는 14일 무창에 도착한 후에 "성안의 도처에 만주인의 시신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관찰한 후에 이렇게 추산했다. 성안에서 약 800명이 피살되었다고.
셋째, "배만"으로 파생된 변경위기
혁명당인이 "구제달로"를 선전함과 동시에, 일본과 제정러시아등의 나라에서 교사함에 따라, 몽골, 티벳, 신강등 변방지구에서 연이어 "배한(排漢)"을 중심으로 한 분열위기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내몽골의 일부지역에서는 많은 한족백성들이 쫓겨나거나 살인방화를 당했다. 동란이 티벳까지 번져갔을 때, 라싸는 '인심이 흉흉하고, 유언비어가 사방에서 일어나며, 티벳인들은 한족을 죽이라고 하고, 한족은 티벳인을 죽이라고 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두려워했다." 티벳군은 "옥석을 가리지 않고, 한족을 보면 바로 죽였다." 각지의 한족백성들의 처지는 극히 비참했다.
이에 대하여 입헌파학자인 양도(楊度, 1875-1931)는 <중국신보서(中國新報敍)>라는 글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민족혁명은 반드시 국가분열을 불러온다. 국가는 최소한 한, 몽, 회, 장의 4국으로 분열될 것이다. 분열이 되면 반드시 열강이 나누어 차지하려 들 것이고, 결국 나라가 망할 것이다."
1911년 11월 30일, 제정러시아의 책동하에, 팔세 제쮠담바(哲布尊丹巴)는 "외몽골독립"을 선언한다. 1912년 1월 3일, 울리아스타이(烏里雅蘇臺)의 자사그투칸(札薩克圖汗)도 독립을 선포하고, "중국관리를 쫓아내고, 한족 상인과 백성들은 학대를 받는다."
이와 동시에, 내몽골의 각지에서도 연이어 불안정한 모습이 연출된다. 1912년 1월 중순, 후룬부이르(呼倫貝爾)맹은 제정러시아의 책동하에 '독립을 선언'한다. 저림(哲里木)맹의 군왕(郡王) 우타이(烏泰)도 적극적으로 반란을 준비한다. 1월말, 카와시마 나니와(川島浪速)등의 책동하에 카라친(喀喇沁)군왕 귄센노로브(貢桑諾爾布)등 몽골왕공은 일본대출을
받아 무장폭동을 일으킬 준비를 한다.
이를 보면 다민족통일국가의 분열은 분명 대규모의 민족충돌과 상호살륙을 낳는다. 각족의 민중에 있어서, 민족전쟁은 일대 재난이다. "잡거지억에 사는 갑족은 반드시 을족을 쫓아내고 현지를 갑국에 속하게 하려 하고, 을족도 갑족을 쫓아내고 현지를 을국에 속하게 하려 한다."
넷째, 너의 "만주", 나의 "동북"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의 각계층의 민족자신삼은 현저히 제고되었다. 원래 중원(한족)의 역사문화를 집중하여 보고 있던 일본학계에는 돌연 만주, 몽골, 회족, 장족등 "변방지구"의 연구붐이 미친 듯이 일어난다.
20세기이후 일본학자의 "중국변방사연구"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일본학자들은 한때 "만주, 몽골, 회강(신강), 티벳, 조선등지에 대하여 자신의 국토와 같은 느낌이 나타나게" 되었다.
(1) "동북"과 "만주"
일본학자들이 빈번하게 "만주"라는 단어로 '동북'을 가리키는 상황에 대하여, 일본에 유학한 경험이 있는 역사학자인 김육불(金毓黻)은 다음과 같이 정곡을 찔러 말했다:
"너희 나라의 학자는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여러가지로 동북삼성은 중국의 고토가 아니라고 증명하려 했다. 그 목적은 동북과 중국을 둘로 나누려는 것이다. 그래서 동북이라고 부르지 않고, 만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연구방법은 '합병'을 위한 것이다. 그 마음 씀씀이가 대단핟. 또한 학자를 앞세운 것이다."
일부 중국학자들이 "만주", "중국본부(中國本部)"라는 일본식 용어를 사용하는데 관하여, 역사학자 부사년(傅詞年, 1896-1950)은 극히 가슴아파하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 및 서양의 서적에서 동삼성(東三省)을 만주라고 부른다. 이 잘못은 아주 두드러진 것인데, 이 잘못된 용어를 사용하는 심계는 아주 깊다. '남만(南滿)', '북만(北滿)', '동몽(東蒙)'등의 단어는 특히 침략을 도모하거나 중국을 나눠어갖기 위해 만들어낸 단어이다. 아무런 민족적, 지리적, 정치적, 경제적 근거가 없다. 청나라말기이래, 중국인들중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습관적으로 한문문장에 쓰는 자가 있는데 특별히 가소롭다고 할 수는 없어도, 매우 한탄스러운 일이다."
<우공(반월간)> 잡지의 발간사에 주편집인인 고힐강(顧頡剛, 1893-1980)은 더욱 격렬한 언사로 말했다:
"우리의 동쪽 이웃(일본을 가리킴)이 우리를 고의로 침략하는 것을 보라. '본부'라는 말로 우리의 18성을 표시한다. 우리의 변방지구는 원래 우리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의 바보들이 그들의 마취를 인정하고, 어떤 교과서에서도 이렇게 부르고 있는데, 이게 우리의 치욕이 아닌가?"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우리는 동북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김육불은 "동북이라는 것은 그 위치가 중국본부의 동북방에 있어서 얻은 명칭이다. 그중에는 협의와 광의가 있는데, 동북의 방위로 말하는 것이 광의이고, 연구의 편리를 위하여 말하는 것이 협의이다."
1941년, <동북통사>시리즈총서가 정식으로 출판된다. '동북'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하여, 그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동북이라는 것은 중국의 동북부이다. 역시 중국의 일부이다. 어찌 중국의 바깥의 모든 곳을 동북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동북이라는 명칭은 원래 방위에서 나왔지만 그 후에 다시 일정한 구역을 획정했고, 그리하여 동북이라고 이름짓게 된 것이다.
중앙에 대하여는 국토의 일부이고, 지방에 대하여는 방위의 소재이다. 명칭이나 의미가 적당하고, 말하기도 편리하다. 이것보다 나은 말은 없다. 소위 방위, 소위 구역은 의미가 비록 다르지만, 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김육불외에 역사지리학자인 이장박(李長博)도 이렇게 지적한다. '만주'는 '동삼성'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무엇이 '동삼성'인가? 그는 이렇게 본다:
"만청의 말기에 만주에 성경(盛京), 길림(吉林), 흑룡강(黑龍江) 삼성(三省)을 두었다. 만주는 청나라의 발상지이므로 행정조직이 본부와 달랐다. 각각 장군을 설치하여, 통치했다. 지역이 산해관 바깥에 있으므로 관외동삼성(關外三省) 혹은 관동삼성(關東三省)이라고 부르다가 간칭으로 '동삼성(東三省)' '동성(東省)'으로 불렀다.
청나라말기 동삼성총독을 두었고, 민국이 성립된 후에도 여전히 동삼성의 명칭을 답습한다. 최근에 어떤 사람은 동북삼성이라고 부르는데, 간칭하여 동북이라 부른다."
'만주'와 '동삼성'의 구별에 관하여 그의 저술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만주는 민족을 근거로 한 지명이다. 동삼성은 행정을 근거로 한 지명이다. 동삼성의 대부분은 만주지방이다. 그러나 작은 부분 예를 들어 흑룡강의 후룬일대, 길림의 장춘일대, 요녕의 도남(洮南)일대는 원래 몽골의 유목지이다. 새로 현을 둘 때, 만주와 몽골의 경계선은 대체로 유조변(柳條邊)을 경계로 한다."
이처럼 꼬치꼬치 따지면서 '동북'과 '만주'라는 용어를 두고 다투는 것은 많은 정도로 그들의 "이사구국(以史救國)"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2) "동북연구"의 발단
일본이 "만선역사지리조사부(滿鮮歷史地理調査部)"등 기구를 성립하면서, 중국내에서도 "동북역사연구"를 위주로 하는 학술단체가 생겨난다. 그중 가장 영향력을 지닌 것은 김육불이 주도하여 만든 "동북학사(東北學社)"이다.
청년시대의 김육불은 일찌기 일본학자들과 아주 깊이 접촉했었다. 교류과정에서 그는 놀라운 것을 발견한다. 일본학계의 돋북인문역사지리에 대한 연구는 중국보다 훨씬 뛰어났다. 이에 대하여 그는 탄식하며 말한다:
"동복사를 연구하는 중심이 우리나라가 아니라 일본이다. 그렇다. 그 의도가 어떠하든지, 그들이 말하는 것이 견강부회이든 아니든, 자료를 풍부하게 모은 것이라든지, 학설이 많은 것이라든지, 저서가 많은 것이라든지 모두 경탄할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 동양사에 관한 서적을 살펴보면 10권중 반드시 1권은 동북에 관한 것이다. 동방학술을 논하는 잡지에 글이 있으면 10편중 1편은 동북에 관한 것이다. 그 분야와 내용을 살펴보면 촘촘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1924년부터, 김육불은 <요동문헌징략(遼東文獻徵略)>의 창작에 착수한다. 1925년 12월 그는 <요동문헌정략>을 탈고한 후, <요동문징(遼東文徵)>이라는 책을 편찬한다. 1927년, 그는 <동북문헌영습(東北文獻零拾)>의 창작에 착후하여 1935년 정식 종료한다.
1928년이후 동북의 정세는 상대적으로 안정된다. 그는 전문학술성격의 '동북연구'단체를 만드는데 착수했고, 국내에 동북인문역사지리연구의 붐을 일으키고자 했다.
1929년 12월, <동북학사규약>이 통과되고, 동북학사의 초기형태가 기본적으로 확정된다. 1930년 1월 1일, 학사회원들은 김육불, 변종맹(卞宗孟), 왕영상(王永祥)을 간사로 추대한다. 이렇게 하여 "동북문화를 발양하고, 학술연구를 창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동북학사가 정식으로 성립된다.
학사는 성교육청 편역처를 고정모임장소로 삼았다. 안정적인 경비조달이 이루어지고, 매주 요녕성립도서관에서 정기모임을 1회씩 지고, 강연,토론했다. 그리고 회원의 여행도 조직하여 "교외로 나가서 모이고, 명승지를 탐방하는 것을 분기별로 1회씩 했다."
학사는 교육청 편역처출판의 간행물 <동북총수(東北叢銹, 월간)>를 발행하여, 학자들의 세미나, 학술성과발표의 주요 플랫폼이 되었다.
<총수>에는 통론, 학술, 전저(專著), 문원(文苑), 첨재(僉宰), 기사(記事), 통신, 서평, 별록, 삽도(揷圖)등의 난이 있었고, 대량의 동북사연구논저를 실었다. 내옹이 풍부하여, 민족사, 역사지리학, 학술사 및 지방문헌정리와 연구등 분야에까지 미쳤고, 많은 성과를 거둔다.
한가지 언급할 것은 <총서>에는 일본학자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이 편찬한 동북사학 저작인 <만주발달사(滿州發達史)>도 실었다는 것이다.
책에서 이나바 이와기치는 '만주'라는 말로 '동북'을 칭했고, '중국인'을 '산해관내에 거주하는 한족인들'로 정의했다. 그리고 동북지역내의 한족들을 '외래이민'으로 표현했다.
그는 책에서 대담하게 주장했다: "중국인이 만주로 온 것은 비록 그 토지를 점유했더라도 그 범위는 요하유역의 일부지역에 불과하고, 그곳의 변방군 하나를 설치하는데 그쳤다." 이어서 "만주와 몽골은 분리불가능하다" "조선과 만주,몽골도 분리불가능하다"는 이론을 펼친다. 심지어, "일본이 만주를 경영하는 것은 중국인들의 행복을 전혀 줄이거나 감소시키지 않는 등 행복의 근본이고, 우리가 지배 건설하는 기초를 포용하고 있다"는 등 악의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왜 <총수>는 이런 악의적인 저술을 실었을까? 이에 대하여 김육불은 이렇게 말한다: "이나바가 쓴 책은 비록 의도가 다르지만, 그 자료가 아주 많이 쓰인 것은 취할 점이 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데, 왜 버리겠는가? 나는 이 책을 주로 번역했는데, 그들의 장점으로 우리의 단점을 보완하려는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점은 근대중국의 '만몽연구"는 일본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큰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동양사학자 와다 기요시(和田淸, 1890-1963)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일본의 만몽연구는 항상 앞서가는 지위에 있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박사의 <동양학보>도 김육불씨의 <동북총간>보다 20여년 앞섰다."
더욱 유감스러운 점이라면 9.18사변이 발발한 후, 동북학사는 해산했다는 것이다. 겨우 1년 8개월여간 존속했을 뿐이다.
(3) 9.18사변후의 반성
실제적으로 9.18사변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다수의 중국인들이 보기에 동북은 단지 편벽되고 미개한 변방지구였다. 설사 장개석 본인이라고 하더라도, 일찌기 1932년 6월 17일의 일기에서 유사한 생각을 표현한 바 있다:
"중국의 석탄광업의 품질은 동삼성이 60%이상을 차지한다. 전국의 철광산에서 왜구의 소유권은 82%이상이다. 놀랍기 그지없다. 동북의 석탄철광이 이처럼 풍부하다. 왜구가 어찌 강제로 점유할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중정(中正, 장개석 자신의 호)은 이제서야 꿈에서 깨어났고, 연구가 늦었던 것이 한탄스럽다. 이는 대내대외정책의 실수이다."
9.18사변후, 중국의 지식계에서는 동북에 대한 인식이 중대하게 바뀐다.
먼저, 지식계에서는 과저 '동북무시'의 상황에 대해 깊이 반성한다. 예를 들어, 역사학자 풍가승(馮家昇, 1904-1970)은 비분강개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를 되돌아보면, 9.18이전에 동북사는 거의 아무도 다루지 않았다. 9.18이후에 동북이 중국의 영토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여, 임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일본인은 동북연구에 대한 실적에 근거하여, 동북을 가져갈 수 있었다. 설사 국제연맹이 학술상의 연구를 중요시 한다면, 임시로 몇권의 소책자를 냈다고 하더라도 실패할 것이다. 동북사성은 여전히 문닫아야 한다."
이와 동시에 그는 전후로 2차례에 걸쳐 <우공(반월간)>에 글을 발표하여, 국내학계에서 동북연구방면이 결실되어 있다는 것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는 <나의 동북역사지리연구계획>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학자들은 자신의 변방에 대하여 연구를 거의 하지 않는다. 청나라시대 이전에, 다른 나라와 국경분쟁이 생겨 교섭할 때,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이다. 민국이래 일단 이런 류의 문제가 발생하면 여전히 남에게 속고 있다.
예를 들어, 동북사성은 역사상, 지리상, 법률상으로 분명히 중국의 영토이다. 그런데 일본인은 영토확장의 야심을 위하여, 여려해 전부터 국제사회에 그들의 '만주몽골은 중국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아쉽게도 우리나라학자들은 아무도 일어나서 유력한 반박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동북사연구의 기존성취>라는 글에서 풍가승은 더 나아가 이렇게 지적한다:
"변강의 학문은 우리나라학자들이 지금까지 편벽되다고 보고 중시하지 않았다. 우리가 편벽되다고 보고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외국학자가 가장 열심히 노력하여 가정 풍성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들이 노력하여 연구하는 것을 보면, 정치적 배경이 있다. 일본 러시아가 동북에 대하여, 러시아는 몽골, 신강에 대하여, 영국은 신강 티벳에 대하여 프랑스는 운남, 광서에 대하여 그런 점이 뚜렷하다.
비록 각자 그 범위에서 앞다투어 개척하고 자랑하지만, 모두 그 나라의 정책에 들어가면 하나같이 침략성에 침습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변강문제를 외국인에게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그 해악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일 것이다."
다음으로, 지식계는 동북의 인문역사지리에 관하여 더욱 높은 단계의 인식과 연구를 하게 된다.
일본의 "만몽은 역사적으로 중국영토가 아니다"라는 잘못된 주장에 대해, 부사년은 한 무리의 학자들과 공동으로 짧은 시간내에 <동북사강(東北史綱)>이라는 책을 써냈다; 야노 진이치(矢野仁一, 1872-1970)가 발표한 <만몽장비중국론(滿蒙藏非中國論)>이라는 글에 반박하기 위하여 그는 '동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만주'라는 용어의 사용을 거부했다.
9.18사변이 발발한 후, 저명한 역사지리학자인 담기양(譚其驤, 1911-1992)은 자신의 연구성과를 정리하여 책으로 낸다. 제목은 <청대동삼성강리지(淸代東三省疆理誌)>이다. 서문에 그는 이렇게 썼다:
"청나라의 강리봉략(疆理封略)에서 내지는 명나라의 구제도를 답습하였고, 별로 고치지 않았다. 오직 변방은 전왕조의 판도가 마치지 못하고, 더욱 넓게 경영하며, 군부를 두고 군현을 만들었다. 그 설치연혁과 강역의 손익은 모두 기술되어 있다.
백산흑수 사이는 만주족의 발상지이다. 처음에는 봉금을 시행하여, 유조변 이외넨 기둔(旗屯)을 두고 일반백성은 거의 없었다. 이는 국가의 홍유(弘猷)이고, 민족의 위업이다. 강리를 판별하는 것은 역사를 하는 자의 급선무이다."
그 다음으로, 중국지식계의 민족각성의 자각성과 광범성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한다.
9.18사변이 발발한 후, 중국지식계는 동북의 전략적가치에 대하여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된다. 예를 들어, 지리학자 장기윤(張其昀, 1901-1985)은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동북은 우리나라변방의 최대 보고이다. 그리고 관내이민의 천부적인 농업지구이다. 동북은 정말 중국의 생명선이다."
당시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9.18사변이 중국지식인들의 인식에서 하나의 분수령으로 보았다. "9.18사변은 깊은 잠에 들어 있던 중화민족에게 심야에 울린 첫번째 닭울음이다. 그들은 점차 중국수천년의 전통문화에서 가족만 있었고 민족이 없었으며, 지역만 있었고 국가가 없던 폐단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에 비추어, 중국지식계는 "중화민족"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민족자구를 주장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현대민족국가의 건립을 주장한다. 노구교사변(盧溝橋事變)이 발발한 후, '중화민족'은 진정으로 중국인이 공동으로 인식하는 부호이자 신분의 상징이 된다. 중화민족 부호의 다중적인 의미와 중화민족구조에 대한 이성적 자각이 나타난다.
다섯째, "대청"의 "중국도전"
"신청사사서(新淸史四書)"가 세상에 나온 이후, "신청사학파(新淸史學派)"가 점차 형성된다"
소위 '신청사사서'라 함은 각각 <최후의 왕족: 청대궁정사회사> <반투명의 거울: 청대황제제도이데올로기하의 역사와 인식>, <만족과 한족: 1861-1928 만청과 초기공화국족군관계와 정치권리> <만주의 길: 팔기제도와 중화제국말기의 족군인식>이다.
그들은 만주족이 비록 한족의 땅에서 여러 세대를 살아왔고, 충분히 한족문화를 흡수했지만, 그들이 이를 통해 철저히 '동화'되었다고는 할 수 없고, 단지 '함화(涵化, accuturation)'되었다고 본다. 하물며 청나라때 중원문화도 만주족 및 내아(內亞)의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마크 엘리엇을 이렇게 말한다. "중국을 수세기간 통치한 이후 만주족은 비록 철저히 자신의 모어를 잊어버렸지만, 그들의 정복자의식과 자아인식감은 여전히 보존되었다. 그래서 대청제국은 한인문화에 동화된 왕조로 볼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논술은 반드시 여러가지 새로운 문제를 불러온다.
만주족을 진정한 "타자(他者)"로 보고, "준한인(準漢人)"으로 보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되는가? 바꾸어 말하면, 어떻게 "만주인"과 "한인"간의 관계를 정의할 것인가이다.
만일 "만인"을 "타자"로 본다면, 청나라가 몽골, 신강, 티벳과 대만등지를 정복하여 제국판도에 편입시킨 역사적 사실이 논술에서 어떻게 파천황식의 변화가 생겨야 할 것인가?
청나라황제와 전통중원왕조의 황제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구조적차이"를 변증법적으로 대할 수 있을까?
현재의 중국학자들에 있어서, 이상의 문제를 둘러싼 대답은 확실히 어렵고 부득이 직면해야하는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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