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기사석금(記史惜今)
여진족은 중국역사상 위대한 민족이다. 일찌기 두번이나 중원으로 들어와 정권을 잡고, 금(金), 청(淸) 두 왕조를 건립한다. 오랫동안, 여진족은 부락들이 난립하는 상태였다. 일단 여진부락이 통일되면, 아주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1583년, 누르하치가 거병한 이후, 홍타이시(皇太極, 청태종)이 여진부락을 철저히 정복할 때까지, 후금은 반세기를 들여 마침내 통일을 완성한 것이다. 이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1. 건주여진(建州女眞) 각부의 통일
명나라후기 여진은 건주여진, 해서여진(海西女眞)과 야인여진(野人女眞)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먼저 건주여진부터 얘기해보자. 건주여진의 기원은 흑룡강 오국성(五國城)일대로 금(金)나라의 핵심지역이다. 명나라초기 도문강(圖們江), 수분하(綏芬河) 일대로 이주하고, 마지막으로 다시 혼하(渾河) 상류의 소자하(蘇子河) 유역으로 이주했다. 거기에서 5개의 부락으로 융합발전한다. 각각 소극소호하부(蘇克素護河部), 철진부(哲陳部), 완안부(完顔部), 혼하(渾河部), 동어부(董鄂部)이다.
누르하치가족은 소극소호하부에 속했다. 이 부족은 주로 도륜(圖倫), 살이호(薩爾滸), 계범(界凡), 마이돈(馬爾敦), 안도과이가(安圖瓜爾佳), 조가(兆佳), 찰객(扎喀), 혁제격(赫濟格), 고륵(古勒), 사제(沙濟), 가목호(嘉木湖), 첨하(沾河)등의 채(寨)가 있었다. 누르하치가족은 혁도아랍(赫圖阿拉, 허투아라)에 있었고, 명나라에서 책봉한 건주좌위(建州左衛)이다. 누르하치의 조부는 각창안(覺昌安), 부친은 탑극세(塔克世)이다; 누르하치의 외할아버지는 고륵부의 왕고(王杲)이며, 명나라에서 건주우위(建州右衛)로 책봉했다. 누르하치는 어렸을 때, 부친 탑극세에게 버림받아 할 수 없이 외조부인 왕고와 고륵채에서 생활한다.
1574년, 이성량(李成梁)이 명군을 이끌고 고륵채를 함락시키고, 왕고는 피살당한다. 누르하치 형제는 포로로 잡혀, 인욕부중하며 이성량을 따른다. 누르하치가 성년이 된 후, 건주부락으로 돌아온다. 1583년, 명군은 도륜채의 니감외란(尼堪外蘭)과 합세하여 다시 고륵채를 함락시키고, 왕고의 아들 아태(阿台)를 죽인다. 그러나, 투항을 권유하러온 각창안과 탑극세까지 잘못하여 죽이게 된다. 그후 명나라는 니감외란이 만주의 주인이 되도록 도와준다.
누르하치는 이성량을 찾아가서 따진다. 이성량은 자신이 잘못 처형했다는 것을 알아서 미안한 생각에 누르하치를 건주위의 도독(都督)으로 앉힌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와는 싸우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분노의 화살을 니감외란에게 돌린다. 1583년, 그는 13벌의 갑옷을 찾아내어, 백여명을 모아 도륜채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니감외란이 도주하게 만든다.
그러나, 건주여진의 각부는 여전히 니감외란의 명령을 듣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하여 누르하치를 공격했고, 계속하여 누르하치를 암살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누르하치는 반드시 건주여진을 통일시켜야 했다. 1584년, 누르하치는 '눈내리는 밤에 이대(李岱)를 찾아가고' 조가채를 차지한다. 육월, 누르하치는 다시 400명을 이끌고 험준한 마이돈채를 함락시켜, 매부의 원한을 갚는다. 이 몇번의 전투를 거쳐 누르하치는 소극소호하부를 통일한다.
1584년 구월, 누르하치는 500명을 이끌고 동악부의 제길답채(齊吉答寨)를 함락시킨다; 1585년, 누르하치는 계범, 살이호, 동가(東佳), 파이달(巴爾達) 4개 산채의 연합군을 격퇴시킨다. 그해 칠월, 누르하치는 혼하부의 아이혼성(鵝爾渾城)으로 진격하여 니감외란을 추격하여 요동의 변장(邊墻)에서 그를 죽여 복수를 완성한다. 1587년 7월, 누르하치는 철진부를 정복한다; 1587년 8월, 누르하치는 액이도(額爾都)를 보내 혼하부를 점령한다. 1588년 9월, 누르하치는 완안부를 점령한다.
1583년부터 1588년 건주여진의 각부를 통일하기까지, 누르하치는 5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 5년의 시간동안, 누르하치는 명나라와는 평화를 유지한다. 그리고 명나라와는 조공무역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킨다. 이 기간에 해서여진은 더욱 강성해지고, 명나라에 대한 위협이 더욱 컸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이성량은 누르하치를 도와서 힘을 길러줌으로써 해서여진을 견제하려 했던 것이다.
확실히, 건주여진은 소부락에 불과했다. 명나라에 그다지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누르하치가 건주를 통일했지만, 그저 산채간의 합병전쟁일 뿐이었다. 1588년에 이르러서도, 누르하치의 병력은 1000명에 불과했다. 해서여진은 1개의 부락만 하더라도 2000명 내지 1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각도에서 생각하여, 이성량은 건주여진을 키워서 해서여진을 견제하려고 생각한 것이고, 큰 문제가 있는 결정은 아니었다.
2. 해서여진을 정복하다.
해서여진은 송화강(松花江)유역에 거주한다. '해서'라는 명칭은 '해서강(海西江)'에서 나왔는데, 바로 송화강을 가리킨다. 원나라때 요동해서도제형안찰사(遼東海西道提刑按察使)를 둔 바 있다. 명나라때 해서여진은 새롭게 조합되면서 오랍(烏拉), 합달(哈達), 휘발(輝發), 엽혁(葉赫)의 네개 부를 형성한다. 이를 호륜사부(扈倫四部)라고도 부른다. 명나라후기, 해서여진은 점차 강력한 부락연맹을 형성하여, 요동에 대한 위협이 날로 강해진다.
명나라중기, 해서여진중에서 합달부를 극력 도와주면서, 다른 부락들을 상대하게 했다. 그러나, 합달부의 왕태(王台)가 죽은 후 내란에 빠진다. 그후 엽혁부가 굴기한다. 엽혁부는 자주 몽골과 연합하여 요동을 침범하여, 동북의 국면을 위협하게 된다. 1583년, 이성량은 군대를 출동시켜 엽혁부를 치고, 추장을 죽인다. 그러나 명나라군대가 철수하자마자, 엽혁부는 다시 합달부를 공격하여 해서여진의 우두머리가 된다.
엽혁부가 해서여진의 맹주가 된 후, 다시 건주여진을 병합하고자 한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을 통일시킨 후, 다시 동쪽의 장백산여진(長白山女眞)과 전쟁을 일으킨다. 1591년, 누르하치는 장백산여진의 압록강부(鴨綠江部)를 멸망시킨다. 엽혁부가 어찌 이를 좌시할 수 있겠는가? 누르하치가 압록강부에 승리를 거둔 후, 엽혁부는 호륜사부를 모집하여, 장백산여진의 납은부(納殷部), 주사리부(朱舍里部), 몽골의 과이심(科爾沁), 석백(錫伯), 과이찰(瓜爾察)까지 모두 9개부 3만명의 병력으로 건주와 전쟁을 일으킨다. 누르하치는 고륵산을 지키면서 적을 유인하여 4천여명을 섬멸한다.
고륵산전투이후, 누르하치와 해서여진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된다. 이때 건주여진은 일부 병력을 빼서 계속하여 장백산여진을 병합한다. 1591년 9월, 납은부가 누르하치에 복속한다. 12월, 주사리부가 병합된다. 이때부터 장백산여진은 건주여진에 병합되게 되고, 건주여진의 일부가 된다. 또한 건주여진의 면적을 배나 확장시켰다. 당연히 건주여진의 총면적은 여전히 작았다.
엽혁부는 비록 패주가 되었지만, 해서의 각부는 그에게 마음으로부터 복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주 누르하치와 결맹을 맺었고, 이는 누르하치가 해서여진내에서 세력을 확장하는데 도움이 된다. 1599년, 누르하치는 출병하여 합달부를 도와 엽혁부와 싸운다. 그러나 합달부는 입장을 확실하게 정하지 못하고 왔다갔다한다. 1601년, 누르하치는 1000명을 보내어 합달부를 병합한다. 1607년, 휘발부에 내란이 일어나, 추장 배음달리(拜音達理)가 누르하치에게 병력을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배음달리도 합달부와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 그는 엽혁부와 건주부의 사이에서 입장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오가게 된다. 그리하여 누르하치는 이를 핑계로 삼아 천명의 병력을 출병시켜 휘발부를 멸망시킨다.
오랍은 해서여진중 면적이 가장 넓고, 인구도 가장 많았다. 바로 누르하치가 회유하려는 대상이었고 양국이 동맹으로 맺어진다. 다만, 오랍부는 건주부가 계속 강해지자 기회를 틈타 건주부를 공격한다. 1607년, 동해여진 와이객부(瓦爾喀部)의 비유성주(蜚悠城主)가 건주부에 귀부하러 오자 누르하치는 3천명을 보내 맞이한다. 오랍부는 1만명을 보내어 이를 막는다. 그리하여 쌍방간에 오갈암대전(烏碣巖大戰)이 벌어지고, 오랍부가 참패한다. 이때부터 오랍부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한다. 다음 해, 누르하치는 5천의 군사로 오랍부를 공격하고, 감산성(憨山城)을 함락시킨다. 1612년, 누르하치는 다시 송화강에서 오랍군을 대파한다. 1613년 누르하치는 오랍의 3만군대를 궤멸시키고 이렇게 오랍부는 멸망한다.
오랍이 멸망한 후, 건주부는 이미 아주 강성해진다. 군대규모는 만명을 넘었다. 누르하치는 이를 기초로 각부의 인원을 편제하여 팔기제도를 건립한다. 이렇게 하여 여진족의 전투력이 충분히 발산되도록 한다. 그후 누르하치는 통일의 창끝을 엽혁부로 돌린다. 다만 명나라는 이미 건주부가 너무 강성해졌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고, 엽혁부를 도와주어 건주부를 견제하고자 했다. 이렇게 하여, 누르하치와 명나라는 대립관계로 들어선다.
1616년, 누르하치는 정직으로 칸(汗)을 칭한다. 수도는 협도아랍(허투아라)로 정하고, 금나라를 다시 재건한다. 역사상 '후금'으로 불린다. 그후 그는 요동의 무순(撫順), 청하(淸河)를 공격하여, 명나라의 요동방어선을 무너뜨린다. 1619년 명나라는 10만대군을 모아서, 엽혁부와 조선과 연합하여 후금에 대하여 결전을 벌인다. 그 결과 명나라군대는 천시, 지리, 인화에서 모두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누르하치에 의해 각개격파된다. 명나라대군은 전멸한다. 이것이 살이호대전이고, 명청간의 전쟁에서의 전환점이 된다. 전쟁후 얼마 지나지 않아, 누르하치는 엽혁부를 함락시키고 철저히 해서여진을 병합한다.
3. 야인여진통일
야인여진은 흑룡강유역에서 생활하는 상대적으로 낙후한 여진족이다. 송화강, 흑룡강이동의 동해여진은 주로 악집부(渥集部), 와이객부, 고이객부(庫爾喀部)로 구성된다. 소흥안령남북에 사는 흑룡강여진은 주로 살합련부(薩哈連部), 호이합부(虎爾哈部), 사견부(使犬部), 사록부(使鹿部), 색륜부(索倫部)등의로 구성된다.
실제로 동해여진과 건주여진은 같은 갈래에서 나뉘어진 것이다. 원말명초, 목단강일대의 호리개(胡里改), 알타련(斡朵憐), 탁온(托溫)의 삼부(三部)가 남으로 이주하여 수분하유역으로 간다. 명나라는 건주라고 책봉한다. 얼마 후, 건주여진중 혼하유역으로 이주한 부락은 '만주오부(滿州五部)'를 형성하고, 수문하일대에 남은 여진은 동해여진으로 불린다. 조선이 북으로 확장하면서, 도문강남안의 여진족은 이미 영락제때 조선에 흡수되었고, 도문강북안의 여진도 조선에 의부(依附)할 수밖에 없었다.
1596년, 누르하치는 비영동(費英東)을 파견하여 1천명을 이끌고 와이각부와 싸워, 갈가로(噶嘉路)를 함락시킨다. 이렇게 동해여진에 대한 정복전쟁이 막을 연다. 누르하치는 동해여진에 대하여 여러 차례 병력을 동원한다. 누르하치 후기에, 후금은 이미 송화강, 흑룡강이동의 동해여진부락을 기본적으로 정복한다. 나중에 청나라는 동해여진지역에 길림장군부(吉林將軍府)를 설치한다.
홍타이시가 즉위한 후, 흑룡강북부의 여진에 대하여 병력을 동원한다. 1634년, 홍타이시는 호이합부를 정복한다; 1639년 홍타이시는 색륜부에 대한 전쟁을 개시한다. 색륜부는 흑룡강북부여진이고, 달알이(達斡爾), 악륜춘(鄂倫春), 악온극(鄂溫克)족의 총칭이다. 이들은 용맹한 것으로 유명했다. 홍타이시는 두차례에 걸쳐 군대를 파견하여 색륜을 공격하여 흑룡강유역을 기본적으로 청나라의 판도내로 끌어들인다. 나중에 청나라는 이곳에 흑룡강장군부(黑龍江將軍府)를 설치한다.
1643년, 홍타이시는 "동북해변(오오츠크해)부터 서북해변(바이칼호)까지, 그 사이의 사견, 사록의 나라, 그리고 흑호(黑狐, 검은 여우), 흑초(黑貂, 검은 담비)가 나는 땅, 농사를 짓지 않고 사냥으로 살아가는 풍습을 지닌 액로특부락(厄魯特), 그리고 알난하(斡難河)의 각 나라는 모두 복속시켰다." 이를 보면, 바이칼호에서 흑룡강성입구까지의 광대한 지역이 이미 청나라의 판도내로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1583년부터 1639년까지, 누르하치와 홍타이시 두 제왕은 전후로 50여년의 시간을 들여 여진족에 대한 철저한 통일을 완성한다. 이 50년의 기간동안, 두 제왕은 요동반도를 차지하고, 조선과 막남몽골을 정복하여, 동북의 통일을 완성하고, 청나라의 입관(入關, 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들어가는 것)의 기초를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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