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양주십일(揚州十日)": 청군은 정말 80만명을 도살했는가?

중은우시 2024. 10. 4. 12:20

글: 초하간오락(初夏侃娛樂)

1645년 5월, 청군이 양주성(揚州城)을 함락하고, 대도살을 진행한다. 일본에 전해지는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에 따르면, "분시부(焚屍簿)에 기록된 사람을 조사하니 모두 팔십여만이다. 우물에 빠트리거나 강물에 몸을 던지거나, 문을 걸어닫고 목을 매고 불지른 사람은 포함하지 않았고, 포로로 잡혀간 사람도 포함하지 않았다." 그 뜻은 단순히 발견된 시체만 팔십여만이라는 것이다.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 죽거나, 포로로 잡혀간 사람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숫자는 청나라말기에 많은 반청인사들에 의하여 선전되었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양주십일"은 확실히 있었다. 그러나 숫자는 믿을만한 것일까?

  1. 양주에 80만인구가 있었을까?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양주부(揚州府)의 인구가 가장 많았을 때는 만력6년(1578년)이고, 그때의 호구와 인구상황은 "호(戶) 일십사만칠천이백일십육, 구(口) 팔십일만칠천팔백오십육"이다. 즉 양주부는 817,856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의 양주부는 양주성(揚州城)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다. 양주성을 관할하는 외에 고우주(高郵州), 태주(泰州), 통주(通州)와 강도(江都), 감천(甘泉), 의정(儀征), 흥화(興化), 동대(東臺), 보응(寶應)의 6개 현을 포함한다. 합하여 "삼주육현(三州六縣)으로 부른다. 그리고 양주에는 향촌과 도시가 있다. 확실히 당시 양주의 인구가 모두 양주성에 거주했을 리는 없다. 그러므로, 양주성의 인구는 80만이 될 수가 없다.

신중국건립초기 양주성의 면적은 5평방킬로미터였고, 명나라말기에는 겨우 3.9평방킬로미터였다. 당시의 양주성은 이미 당, 송시대의 양주의 번화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에 이류도시였다. 그러므로 도시의 규모가 비교적 작았다. 80만인구가 5평방킬로미터의 범위내에 모두 살았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더더구나 3.9평방킬로미터내에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90년대에 이르러 중국최대도시인 상해의 노만구(盧灣區)가 비로소 그 정도의 인구밀도를 가지게 된다. 수백년전의 양주가 그런 인구밀도를 가질 수는 없다. 양주는 남명(南明)의 방여중심도시중 하나였다. 청군이 남하할 때, 현지의 백성과 관료들은 이미 사방으로 도망쳤다. 이들이 도망친 후에 양주성에는 사람이 별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남방의 다른 도시의 인구를 참고해볼 수 있다. 남경은 당시 남방의 최대도시였다. 무한대학 역사문화학원의 논문 <명나라때 남경의 인구변화시탐>을 보면, 명나라후기 남경성의 인구는 겨우 40만가량이었다.

2. <양주십일기>는 위서인가?

청나라때 확실히 <양주십일> 혹은 <양주십일록(揚州十日錄)>같은 류의 서적이 있었고, 금서로 분류되었다. 작자는 무명씨(無名氏)이다. 이 책은 건륭년간에 금서로 지정되어 불태워진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양주십일기>의 작자는 왕수초(王秀楚)이고,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도광(道光)연간의 <형타일사(荊駝逸史)>라는 책이다. <형타일사>는 "진호일사(陳湖逸士)"가 편집한 야사집(野史集)인데, 이 책에는 <양주십일기>를 기록한 외에 <가정도성기(嘉定屠城記)>등도 있었다. 이 책은 태평천국운동기간에도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청나라말기 중국유학생이 일본 도쿄와 오사카의 도서관에서 발견한다. 그후 혁명군이 이용했고, 반청선전의 도구가 되었다.

청나라말기, 반청의 필요에 따라, 당시의 사람들은 이 책의 진실성을 의심치 않았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냉정을 되찾고, 자세히 이 책을 검토해보면서 약간 이상한 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메이지유신이후, 일본은 만주족과 한족의 관계를 이간질하는데 극력 노력하면서, 이를 통해 중국을 와해시키고자 했다. 그중 유명한 것은 나이토 고난(內藤湖南)이 제기한 "명나라가 망한 이후 중화는 없다"는 것이다. 청일전쟁기간동안 일본의 정보기관요원이 <고십팔성한인호걸서(告十八省漢人豪傑書)>를 발표하고, 이때 <양주십일기>가 돌연 도쿄의 도서관에서 '발견'된다. 이를 보면 조작되었을 혐의를 벗어나기 힘들다.

이 책은 출현에 아주 큰 특색이 있을 뿐아니라, 과거의 '무명씨'가 '강도인 왕수초'로 바뀌었다. 그리고 자칭 '양주십일'의 목격자이며 생존자라고 주장한다. 그중의 내용도 모순되는 면이 많다. 이 책에 기록된 양주의 지명은 잘못 적힌 경우가 수두룩하다. 양주의 학자 주지박(朱志泊)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 '왕수초'는 양주 사람이 아닐 뿐아니라, 양주에 와 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사가법(史可法) 한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혀 역사의 기록이 없다. 그리고 <양주십일기>의 첫문구는 "기유년 여름 사월 십사일, 독진 사가법이 백양사(白洋河)를 잃고 황급히 양주로 달려왔다." 그러나 응연길(應延吉)의 <청린설(靑磷屑)>의 기록에 따르면, 백양하를 점령당한 것은 전해의 십일월 초칠일로, 시간이 반년이나 차이난다.

그외에 청군이 입관(入關, 산해관을 들어와 북경을 점령하는 것)할 때, 당시의 고위관료들은 모두 한어(漢語)를 못했다. 그리고 장군과 일반 병사들은 더더욱 한어를 몰랐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왕수초가 청군간에 말하는 것을 알아듣고, 청군과 아무런 장애없이 대화하는 내용까지 나온다.

또 어떤 학자는 이 책의 언어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명나라말기 사람의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오히려 청나라말기의 사람 혹은 일본인이 말하는 스타일이었다. 글에서는 또 하나의 헛점이 드러나는데, 글에는 청군이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나온다: "우리들이 고려(高麗)를 정복할 때, 부녀 수만명을 노획했다."

먼저, 청나라말기의 중국인은 당시의 조선을 명확히 '조선'으로 불렀다. 오직 일본에서만 계속하여 '고려'라고 불렀다. 글에는 '부녀 수만명을 노획했다'고 적었는데, 청나라문헌에도 그런 기록이 없고, 조선의 사서에도 그런 기록이 없다.

다시 비교적 큰 모순점을 살펴보자. 글에는 청군이 대규모로 80만명을 도살한 후, 다시 양주성이 사람들에게 구제식량을 나눠주었는데 수천담(數千擔)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양식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식량은 금방 동이 났다"고 했다. 식량을 차지하려 싸울 때 사람들은 '친척이나 친구도 가리지 않았다.' 이를 보면 양주성에 살아남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만일 정말 대규모도살이 일어났다면, 성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다면 이 소식은 아마도 금방 널리 퍼졌을 것이고 대강남북에서 모두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국각(國傕)>등 사서에 이 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3. 청군이 입관할 때의 정책과 도살간에는 모순이 있다.

청군이 입관한 목적은 과거의 소수민족처럼 약탈, 노략이 아니었다. 오히려 천하를 쟁취하려는 것이었다. 도르곤은 청군에게 추호도 범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다. 1644년 도르곤은 장수들과 이렇게 맹약한다: "지금 산해관을 들어가 정벌하는데, 무고한 자를 죽이지 말고, 재물을 약탈하지 말고, 거주지를 불지르지 말라.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를 죄를 묻겠다." 그러므로, 청군은 북경에서 현지백성과 관료들로부터 환영받는다. 청군이 남명의 홍광정권을 정벌할 때, 대도살을 실행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양주십일기>의 설명으로는 당시 시가전이 잔혹하여, 청군의 사상자가 참중했기 때문에 분노하여 도살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실제로 양주의 시가전은 단지 하루뿐이었고, 청군에 있어서 매우 순조롭게 해결된 것이다.

다음으로, 당대학자의 추산에 따르면, 당시 청군이 입관한 총인원수는 개략 20만명이다. 그중 6만명이상이 북경에 주둔해 있었다. 조선사신이 조선국왕에게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아문의 이야기를 들은 바에 의하면, 십만의 병사들이 남아 있다.' 즉 남은 부대는 이자성과 장헌충등의 세력을 상대해야 했고, 하북, 산동, 하남, 산서, 섬서등지에 주둔해야 했다. 남하하여 홍광정권을 공격한 병사는 3만가량이었다. 청군이 왜 양주를 포위하고도 공격하지 않았을까? 원인은 바로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3만명이 양주에서 10일동안 80만명을 도살하려면, 현대화된 무기가 없이는 실현하기 어렵다. 도살을 실행하면 수십만명이 죽어라 저항할텐데, 3만명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양주는 사월 이십오일 함락된다. 청군은 오월 초오일부터 강북을 점령한 후 남경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 오월초팔일에 정식으로 강남의 진강(鎭江)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양주십일>의 기록에 따르면, 오월 초이틀, 도살활동이 정지되었고, 시신을 처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80만의 시신을 처리하는 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단기간내에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전염병이 돌았을 것이다. 그러나 양주대도살은 실물증거가 없다. 80만구의 시신을 묻었다면 반드시 매장지가 있지 않겠는가. 전국시대 백기가 조나라의 40만군대를 갱살한 건은 영록1호전국시골갱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양주성의 80만구의 유골유적지가 나오지 않으면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고의로 이 시기의 역사를 부정하기 위함이 아니다. 반대로 역사를 명확히 하기 위함이다. 청나라가 입관할 때, 강남일대에서 몇 차례의 도살이 있었다. 다만 수량은 <양주십일기>에 기록한 것처럼 그렇게 과장되지 않다. 중국고대역사상, 매번 왕조교체가 있을 때면, 도살행위가 있었다. 예를 들어, 백기, 항우, 상우춘, 장헌충같은 류이다. 소수는 아니었다.

예전에 청나라의 도살사건을 극력 선전하던 것은 청나라조정을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고, 오족공화에서 56개민족이 일가족이라고 하고 있다. 민족단결이야말로 시대의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