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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미얀마는 왜 망명한 남명(南明) 영력제(永歷帝)를 받아주었다가 2년후 청나라에 넘겨주었을까?

by 중은우시 2022. 7. 18.

글: 자귤(紫橘)

 

남명의 영력제가 멸망한 가장 관건은 바로 미얀마의 배신이었다. 주수지난(咒水之難)을 일으켜 영력제를 수행하던 신하들이 모조리 피살당하고, 영력제도 생포된다. 곧이어 오삼계(吳三桂)에게 넘겨져서 죽임을 당한다. 이정국(李定國)은 그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같은 달에 병사하고 만다. 대명은 철저히 부흥의 기회를 잃었다. 

 

그렇다면, 미얀마는 왜 영력제를 받아주었다가 다시 그를 팔아먹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청군이 미얀마로 다가오면서 영력제를 내놓으라고 핍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후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고 자부했던 건륭제마저도 미얀마를 공격하여 격패시키지 못했던 것을 보면 미얀마군은 환경적인 우세를 이용하면 청군을 이기지 못한다고 할 수 없었다. 영력제를 돌려보낸 것은 완전히 미얀마측의 자주적인 결정이다. 그리고 이 미얀마의 결정을 촉진한 것은 다름아닌 이정국이었다.

 

1659년, 청군이 대거 운남성으로 진격한다. 이정국은 막아낼 힘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영력제를 영창(永昌)으로 옮기고, 자신은 마반산(磨盤山)에서 청군을 막는다. 그후 영력제는 영창에서 등충(騰冲)으로 도망친다. 그래도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게 되자 영력제는 "남수(南狩)"를 결정한다. 즉 운남과 접경한 미얀마로 가는 것이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운 후, 조공체제를 재건했고,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대명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는 모두 148개였다. 이들 조공국은 모두 대명의 책봉을 받았다. 서남쪽에서 대명은 삼선육위(三宣六慰)를 책봉한다. 당시의 미얀마도 명나라의 번신(藩臣)이었다. 서남의 각 토사(土司)들과 마찬가지였다. 명나라황제가 번신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마치 서태후가 서안으로 가는 것처럼 아무런 심리적압박은 없었고, 절대로 굴거인하(屈居人下)의 느낌은 없었을 것이다. 이는 영력제가 미얀마남수를 결정한 중요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명나라와 미얀마의 관계는 기실 좋지 못했다. 쌍방은 심지어 여러번 전쟁을 일으켰다. 그런데도 미얀마국왕은 영력제 군신을 받아준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근대이전에는 명확한 영토개념이 없었다. 운남과 미얀마의 국경지대는 산지로 험준하고, 민족이 복잡하며, 토사도 많았다. 이들 토사는 대명이 강력할 때는 운남에 귀부하여, 대명의 직할지라 할 수 있지만, 대명이 약세일 때는 대명의 통제에서 벗어나 할거자립한다. 운남과 접경한 미얀마도 그런 마음이었다. 대명이 강력할 때는 가만히 있고, 선을 넘는 행동을 하지 않지만, 대명이 약화되면, 운남의 토사를 잠식하면서 지반을 확장했다. 그러므로 운남과 미얀마의 경계상황은 아주 복잡했고, 영토분쟁이 아주 심각했다.

명나라가 보기에, 중남부의 이곳은 모두 명나라가 책봉한 "삼선육위"의 영토였다. 그래서 내지의 성과 같다고 여겼다. 명나라가 세금을 징수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미얀마의 사서인 <유리궁사(琉璃宮史)>에 따르면, 1649년, 영력제가 항전을 위해 사람을 등니(登尼, 삼선육위중 木邦宣慰司, 지금의 샨 북부), 맹묘(孟卯, 麓川宣慰司, 지금의 윈난 뤼리), 경영(景永, 車里宣慰司, 지금의 윈난 시쐉반나), 경동(景棟, 孟艮御夷府, 지금의 샨 동부), 서곤(西昆, 어디인지 불명확. 위의 네 곳과 이웃한 곳일 것이다)등 5곳에 사람을 보내 세금을 거둔다. 그해 12월, 미얀마국왕은 2명의 왕제(王弟)를 보내 2로의 대군으로 명나라관리를 쫓아내게 한다. 1650년 1월, 미얀마국왕의 왕제는 맹묘에 도착한다. 명나라관리는 전투도 벌이지 못하고 떠난다. 10월 미얀마군은 시쌍반나로 향한다. 맹림(孟林, 윈난 멍롄)에서 명군과 교전을 벌이나 명군에 패퇴한다. 미얀마국왕의 왕제 흠내무야각(欽內繆耶覺)은 철수하는 도중에 병사한다. 미얀마군대는 사상자가 1/3에 이른다. 그래서 당시의 명나라와 미얀마는 관계가 아주 좋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국면하에서, 왜 미얀마는 영력제의 군신들을 받아주었을까? 이는 미얀마국왕의 천조심리(天朝心理)떄문이었다. 영력제를 자신의 번신(藩臣)으로 삼아서 미얀마를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를 꿈꾼 것이다.

 

명나라때, 미얀마는 시종 중국의 번속국으로 취급되었다. 공식적인 측면에서, 중남의 삼선육위는 운남포정사사(雲南布政使司)의 관할에 속했다. 당시의 미얀마는 오늘날의 미얀마가 아니고, 단지 중남의 여러 토사중 하나에 불과했다.

 

중국의 <면수기사(緬狩記事)>에 따르면, 1649년초, 영력제가 미얀마로 들어가기 전에 운남을 대대로 다스리던 검국공(黔國公) 목천파(沐天波)를 미얀마로 보내 교섭하게 한다. 미얀마인들은 목천파가 온 것을 보고는 "모두 말에서 내려 절했다." 정월 이십구일, 영력제 일행이 만막성(蠻莫城)에 도착한다. 현지관리 사선(思線)이 영접했다. 황제는 "금과 비단을 후하게 하사했다" 이월, 영력제는 중군도독부(中軍都督府) 도독 마웅비(馬雄飛)를 미얀마로 보내어 미얀마국왕에게 말한다. 영력제가 곧 "남수"할 것이니 미얀마국왕은 명을 받들라고. 주수지난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미얀마국왕은 그래도 영력제를 홀대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금의옥식(錦衣玉食)으로 그를 모셨다. <구야록(求野錄)>의 기재에 따르면, 영력제가 미얀마로 들어가자, 면추(緬酋, 미얀마국왕을 가리킴)는 사자를 보내어 영접했고, 하표(賀表)를 바쳤는데, "면전선위사 신(臣) 모...라 칭하고, 예의가 극히 공손했다" 황제는 이를 칭찬하며 후한 상을 내렸다.

 

중국사서의 각도에서 보면, 영력제 일행이 미얀마로 간 것은 기인리하(寄人籬下)의 정치적망명이 아니다. 황제가 경성을 떠나 내지 13성을 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미얀마의 관리들은 모두 공손했다. 중국측은 천조의 기도를 내세우며 거고임하(居高臨下)의 태도로 미얀마사람들과 교류했다. 미얀마는 영력제 일행에게 물자를 제공해주었다. 중국사서에는 이를 "진(進)" "공(貢)"이라고 적었다. 이는 충분히 보여준다. 명나라사람들의 눈에, 미얀마는 중국의 번속국인 것이다.

 

그러나, 미얀마가 보기에 중국이야말로 번속국이다. 미얀마가 영력제를 받아준 것은 바로 미얀마황제가 명나라번왕에 대해 은혜를 베푼 것이다. 앞에서 명나라와 미얀마간에 전투가 발생했었다고 말한 바 있다. 현재 미얀마는 영력제 일행을 받아들인다. 그 원인은 바로 미얀마국왕도 자신을 핵심으로 하는 천조체제를 갖추고 싶었고, 자신을 핵심으로 하여 원근에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얀마의 <유리궁사>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명나라군대의 백문선(白文選)은 미얀마에 영력제를 내놓으라고 한 적이 있으나, 미얀마군은 내주지 않았다. 이어서 명나라와 미얀마군간에 전투가 발생한다. 미얀마국왕은 내시를 영력제에 보내어 '성지를 전한다' "너의 부하가 짐의 국경에서 소란을 일으키는데 이건 무슨 뜻인가?" 그러자 영력제는 미얀마국왕에게 '상주(上奏)"하여 말하기를 "이정국, 백문선은 내가 이곳에서 칭신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것이다. 만일 이정국, 백문선이 나의 조서를 본다면 반드시 미얀마에 귀순할 것이다." <유리궁사>는 19세기에 미얀마에서 편찬한 공식 정사이다. 미얀마의 공식적인 역사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로 보면, 영력제 일행이 미얀마에 머무는 2년간, 미얀마국왕과 영력제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쌍방은 아마도 묵계를 달성했을 것이다. 모두 상대방을 번속국으로 본 것이다. 서로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쌍방 군주는 서로 만나지 않은 것이다.

 

왜 미얀마는 영력제를 받아들인 2년후, 돌연 배신하고 영력제에 독수를 쓰게 되었을까? 주수지난은 미리 음모를 꾸민 것인가, 아니면 돌발사건인가? 이것은 모두 사학계가 주목하는 부분이다.

 

먼저, 중국사서는 확실하게 이는 미얀마의 사전음모라고 말한다. 등개(鄧凱)는 병으로 영락제와 함께 주수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요행히 살아남았고, 나중에 <구야록>을 쓴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미얀마인들은 영력제 일행을 주수로 불러 맹세를 하도록 유인했고, 영력제가 주수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3천명의 미얀마병사들의 기습을 당한다. 이와 동시에, 영력제의 영지도 미얀마군의 공격을 받아, 영력제의 내시, 여관, 관리가족은 미얀마군에게 모욕당하고 속속 자결한다. 주수지난이후, 미얀마인들은 황제, 황족 25명과 영력제의 영지에서 요행히 죽지 않은 200명만 남긴다. 미얀마인이 기습하게 된 원인은 명군의 군기가 무너져서, 미얀마백성들을 괴롭혔고, 미얀마군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때문이다.

 

미얀마의 <유리궁사>는 돌발사건이라고 적었다. 주수지맹은 영력제를 신복(臣服)시키기 위해 거행한 회맹(會盟)이다. 영력제가 도착한 후, 목천파는 미얀마인들이 영력제에게 불리하게 한다고 여겨 먼저 미얀마군을 죽인다. 그리하여 미얀마측이 강렬하게 반발하게 된다. 미얀마군은 영력제측의 인원을 대거 죽인다. 그후 미얀마국왕은 관대한 흉금으로 영력제를 용서한다. 다만, 이 스토리는 너무 억지스럽다. 영력제 일행은 겨우 300명이다. 그리고 미얀마병사는 3천명이다. 주수에서 손을 쓰는 동시에 영력제의 영지도 습격을 받는다. 이는 분명히 미얀마측이 사전에 음모를 꾸민 습격이다. 습격원인에 대하여 살펴보면 아마도 미얀마인들이 이정국에 대하여 분노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력제가 미얀마로 들어간 후, 미얀마인들에게 통제를 받게 된다. 이정국은 여러번 사람을 보내어 미얀마와 교섭한다. 미얀마에게 영력제를 풀어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미얀마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후 이정국과 미얀마간에 전투가 발발한다. 이정국은 미얀마를 대파했다. 그러나, 미얀마는 영력제를 가지고 위협한다. 게다가 밀림지역의 이점으로 이정국의 군대를 막는다. 나중에 쌍방은 여러번 교전을 벌였고 갈등은 해소되지 못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결국 쌓인 원한으로 주주지난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전체적으로 봐서, 주수지난은 미얀마에서 사전에 꾸민 음모이다. 당연히 오삼계의 대군이 국경으로 밀고 들어온 것이나, 미얀마에 새 국왕이 취임하여 정책이 바뀐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주수지난은 남명에 끼친 영향이 치명적이다. 이번 습격으로 남명의 마지막 충신양장(忠臣良將)이 모조리 죽임을 당했고, 철저히 명나라부흥의 기치는 분쇄되게 된다. 그후 각지의 반청복명의 지하조직이든 대만의 정씨이건 모두 진정한 대명의 기치를 내걸지 못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실패할 운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