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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서하(西夏)의 자칭국명 "방니정(邦泥定)" 및 "백상국(白上國)"은 어떤 의미였을까?

by 중은우시 2023. 6. 8.

글: 오천지(吳天墀)

 

서하정권의 건립자인 척발원호(拓拔元昊)는 일찌기 북송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방니정(邦泥定)"이라 칭한 바 있다. 그 내용은 <송사>권485 <하국전상>에 나온다. 그리고 서하는 스스로 "백상국(白上國)"이라 칭했고, 실물증거도 있다. 예를 들면, 감숙성 무위현문화관에 보존된 <중수호국사감응탑비(重修護國寺感應塔碑)>에는 음각으로 한문을 새겼는데, 첫행의 표제가 "백상호국사양주감응탑지비문(白上護國寺感應塔之碑文)"이라고 되어 있다든지, 1975년 9월 영하박물관은 은천시 서하란산 동록의 서하제릉구에서 2호릉(하인종의 능)의 동서비정(碑亭)을 정리했는데, 이미 부서진 서하문(西夏文) 전체비액(篆體碑額)의 위에 서하문전체와 병합해서 번역된 한문(漢文)은 바로 "대백상국호성성덕지의황제수릉지문(大白上國護城聖德至懿皇帝壽陵誌文)"이라는 16글자등이 있다. 척발원호는 정식으로 건국하면서 이런 국명을 선포했는데,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필자의 견해를 밝혀보고, 여러분들의 의견을 들어보고자 한다.

 

1. "방니정"과 "백상국"

 

송인종 보원 원년(1038년) 십월, 척발원호는 정식으로 칭제(稱帝)한다: "나라를 대하(大夏)라 칭하고, 연호를 천수예법연조(天授禮法延祚)라 했다." 대하(大夏)를 국명으로 한 것은 당,송 중원왕조가 하주번진(夏州藩鎭)을 습관적으로 부르는 명칭을 그대로 쓴 것이다. 원(元)나라사람들이 편찬한 <송사> <요사> <금사>의 삼사(三史)에 각각 <하국전(夏國傳)> <서하외전(西夏外傳)> <서하전(西夏傳)>을 두었다. 이는 "하"라는 명칭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리하여 한적(漢籍)에서는 보편적으로 일치되게 쓰고 있다. 그러나, 서하가 스스로 "방니정"이라고 부른 역사적 사실은 오랫동안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았고,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도 못했다. 그리고 "백상국"이라는 명칭의 의미에 대하여는 최근 들어 해석한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검토해볼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서하가 스스로 "방니정"이라고 칭한 것은 하송(夏宋)전쟁때 나왔다. 먼저 척발원호가 칭제하면서, 하와 송의 관계는 결렬된다. 1040년, 1041년 및 1042년의 3차례의 전쟁을 거쳐, 서하는 휘황한 승리를 거둔다. 송나라조정은 깜짝 놀라서 의화(議和)하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송의 통치집단은 봉건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척발원호가 황제를 칭하지 않기를 바랬고,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면서 황제칭호를 포기하게 만들고자 했다. 당시 범중엄(范仲淹)은 경략서사(經略西事)로서 척발원호에게 사적으로 서신을 보내어 이렇게 말한다: "본왕조를 회피하지 않고 나란히 황제위를 두는 것"은 송나라조정이 '놀라고 분노할' 일이다라고 하면서, "대왕은 대대로 서토(西土)에 살아왔고, 의관이나 의복은 모두 본국의 습속을 따른다. 그런데 오직 명칭만 중원의 천자와 같도록 했으니, 명정언순(名正言順)하지 않다....예를 들어, 선우(單于), 칸(可汗)같은 명칭도 있다. 그것이 본국언어로 편리하고 존귀함에도 손상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또한 대왕의 나라는 재물이 좀 부족할 수 있다.조정은 매년 재물을 후하게 하사하여 대왕을 도와줄 수 있다." 이런 내용의 서신을 임의로 보냈다고 하여 범중엄이 처벌을 받은 적이 있지만, 나중에 송과 하간의 의화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방식으로 정해지게 된다.

 

그 일은 다음과 같은 우여곡절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경력2년, 송나라조정은 비밀리에 변방의 신하 방적(龐籍)으로 하여금 서하와 협의하게 했으나, 척발원호는 '황제칭호를 버릴 수 없다고 고집했다'

 

경력3년, 서하에서 북송에 사신을 보낸다. 척발원호는 서신을 보내어 "여전히 남방니정국올졸(男邦泥定國兀卒)이 부대송황제(父大宋皇帝)에게 글을 올린다. 명칭을 낭소(曩霄)로 고치지만, 칭신(稱臣)하지 않았다."(송사.하국전상). 이도(李燾)의 <장편(長編)> 권139, 경력3년 정월 계사기사(癸巳記事)에 이런 기록이 있다: "그 서신을 보면, 원호는 자칭 남방니정국(男邦泥鼎國) 오주랑소(烏珠郞霄)가 부대송황제에 글을 올린다고 했다. 그리고 서하의 ㅡ사신 하종훈(賀從勛)의 말을 기록해 놓았다: "본국에 본인을 파견하여 글을 올리게 하지만 봉표체식(奉表體式)을 하지 않고, 스스로 오주(烏珠)라고 칭하는 것은 옛날의 선우, 칸과 같은 것이다." 하종훈이 말하는 '오주'로 개칭했다는 것은 확실히 범중엄이 이전에 척발원호에게 제안한 바이긴 하다. 척발원호는 송나라에 대하여 직접 자신을 황제로 칭하지는 않은 것이다(국내에서는 여전히 황제로 칭했다). 이는 척발원호가 형식적으로 어느 정도 양보한 셈이다. 송,하간에 이번 교섭이 진행된 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서하는 자신이 새로 정한 국명을 "방니정"이라고 했다(<장편>에서는 '邦泥鼎'이라고 했는데, 정(定)과 정(鼎)은 발음이 같다). 

 

둘째, 척발원호는 송왕조에 대하여 황제라는 명칭은 포기하고 "올졸(兀卒, <장편>에서는 烏珠라 함)"이라고 고쳤다. 올졸은 "오조(吾祖)"라고 쓰기도 한다. <송사.하국전상>에는 이렇게 적었다: "올졸은 바로 오조이다. 칸의 호칭이다. 논의한 사람들은 오조를 올졸로 바꾼 것은 조정을 우롱하는 것이니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기실 '올졸'이라는 명칭은 북방민족이 하늘을 높이 받드는 습속을 이어받은 것이다. <장편>권122, 보원 원년 구월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오주라는 것은 중국말로 '청천자(靑天子)'이다. 중국(당시는 송나라)은 '황천자(黃天子)'라고 불렀다."  "역사적으로 중국북방에서 활동하던 흉노, 선비, 돌궐, 거란, 몽골등 여러 민족은 모두 하늘을 받드는 습속이 있었다. 하늘의 색깔이 푸른 색이다. 원호가 '청천자'라고 칭한 것은 특별히 존귀함을 표시한 것이다. 그리고 '천지현황(天地玄黃)'은 한족의 전통적인 생각이다. <주역.문언전>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현황이라는 것은 천지가 섞인 것이다. 하늘은 현(玄)이고, 땅은 황(黃)이다." 북위의 척발씨가 성을 원(元)씨로 고친 적이 있는데, '원(元)'은 바로 '현(玄)'이다. 즉 청색이다. 원호는 하늘이 존귀하고 땅은 비천하다는 생각으로 청천자가 황천자를 이긴다고 생각했다. 이는 북위를 이어받았다고 스스로 자처하였으므로, 그에 매우 부합하는 면이 있다. 

 

셋째, 원호는 송나라황제에 대하여 그저 부(父)라고 칭했을 뿐, 스스로 칭신(稱臣)하지 않았다. 자신의 할아버지 계천(繼遷)은 일찌감치 조(趙)씨성을 하사받은 바 있고, 부남(父男, 즉 부자간)은 원래 하나이다. 그러나 독립을 유지한다. 만일 칭신한다면 봉건제도의 구속을 받아야 하고, 복속되었다는 이미지를 벗어날 수 없다. 서하에 있어서 송나라와 평등한 지위를 취득하는데 크게 장애가 될 수 있다. 경력3년초의 송과 하간의 논의에서 송나라의 집정대신인 한기(韓琦), 범중엄등은 송인종에게 원호의 이런 의도를 지적하며, "송나라조정과 대항하려고 하고" "삼족정립으로 대치하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만일 그 명칭을 허락하면 이후 공문서나 군대민간의 언어에서 당연히 '서제(西帝)' '서조(西朝)'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라고 한다. 확실히 원호가 '방니정'이라는 국명을 새로 정한 것은 실질적으로 송나라조정(당연히 요나라조정에 대하여도)과 평등한 새로운 관계를 건립하겠다는 뜻을 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방니정"을 일국의 칭호로 삼았다면, 당연히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한어(漢語)로는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렵다. 마땅히 당항족(黨項族)의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다만 오랫동안 그 의미를 해석한 사람은 없었다. 1930년대에 소련학자 N. A. Nevsky의 <서하국명고>에서 서하가 자칭 자신의 나라를 "백상국"이라고 했는데, 한어로 번역한 것이 "방령(庬領)"인데 이는 바로 서하(당항)인들의 "백상국"을 자신의 발음으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북송말기의 사람인 섭몽득(葉夢得)은 자신이 편찬한 <석림연어(石林燕語)> 권8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원호는 자신의 신하 이주자사 하종훈을 보내어 조공하면서, 남방면령올졸랑소(男邦面令兀卒郞霄)가 부대송황제에게 글을 올린다고 했다." 여기의 '방면령'은 '방니정' 혹은 '방령' 외에 또 하나의 한어번역이라 할 것이다. <석림연어>보다 먼저 쓰여진 사마광의 <속수기문(涑水記聞)> 권11에는 원호를 "남면방국령(男面邦國令)이라 칭했다고 되어 있어,  글자가 앞뒤로 틀리게 배치되어 있었는데, 다행히 <석림연어>의 기록으로 <속수기문>의 문자를 교정할 수 있게 되었다. 

 

"방니정" "방면령" "방령"은 서로 대응되면서 같은 발음을 서로 다르게 번역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송사.하국전>의 '방니정'이나 <석림연어>의 '방면령'은 모두 서하(당항)인들의 한자 '백상국'의 음독(音讀)이라고 생각한다; 역으로, '백상국'은 바로 서하(당항)어의 '방니정', '방면령' 혹은 '방령'의 의역(意譯)으로 보인다.

 

'방니정'이 한자 '백상국'의 음독이라면, 왜 굳이 '방니정국'이라고 하여 '국(國)'자를 추가한 것일까? 그것은 '방니정'이라는 세 글자만으로는 직접 '나라'라는 의미를 드러내기 어렵기 때문에 동의어를 중첩하는 방법으로 명확히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나라때 유행한 '백화비(白話碑)'를 보면 그러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240년 <제원십만자미궁성지비>의 "야가합돈대황후(也可合敦大皇后)'라고 되어 있는데, '야가(也可)'는 '크다(大)'는 뜻이고, '합돈(合敦)'은 '황후'라는 뜻이다. 1268년 <주지중양만수궁성지비>의 "합한황제(哈罕皇帝)"와 1276년 <용문우왕묘령지비>의 "갑한황제(匣罕皇帝)"의 '합한'과 '갑한'은 모두 '황제'라는 뜻이다. 이것도 동의어를 중첩하는 방식의 예라 할 수 있다.

 

'방니정'과 '백상국'은 한족에 있어서 하나는 음역이고 하나는 의역이다. 그렇다면, '서하(당항)인'에게 그 의미는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어에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는 '백상국'을 검토해보면 될 것이다.

 

2. '백상국'의 의미

 

서하의 '백상'이라는 국명에 관하여, 중국에서 처음 서하문을 연구한 나복성(羅福成)과 소련학자 N.A. Nevsky는 모두 '백상'은 '백하(白河)의 상류(上流)'라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영향력이 크고, 지금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다. 나복성은 이렇게 말했다: "서하는 서쪽변방에 나라를 세웠고, 황하의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하서(河西)라고 불렸다. 황하는 발원지의 물색깔은 황색이 아니라 아마 백하(白河)라고 불리면서 '흑수(黑水)에 대응시켰다. 서하사람들은 백하의 상류에 거주하여 '백상'이라고 하였는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범문(李范文)이 쓴 <"방니정국올졸"고찰>이라는 글에서도 이 설에 동의했다. "서하인이 쓴 <서하부(西夏賦)>에 이런 싯구가 있다. '검수석성막수변(黔首石城漠水邊), 적면부총백하상(赤面父塚白河上)'. '백상'이라는 명칭은 '백하상류'의 약칭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민강(岷江) 산록의 백수강(白水江)이든, 혹은 황하상류의 백상하(白上河)이든, 당항인들은 모두 이곳에서 상당히 장기간 거주한 바 있다. 그래서 그들 조상의 발원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시가로 칭송한 것이고, 국명으로 기념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역사에 부합하고, 한 민족의 공통된 심리에도 부합한다."

 

서하는 사료가 부족한데다가, 서하인이 쓴 <서하부>에 '역면부총백하상'이라는 말까지 나오니 '백하상(白河上)'으로 '백상국'을 해석하는 것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쉬웠다. 하물며, 당항족은 스스로 "미후종(獼猴種)"에서 나왔다는 전설이 있으므로, 소위 '적면부(赤面父)'는 바로 그들 자신의 조상을 추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자세히 검토해보고 분석해보면, '백상'이 '백하상류'라는 주장에는 약점이 있다:

 

첫째, 중국대지에는 흑,백으로 강물을 명명하는 경우는 너무나 많고 너무나 보편적이다. 밝은 물은 백수, 백하, 흐린 물은 흑수, 흑하라고 부르는게 통상적이다. 하경제(夏景帝) 원호가 건국하고 칭제하면서 새로 정한 "방니정"(백상국)이라는 국명은 당시 한족, 당항족 인재들이 수두룩했을텐데, 백하의 상류에서 발원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이름하였다면 너무나 깊이가 없는 얕은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고려할 것은 원호가 정식으로 선포한 것은 "조상은 원래 황제의 일족으로 동진의 말기에 후위의 기반을 닦았다."고 하여 자신은 선비족의 후손이지 강족(羌族)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서하왕실의 척발씨(나중에 嵬名으로 바꿈)는 강족에 대하여 왕왕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하숭제(夏崇帝)는 천우민안5년(1094년)에 세운 <중수호국사감응탑비>에 "선후(先后, 夏惠宗을 가리킴)시대에, 서강(西羗)이 량(凉)의 땅을 침범했다"라는 말등이 그 증거이다. 이렇게 보면 서하(당항)인들이 쓴 <서하부>의 '백하상'이 바로 '백상' 혹은 '백상국'의 의미와 같은 것인지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설사 양보하여 당항강족이 백하상류의 '백하상'에서 발원하여 '백상국'이라는 명칭을 얻었다는 것이 증명되려면, 서하국중 당항강족의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국명을 선포하는 것과 같은 중대한 건에서 통치자(척발씨)의 인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다.

 

둘째, 서하어의 어법에 따르면, '백상(白上)'은 '상백(上白)의 뜻이다. 소위 '백상국'이라는 것을 한어로 번역하자면 '상백국'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왕정여(王靜如) 선생이 50년전에 이런 견해를 발표한 바 있다. 바꾸어 말하면, '상(上)'은 '숭상' '존경'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방니정(백상국)"을 서하의 국명으로 반포한 하경제 척발원호는 '번한문자(蕃漢文字, 한자와 서하문자를 가리킴)에 모두 능통했다' 서하인들은 문자학을 중시했고 각종 자전을 편찬했으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훌륭한문장을 남겼다. 만일 '백상'이 '백하상'과 같은 뜻이라면, 그것은 서하어의 어법에도 맞지 않고, 한문으로 보더라도 '증자해경(增字解經)'의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왜냐하면, '백상'을 '백하상'과 같은 의미라고 한다면 공연히 '하(河)'자를 추가한 것이기 때문이고, 원래의 뜻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글자로 볼 때, '백상'은 바로 '상백' 즉 백색을 숭상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도 당연히 추궁당해야 하는 사항이다. 서하인들은 왜 '백색을 숭상'했을까? 그리고 그 것을 국명으로까지 넣었을까? 이 문제는 서하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연구검토가 필요한 이슈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서하가 '백상'을 국명으로 삼은 것은 중국의 음양가의 오행학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서하통치자들이 왜 '백상국'이라는 이름을 취했는지를 알아보려면 먼저 중국의 오행사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금,목,수,화,토를 표지로 하는 오행으로 오방, 오색, 오음, 오시, 오미, 오상, 오정, 오장등을 엮어서 계통적으로 우주의 구조를 설명한다. 자잘한 일상의 사소한 일들부터 당당한 정치이론까지, 모두 오행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한나라의 유학자가 편찬한 <춘추대전>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천자의 나라에는 태사(泰社)가 있다: 동방은 청(靑), 남방은 적(赤), 서방은 백(白), 북방은 흑(黑), 상방은 황(黃)이다." <예기.월령>에는 천자가 시령(時令)에 따라 일을 진행해야 한다고 하면서, 춘하추동에 각각 해야할 일이 있고, 길한 것을 쫓고 흉한 것은 ㅍ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오행사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위이래 사회에는 '사령(四靈, 四神이라고도 함)'신앙이 유행한다. <삼보황도>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는 하늘의 사령이다." 사람들은 자주 '사령'의 이미지로 와당, 동경, 장례도구와 기타 기물의 문양을 만들었다. 동시에 사방의 형제민족들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다. 이렇게 하여 중국 각 민족의 마음 속에는 보편적으로 허구의 음양오행관념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것에 익숙해졌다. 서방은 금(金)에 속하며, 금은 백색(白色)이다. 당항족이 내지로 들어와 산지 오래되었지만, 그들의 사상의식에서 이런 영향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특히 서하의 통치계급은 한족문화를 깊이 받아들였고, 그들은 자신의 정권을 건립하고 유지하는데, 반드시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박힌 풍속 신앙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인민을 통치하고 대외적으로 발전하는 정신적 역량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하통치자가 음양오행학설을 이용하여 자신의 장권이 중원의 서부지역에 있고 금에 속하고 백을 숭상하는 국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송,요와 이웃하여 살면서, 송,요는 원래 남조, 북조라고 불렸다. 그렇다면 서하는 바로 그들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서하가 송,요로부터 '서조(西朝)'라는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아 삼국정립의 국면이 이루어지면 부친, 조부때 송,요에 칭신하던 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었고, 크게 명성을 드높이고 서북의 각 소수민족에 대한 호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1038년 척발원호가 송나라에 보낸 표문은 '"서교(西郊)의 땅을 허락하고, 남면(南面)의 군주로 인정하다"는 말이 있다. 이는 이후 서하정권의 지위를 한단계 높여서 송나라와 대등한 관계로 유지하겠다는 의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척발원호는 이런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완강하게 투쟁한다. 송나라가 그의 칭제요구를 거절하자, 서하는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3번이나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서하는 물자가 부족하고 인력도 부족하여 결국 의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쌍방의 의화과정에서 가장 난감한 이슈는 바로 원호가 "아들로 칭하기를 원하고, 신하로 칭하기를 원치 않았다"는 점이다(<장편>142).  <망락총묘유문>4편 6재 (임전묘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하(夏)나라에서 사신 여니여정을 보내어 크게 요구했는데, 무릇 11가지였다. 그중 심한 것은 번신(藩臣)의 명호를 버리고, 부사(父事)의 예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경력4년(1044년)에 이르러, 화약(和約)이 성립된다. 송나라는 큰 경제적 댓가를 치르고(명목상으로는 '세사(歲賜)'이지만, 실제로는 송나라가 매년 255,000냥, 필, 은, 견, 차를 서하에 배상금으로 보내야 했다.) 그후 '척발원호는 칭신(稱臣)하고 하국주(夏國主)라고 부른다."(<장편>145, 경력4년 5월 병술조). 다만 이는 단지 표면적으로 송나라의 요구에 응하는 척 했을 뿐이고, 실제로 척발원호는 그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그는 서하의 신민들에게 여전히 지고무상의 권위있는 황제였다. 척발원호는 손님을 맞이하는 예의로 송나라 사신을 맞이하기로 화약에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만, 척발원호는 집행하지 않았다. "송나라가 매번 사신을 보내면, 유주(宥州)에 묵었고, 흥(興), 령(靈)에는 가지 못했다. 원호는 자기 나라에서 황제로 여전히 활동했다."(<송사.하국전상>). 그리고 서하는 송나라와 교류하면서, 서하의 신료들은 관직명칭은 매우 높였다. 이는 봉건주의의 '배신(陪臣)'체계에 맞지 않는 일이다. 이것도 송나라통치계급을 아주 난감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송사>권311 <방급전>에는 서하의 사신으로 야리왕영(野利旺榮)이 왔는데, 왕영을 태위(太尉)라고 칭했다. 태위는 황제의 신하가 쓸 수 있는 것이지 배신국가에서 쓸 수 있는 직위가 아니라고 하자, 글에서 자칭 '영령(寧令)' 혹은 '모녕령(謨寧令)'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송사>권292 <정감전>에는 "하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왔는데 하나라의 중관을 추밀(樞密)이라고 칭했다. 추밀을 '영로(領盧)'로 고쳤고, 마침내 허락한다." 이것은 서하의 관직상 태위, 추밀이 있다는 것이고, 엄연한 독립정권의 자세로 송을 대했고,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이다. 송나라는 그저 엄이도령(掩耳盜鈴)하기 위하여 서하가 자신들과 대등한 관직명칭을 쓰고 있음을 알면서도, 서하에서 파견오는 사신에게 단지 서하어명칭만 쓰도록 하고, 한어명칭은 쓰지 못하도록 했을 뿐이다. <송사.하국전사>을 보면, 한동안 서하의 사신들의 관직명칭에 대하여 "조유(祖儒)", "율칙(聿則)", "여녕(呂寧)" "앙성(昻星)" "정나(丁拏)" "파량(芭良)" "정리(鼎利)"등으로 적고 아무런 해석을 붙이지 않았는데, 아마도 당시에 일반 사람들은 잘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상황은 척발원호가 '방니정국'이라고 스스로를 부르는데도, 송나라는 그런 정보를 고의로 봉쇄하고, 사람들에게 그 본래 의미를 알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백년동안 송나라때 문헌에서 '방니정국'이라는 말은 거의 '광릉산(廣陵散)'이 되어 버렸다. 

 

자신의 정권에 '서조'라는 이미지를 수립하고자 하는 척발원호는 송나라에 대하여 평등한 지위를 쟁취하려고 노력했을 뿐아니라, 요나라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였다. 서하와 요나라의 관계는 비교적 친밀했다. 계천, 원호, 건순(乾順)은 모두 요나라황실의 사위였다. 요나라의 지원을 등에 업고 송에 대항한다는 것이 서하의 기본국책이었다. 다만 척발원호가 칭제하고나서,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화약을 맺은 후, 요나라와의 관계에도 금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전투까지도 벌어지게 된다. 송나라 전황의 <유림공의>권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거란국경내의 협산부락 매가(呆家)등 족속이 반란을 일으켜 많은 사람이 척발원호에게 붙었다. 거란은 글을 보내 책망하나, 원호는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서조(西朝)'라 하면서 거란을 '북변(北邊)'이라 칭했다. 그리고 '소속부락을 잘 관리하시길 바란다. 양조(兩朝)간의 우호관계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이는 확실히 원호가 요에 대하여도 번속국으로 남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요나라의 질책을 무시하고 전투를 벌였는데, 오히려 서하가 우위를 점했다.

 

이때 서하는 북조(요), 남조(송)과 서조(西朝)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자연히 '상백'을 선전할 정치적 필요가 있었다. 오행학설에 따르면, 남방은 '화(火)'로 송나라는 스스로 이화덕왕(以火德王)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하나라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하구언은 염송(炎宋)이라고 불렀다. 서하는 중원서부에 있으므로 오행상 금에 속한다. 그래서 서방을 금방이라고도 부른다. 주목할 점은 하의종 양조천우수성원년(1050년)에 세운 <하국황태후신건승천사예불정골사리비>에 서하의 덕을 칭송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웅진금방(雄鎭金方), 회척하우(恢拓河右)" 서하는 '금방'을 차지하고 있고, 하우(하서)를 개척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명백하게 서하의 대지는 서부지역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서하는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니 자신을 드러낼 근거가 필요했다. 그래서 서하통치자들은 '백상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오행학설상 '서' '금' '백'의 세 가지 개념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씨춘추.응동>에는 "금의 기운이 승하면 그의 색은 백을 숭상한다." <설문해자>에는 "백, 서방의 색이다." 서하영역내의 사주(沙州, 지금의 감숙성 돈황현)에서는 하서절도사 장봉이 스스로 '백의천자'라 칭하면서 '서한금산국'을 세운 사실이 있다. 이상의 간단한 내용에서도 '백' '서' '금'등의 글자는 모두 오행학설의 신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하통치자들이 '서조'로 자처했고, '웅진금방'하면서 요, 송과 필적하려고 하면서 국명을 '백상국'으로 했다면, 서하정권이 남쪽과 북쪽에 들어선 송,요정권과 완전히 대등하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다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것이 역사적 실제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서하민족의 풍습을 보면, 당항족이든 서하왕실이 스스로 속한다고 주장하는 선비이건 모두 백색을 숭상하는 풍속을 가지고 있다. 당항족은 가장 먼저 청장고원에서 살았다. 당나라이래 토번의 침입을 받아 점차 중원지역으로 옮겨와, 감숙동부, 섬서북부, 영하 및 내몽골하투지역등에서 거주한다. 서하 척발씨세력의 근거지는 하주이고, 혁련발발이 하나라를 세웠을 때 수도로 삼은 통만성도 바로 이 곳에 있다. 통만성은 견고한 것으로 역사상 유명하다. 하주성은 백성아(白城兒), 백성자(白城子)라는 속칭이 있다. 원호는 자칭 북위의 후예이고, 선비족출신이다. 선비족은 백부호(白部胡)이고, 한족들은 백로(白虜)라고 불렀다. 서하통치자는 조상의 습속을 보존하고, 자신의 족계가 존귀하다는 것을 들어내기 위하여 백색을 숭상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당항이 서하의 주체민족이고, 서하정권을 건립하고 서하사회를 봉건화하는 과정에서 실로 그들이 주도작용을 한다. 당항은 강족에 속하고, 강족은 역사가 유구하다. 인구도 많고 부족도 복잡한 민족이다. 그들은 서부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서강(西羌)'이라고 불린다. 한족들의 마음 속에 서강은 강인하고 전투를 잘하며 굽히지 않는 민족이다. 범엽은 <후한서.서강전>에서 그들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다: "성격이 견강맹용(堅剛猛勇)하다. 서방 금행의 기운을 얻었다." 송나라초기에 만들어진 <책부원귀> 권960, 외신부, 토풍이리에는 <후한서>에서 서강민족을 평가한 내용을 그대로 당항족에게 붙여놓았다. 이것은 더더욱 당항민족이 서하를 건립했고, 그들은 '서방의 금행의 기운을 얻었다'는 특수한 성격을 나타낸다. 그것이 한족들이 그들을 보는 인식이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서하가 특별히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던 국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불교의 교의는 백색을 숭상하는 것이다. 불가의 '백법(白法)'은 '백정지법(白淨之法)'인데, 일체의 선법(善法)의 총칭이다. 불교경전에서 자주 흑백으로 선악, 청탁, 지우(智愚)를 구분하여 말한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을 '백업(白業)'이라고 하고, 나쁜 일을 하는 것을 '흑업(黑業)'이라고 한다. <비나야잡사>권8에는 "대왕은 마땅히 백업에는 백보(白報)가 따르고, 흑업에는 흑보가 따르며 잡업(雜業)에는 잡보가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마땅히 흑업, 잡업 두 업을 버리고, 백업을 행해야 한다." 서하통치자들은 불교를 보급하는데 열중했다. 그들이 백색을 숭상한 것은 종교적인 색채도 띄는 것이다. 불교신앙에서 백색을 선으로 보는 풍속은 명나라때 사천의 위주, 무주등지의 강족들 사이에 여전히 유행했다. <명무종정덕실록>권30에 이런 내용이 있다: "정덕2년 구월....을사...사천을 지키는 태감 나약이 상소를 올려 말했다: '위주, 무주 관할의 남촌, 곡산등의 채(寨)에서는 홍치4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요역과 징수를 거부한 것이 17년에 이르렀다. 지금은 귀부하여 백인(白人)이 되었다. 백인이라는 것은 그 풍속이 백색을 선으로 흑색을 악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항은 서하의 주위에 많은 인접한 비한족지역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백색을 숭상하는 신앙풍속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하는 요, 송과 비교하면 규모에 있어서 손색이 있는 정권이기 때문에, 지위를 증강시키고, 영향력을 확대하여야 송,요에 대항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웃의 '번족'들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그들의 협력을 받아낼 필요가 있었다. 원호가 황제를 자칭한 중요한 이유중 하나이다. 토번, 타타르, 장액(張掖), 교하(交河)의 여러 족들이 열렬히 추대했다. "칭왕(稱王)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고, 조제(朝帝, 왕조를 세워 황제가 되다)하면 따랐다." 그는 확실히 번족을 통합하여 송나라에 대항할 필요가 있었다. 송나라가 원호의 요구를 거절하자 그는 하구언(賀九言)을 보내어 "만서(嫚書)'를 보낸다. 거기에서 첫째는 "번과 한은 서로 다르고 국토도 전혀 다르다" 다음으로 "함부로 번족을 혼란시키넌 것은 절대로 불가하다." 이는 번족의 대표자격으로 말하는 것이다. 번족이 아닌 송나라는 간섭할 자격이 없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서하통치자들은 한편으로 송나라와 차이점을 나타내면서, 주변의 번족들과는 합해야 했다. 그렇게 하여 송나라를 고립시킬 필요가 있었다. 서하가 '백상국'이라고 칭한 것은 여러 족속들이 백색을 숭상하는 풍속에 호응한 것이고, 이것을 가지고 공통점을 찾은 것일수도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하의 내부통치와 대송투쟁에 크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이 백상국의 의미에 대한 이해이다. 독자들의 가르침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