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만주(滿洲)" (2) : 17세기 서양인들이 본 '만주족'

중은우시 2024. 7. 22. 02:01

글: 한팔리문예지성(汗八里文藝之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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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들어선 이후, "만주굴기"와 명청왕조교체를 위시한 일련의 동아시아사건은 유럽각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런 배경하에서 중국에 와 있던 유럽선교사들은 자신의 견문을 종합하여, "만주굴기"와 관련돤 저작을 적지 않게 남겼고,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왔다.

서양인이 그린 아담샬과 순치

첫째, 만주족은 어디에서 왔는가?

17세기 이전까지 유럽선교사들의 글에 나오는 "타타르인(韃靼人)"은 주로 장성 이북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수시로 명나라변경을 침범한 몽골인을 가리켰다. 오랫동안 백산흑수(장백산, 흑룡강)에 거주해오고 있던 여진인은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의 저술에는 거의 '여진'이나 '만주'라는 글자가 나오지 않는다. 당연히 이는 그가 '오랫동안 남방지역에 거주하여 북방 소수민족과 심도있는 접촉이나 교류를 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건주여진이 굴기한 후, 일부 선교사들은 이 신흥세력을 주목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 선교사 알바로 세메도(Alvaro Semedo, 曾德昭, 1585-1657)는 <대중국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타타르는 동, 서, 북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그중 여러번 명군을 격패시킨 건주여진을 동타타르인이라고 불렀다.

다만, '동타타르원류'라는 문제를 언급할 때, 그는 모호하게 "일찌기 명태조에 의해 정복된 북쪽의 가장 가까운 국토의 여러 부족중 하나"라고 말했다.

중국학계에서는 보편적으로 가장 먼저 만주족의 원류를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이탈리아 선교사 마르티노 마르티니(Martino Martini, 衛匡國, 1614-1661)이 쓴 <타타르전기(韃靼戰記)>로 보고 있다.

"이들 북부 장성바깥에 거주하는 타타르인들은 여러 민족의 조상이다. 이들 민족은 서부타타르(몽골인)를 포함할 뿐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동부타타르(만주족)도 포함한다.

그곳의 타타르인들은 혹은 신하로서, 혹은 친구로서 매년 요동성을 거쳐 중국(명나라)으로 들어와 현지 주민들과 교역을 한다. 그들은 각종 물건을 휴대한다. 예를 들어 중국인들이 귀하게 여기는 인삼이라고 부르는 뿌리, 해리가죽(海狸皮), 담비가죽(貂皮), 검은담비가죽(黑貂皮)등 귀중한 가죽, 그리고 중국인들이 그물을 짜는데 쓰는 말갈기(馬鬃)등을 가져온다.

타타르의 인구는 신속히 증가하여, 그들은 금방 자칭 맹(盟)이라 부르는 7개 부락을 형성했고, 서로 공격하고 싸운다. 최후에는 개략 1550년에 한 나라로 병합되었고(이 기술을 잘못되었다). 여진국이라 불렀다."

순치5년(1648년) 포르투갈의 선교사 가브리엘 데 마갈량이스(Gabriel de Magalhaes, 安文思, 1609-1677)를 숙친왕(肅親王) 하오거(豪格)가 사천에서 북경까지 데리고 왔다. 그리고 마갈량이스는 북경에 정착한다. 자료에 따르면, 그는 천문학, 수학, 지리학과 기계제조원리에 정통했고, 천문의, 지구의와 해시계, 자명종등 서양기물을 잘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청나라 군신들에게 중시된다.

한가지 언급할 것은 그는 북경에서 <중국신사>라는 책을 저술하여, 명말청초의 사회상황, 특히 중국사회의 예의풍속, 도시특징, 관료귀족체계 및 황성건축등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할 뿐아니라 '동타타르인'의 민족원류문제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계획은 완성되지 못한다. 그 본인이 병으로 강희16년(1677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마갈량이스이후에, 비교적 심도있게 만주족기원문제를 연구한 유럽인은 청나라조정에서 중용된 독일선교사 아담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통상 줄여서 Adam Schall이라 함, 湯若望, 1591-1666)이다. 그는 강희4년(1665년), 서신에서 만주족기원의 "주과발상(朱果發祥)"신화를 상세히 묘사했다.

강희27년(1688년), <중국신사> 프랑스판 번역자이자 정리자인 클로드 보노는 말미의 주석에 아담샬의 이 전설을 전재했다:

실제로, 청태종 숭덕원년(1636년)에 편찬된 <청태조무황제실록>에 이 전설이 기재되어 있다. 그외에 <만주실록> 및 <만주원류고>등 관방사서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아담 샬의 이 기록은 지금까지 유럽사회에 이 중국전설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아담샬

삼번(三藩)의 난이 평정된 후, 나라의 국면은 날로 안정되어갔다. 이런 배경하에, 청나라조정에서 후대받는 유럽선교사들은 동북지구로 가서 시찰하고 여행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강희21년(1682년) 삼월, 벨기에 선교사 페르디난드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南懷仁, 1623-1688)는 강희제 일행을 따라 "그의 조부의 탄생지이자 고향인 요동지방"을 여행한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강희제가 요동으로 간 목적은 "조상의 능침을 순방하고, 관례에 따라 참배의 예를 행하며, 동시에 직접 통치하의 동부타타르 즉 여진의 변방지역을 순시하는 것"이었다. 페르디난드 페르비스트의 추측에 따르면, "장백산 산록 혹은 그 지맥이 아마도 동타타르인 조상의 탄생지일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황제는 강변에 도착하면 즉시 말에서 내려 남쪽의 산을 향해 산과 조상에 제사를 지내며, 머리를 세 번 조아렸다."

선교사 장 프랑소와즈 제르비용(Jean-Francois Gerbilon, 張誠, 1654-1707)에 따르면, 만주족은 아마도 "요동의 북쪽, 중국의 가장 동쪽의 지방에 거주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활동범위는 남에서 북으로 북위41도에서 53도이다. 서에서 동으로는 개략 동경104도에서 동쪽바다까지이다. 북으로는 큰강을 경계로 하는데 러시아인은 이 강을 아무르강 혹은 '아이(愛)'라고 하고, 중국인은 흑룡강이라고 하며 만주어로는 사하롄우라라고 한다. 남으로는 요동성과 고려를 경계로 한다. 동으로는 큰 바다에 면하고, 서로는 몽골과 경계하고 있다.

겨울이 오면, 그들은 송화강에서 흑룡강의 양안 대삼림으로 가서 검은담비를 사냥한다. 여름이 오면, 그들은 자신의 거주지로 돌아와 여름을 보낸다. 주로 거주지는 영고탑(寧古塔) 부근이다."

또 다른 프랑스 선교사 조아셍 부베(Joachim Bouvet, 白晋, 1656-1730)의 견해도 제르비용과 거의 일치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만주는 타타르동부에서 발상했다. 최초에 중국동부의 요동지구에 건국했고, 금세기 중엽 현재 통치하는 광대한 강역을 정복했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이들 선교사들은 동북지구의 현지를 심도있게 고찰하여, 유럽학계에서 동북지구의 인문역사지리에 관해서 더욱 직관적이고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다.

둘째, 만주족의 생활습관

만주족의 인종특성에 관하여 마르티노 마르티니는 <타타르전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그들은 얼굴이 청수(淸秀)하다. 중국인(한족)의 얼굴처럼 넓고 피부는 백색이다. 코는 중국인들처럼 납작하지 않고,눈도 그렇게 작지 않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조용히 말을 탄다. 그들의 다른 습관은 우리 유럽의 타타르인들과 유사하다. 그러나 거칠지는 않다. 그들은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중국인들 처럼 엄숙하고 냉혹하고 생경해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훨씬 인정미가 있다."

만주족의 복식을 언급할 때, 마르티노 마르티니는 이렇게 썼다:

"타타르인들은 머리카락과 구렛나룻을 다 밀고, 오직 수염만 남겨서 길게 기른다. 그리고 머리 뒤에 변발을 정성스럽게 땋아서 자연스럽게 어깨 아래로 늘어뜨린다.

그들은 등글과 얕은 모자를 쓰는데, 세손가락 너비에 진귀한 해리피 혹은 검은담비가죽으로 주변을 장식하며, 귓부근, 귀 그리고 이마가 추위와 바람을 견디도록 한다. 가죽위는 귀중한 붉은비단으로 감싸거나 혹은 검은색 자색의 말갈기가 있다. 그 색깔과 모양은 아주 특이하다. 그러나 장식을 적저하게 해서 모자는 넓고 예쁘다.

그들이 입는 옷은 발 위까지 덮이는 장포이고, 소매는 중국인들처럼 넓지않다. 마치 폴란드나 헝가리의 복장과 비슷하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면, 그들의 소매는 말발굽처럼 생겼다. 그들의 허리띠의 양쪽에는 손수건을 달아서 손과 얼굴을 닦는데 쓴다.

그들은 칼 한자루를 걸어서 불시의 필요에 대응한다. 그리고 두 개의 주머니가 있는데 담배 혹은 다른 용품을 넣어둔다. 왼쪽에는 요도(腰刀)를 차는데, 칼끝이 앞을 향하고, 칼손잡이가 뒤를 향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싸울 때 오른손으로 뒤에서 칼을 뽑는다. 다른 한 손으로 칼집을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신발을 잘 신지 않는다. 장화에는 박차가 없다. 장화는 비단이나 말가죽으로 정교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들은 왕왕 아주 예쁜 나무신발을 신는데, 손가락 세 개 높이이다. 그들이 마를 탈 때 사용하는 등자(馬鐙)나 마구는 우리 것보다 낮다. 그러나 비교적 넓다."

만주인의 수렵전통에 대하여 마르티노 마르티니는이렇게 썼다:

"타타르인의 행동이 빠른 것은 신기할 것도 없다. 그들은 몸에 무거운 것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그리고 무슨 양초(糧草)도 없다. 그들은 뭐든지 찾으면 그것을 먹는다. 그러나 그들이 자주 먹는 것은 아마도 제대로 익히거나, 제대로 굽지 않은 육식일 것이다. 만일 그들에게 먹을 것이 없으면 그들은 말이나 낙타를 먹는다.

그들은 시간이 있으면 야수를 사냥한다. 사냥용의 개와 매를 데리고 간다. 산 하나 혹은 평지 한 곳을 포위한다. 그들은 겉옷을 땅바닥에 깔아서 침대로 삼는다. 그들은 집이나 주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의 부득이하게 집에 거주할 때는 그들의 말도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벽에 여러 개의 구멍을 뚫어 놓는다.

그들의 장봉(帳篷)은 아주 아름답다. 설치하고 운반하는 것이 숙련되고 빠르다. 한번도 빠른 행군에 지장을 준 적이 없다. 타타르인들은 이렇게 훈련된 사병이다. 그들은 고된 군대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셋째, 중원에 들어온 후의 만주족에 대한 인상

알바로 세메도는 <대중국지>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누르하치가 병력을 이끌고 요동에서 싸우는 군사행동을 기록했다.

"1618년이후, 타타르인은 계속하여 매년 여름에 대거 침입했다(겨울에는 아주 추워서 무슨 일을 할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그들은 승리자이고, 중국인들은 손실이 참중했다.

그러므로 1622년, 그 지방의 주요 보루, 총독의 주둔지인 광녕보(廣寧堡)의 두 고위관료(아마도 불만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의 지위를 개선하려는 바람때문인지)가 타타르인과 비밀협상을 체결하여 그 성보를 넘겨주고 만다.

그들은 확실히 그렇게 했다. 타타르인들이 그들이 방어하는 한 측면을 공격할 때, 이미 배신하였으므로 손쉽게 점령하도록 넘겨준다. 그리하여 역모를 모르고 있던 사람들은 도망치게 된다. 그중에는 총독이 있었다."

책에서 언급한 역사사건은 명나라 천계2년(1622년)에 발생한 광녕전투이다. 그중 누르하치에게 투항한 명나라 장수는 각각 손득공(孫得功)과 포승선(鮑承先)이다. 도망간 총독은 왕화정(王化貞)이다.

알바로 세메도 이후에 미하우 보임(Michal Piotr Bovm, 卜彌格, 1612-1659), 마르티노 마르티니, 아담샬, 프랑소와 데 로그몬트(Francois de Rougemont, 魯日滿, 1624-1676)등 선교사들이 모두 혹은 상세하게 혹은 간략하게 명청교체기의 사실들을 기록했다.

마르티노 마르티니는 <타타르전기>에서 "타타르가 북경에서 황제위를 차지했고, 황제로 자칭했다는 소식이 남경성에 전해지자, 남경성은 혼란과 공황상태에 빠진 모습"을 기록했고, 특별히 "체발령(剃髮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타타르인은 모든 사람, 포로를 포함해서 그들의 군대에 참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다만 조건은 머리카락을 깍고 타타르복장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복장과 두발에 대해 엄격하게 그들의 형식을 준수하도록 요구했다. 바꾸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반란의 중죄로 처벌한다고 했다."

이 가혹한 법령에 대하여 마르티노 마르티니는 이렇게 말했다: "이건 아마도 그들에게 위험을 가져올 것이고, 그들 국가의 대업을 교란시킬 것이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자신의 두발과 복식을 애호하는 것이 그들의 국가와 황제를 옹호하는 것보다 더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맹하게 싸울 것이다. 그들은 차라리 죽고 머리가 잘릴 지언정 타타르풍속은 따르길 원치 않는다."

주목할 점은 이들 선교사들이 천군의 전쟁중에 보인 잔인한 일면은 거의 모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르티노 마르티니는 <타타르전기>에서 "양주십일(揚州十日)"을 언급하고 있다:

"양주성의 군민이 격렬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결국 전체 성이 겁난을 당하고, 백성과 병사들이 도살당한다. 타타르인들은 시신이 공기를 오염시키지 않고,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시신을 지붕에 놓고, 성과 사방에 불을 질러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결국 폐허로 변해버린다."

그외에 선교사들은 "팔기제도(八旗制度)"에 대하여도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했다. 예를 들어 마르티노 마르티니의 <타타르전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첫째는 백기(白旗)로 어기(御旗)이다. 둘째는 홍기(紅旗), 셋째는 남기(藍旗), 넷째는 황기(黃旗)이다. 뒤의 삼기는 황숙(皇叔)이 지휘하고, 첫째의 백기는 직접 황제의 명령을 듣는다.

이 사색기의 조합으로 다시 또 다른 사기를 만든다. 사병들은 모두 자신이 어느 색기에 들어있는지, 성내의 집합장소가 어디인지 알고 있다. 거기에는 병사의 무기, 마필이 있고, 전쟁이 일어나면 반시진내에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다.

그들은 호각(號角)을 사용하는데, 그 형상은 우리가 자주 쓰는 법라(法螺)와 같다. 호각이 울리면, 그들은 즉시 어느 대오 어느 장군이 출정하는지 알고, 순식간에 그들의 기치하에 집합한다. 기병은 뒤에 깃발을 달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오로지 장군과 기수만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고도의 군사기밀이다. 자주 중국(남명)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여러번 중국인들이 어느 곳에서 그들에 대항하여 방어준비를 하고 있을 때, 돌연 그들이 다른 곳에 출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이다.

팔기제도는 그들의 전투력을 크게 증강시켰다."

넷째, "만주이미지"의 미묘한 변화

마테오 리치를 위시한 유럽 선교사들은 유가문화를 기반으로 한 명나라를 "고도로 문명화된 국가"로 보았다. 그러므로, 누르하치가 굴기한 초기에,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쌍방의 군사대치를"낙후한 야만족의 문명민족에 대한 무력침략"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상호간의 교류가 많아지면서 유럽선교사들의 '만주이미지'는 어느 정도 바뀌게 된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명나라의 통치권력을 대체한 만주족통치계층이 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낙후한 야만족의 추장이 하는 것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교사 미하우 보임이 쓴 <중국보고서>는 당시 유럽의 베스트셀러였다.

마르티노 마르티니는 일찌감치 예민하게 느꼈다:

"타타르인은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제를 유지했고, 이 고명한 방법은 이런 효과를 낳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만일 관직을 중국인들에게 부여하면, 그들이 타타르인에게 충성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전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관리들은 원래의 관직을 유지했다. 육부를 두었다. 다만, 현재 거기에 취임하는 것은 중국인도 있고 타타르인도 있다. 다만 타타르인은 병권을 장악하고, 그들에게 충성하는 조정의 한족신하에게도 병권은 절대 맡기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선교사들은 거의 일치하여 인식하게 된다. 비록 이 국가의 최고통치자가 한족이 아니지만, 여전히 '중화제국'의 특성을 유지할 뿐아니라, 심지어 '업그레이드'시켜 만한 두 민족을 주체로 강역이 더욱 넓은 다민족대통일국가를 만들었따는 것을.

최전성기의 대청제국 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