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대리국(大理國)은 얼마나 강대했을까?

by 중은우시 2023. 2. 6.

글: 자귤(紫橘)

 

대리국을 얘기하자면,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바로 김용의 소설 <천룡팔부(天龍八部)>일 것이다. 소설중 단예(段譽)는 대리국의 후계자이고, 대리국은 송(宋), 요(遼), 서하(西夏), 토번(吐蕃)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국가이다. 모용복(慕容復)은 한때 단연경(段延慶)을 부친으로 인정하면서 대리국의 병력을 빌어 송을 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 대리국은 정말 그렇게 강대했을까?

 

1. 대리국의 건립

 

902년, 서남을 통일했던 남조국(南詔國)이 멸망하고, 남조국의 구귀족들은 속속 병력을 이끌고 자립한다. 강대한 군벌들이 연이어 장화국(長和國), 천흥국(天興國), 의녕국(義寧國)을 세운다. 의녕국시기에, 국왕 양간정(楊干貞)은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반대파를 제거하고 이성귀족들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시작한다. 이성(異姓) 권력귀족들은 단씨 단사평(段思平)의 통솔하에 반양동맹을 결성한다. 937년에 이르러, 단사평의 통솔하에 의녕국을 무너뜨리고, 단사평이 즉위하면서, 국호를 대리(大理)라 하고, 양저미성(羊苴咩城, 지금의 대리시)을 수도로 삼는다. 

 

단사평은 즉위후부터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조치를 시작한다. 먼저, 각 권력귀족들과 힘을 합쳐 의녕국 양씨의 잔여세력을 철저히 궤멸시킨다. 전투과정에서, 단씨는 군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 양씨를 철저히 소멸시키고 난 후, 단사평은 한편으로 전쟁때 양씨측의 편을 들었던 남조의 구귀족들을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에 가까웠던 남조의 구귀족들을 분봉(分封)한다. 예를 들어, 단사평은 고씨(高氏)의 족장 고방(高方)을 악후(岳侯)로 봉하고, 자신의 부족과 자신이 점령한 지역에 대한 통치를 승인한다. 그리고 동씨(董氏)의 족장 동가라(董伽羅)를 상국(相國)으로 임명하고, 동씨의 난주(蘭州, 지금의 麗江일대)에 대한 통치를 승인한다.

 

다음으로, 단사평은 그에게 거대한 병력을 제공하여 도와준 전동삼십칠가(滇東三十七家)에게 우대정책을 실시한다. 그들에게는 요역을 3년 면제해주고, 부세를 절반으로 감해준다. 진동37가는 고씨, 동씨등 구남조귀족출신의 부락과 달랐다. 그들은 더욱 야만적으로 그들은 고씨, 동씨의 부락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런 조치는 실제로 단사평이 양자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셈이었다. 그렇게 하여 자신이 이들 각 부족들의 위에 자리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단씨가 진동을 우대하다보니, 진동은 단씨의 강력한 지원세력이 된다.

 

2. 대리국의 정치제도

 

이때의 중원은 오대(五代)의 혼란에 접어들고 있었다. 남방도 각각의 정권이 들어선다. 에악이 붕괴된 상황하에서, 단사평은 등극후 황제(皇帝)로 자처한다. 대리국은 모두 316년간 존속했고, 그중 1,094년부터 1,096년에는 왕위를 찬탈당하기도 했지만, 바로 복국한다. 모두 22명의 통치자가 있었고, 시호는 모두 '황제'로 칭한다. 단사평의 사후 시호는 성신문무황제(聖神文武皇帝)였다.

 

대리국의 중앙관료제도는 극히 완비되어 있었다. 이미 문명된 중원봉건제국가와 같았다. 대리국의 최고통치자는 황제로 칭했다. 남조시기에 재상은 '포변(布變)'이라고 불렀는데, 번역하면 '청평관(淸平官)'이라는 뜻이다. 대리국시기에도 포변이 있었다. 다만 이미 허직(虛職)이 되어 명예직이었다. 대리국의 최고행정장관은 "상국(相國)"으로 정무를 책임졌다. 상국의 아래에는 중원의 육부와 유사한 집행기구가 있었는데, 대리에서는 "구상(九爽)"이라고 불렀다. 

 

구상은 각각 1. 막상(幕爽). 병부(兵部)와 유사하다. 2. 종상(琮爽). 호적을 관장한다. 3. 예약상(禮樂爽). 예부(禮部)와 유사하다. 대리국내의 각 부락의 사무, 각부락의 분쟁을 조정하는 것도 예악상의 직무였다.  4. 벌상(罰爽). 형부(刑部)와 유사하다. 5. 권상(勸爽). 이부(吏部)와 유사하다. 6. 궐상(厥爽). 공부(工部)와 유사하다. 7. 만상(萬爽). 재정부와 유사하다. 8. 인상(引爽). 외국사신접대를 책임진다. 9. 화상(禾爽). 공상관리국과 유사하게 상인관리를 전문으로 한다.

 

지방으로는 대리국은 건립초기 현재의 운남(雲南) 전지역, 귀주성 서부, 사천성 남부 그리고 미얀마, 라오스의 일부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지방행정구역은 수도구(首都區), 2개의 도독구(都督區), 6개의 절도사구(節度使區)로 나누었다. 대리국은 각 권력귀족이 연합하여 건립된 것이므로, 지방의 실권은 각 부락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대리국초기에는 남조국의 통치방식을 이어받아, 계속하여 이들 부락의 수령에게 절도사, 도독의 직위를 주어 그 지방을 관할하게 하였다. 황제가 직할하는 것은 실제로 수도구였다. 지방권력귀족은 당나라때의 절도사와 마찬가지로 지방의 최고실권자였다. 기실 양간정이 바로 천흥국의 동천절도사(東川節度使)였고, 단사평은 바로 의녕국의 통해절도사(通海節度使)였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리국의 중앙집권은 강화된다. 대리국후기에 이르러 지방행정은 팔부(八府), 사군(四郡), 사진(四鎭)이 된다. 부, 군, 진의 지위는 비슷하고 상하관계는 아니었다. 진은 군사에 편중된 역할을 하고 국경지역에 설치한다. 군은 주로 한인과 접촉하거나 산수가 험악한 소수민족지역에 설치했다. 예를 들어, 석성군(石城郡)은 바로 촉한이 통치하던 건녕군(建寧郡)이고, 동천군(東川郡)은 촉한의 주제군(朱提郡)이며, 하양군(河陽郡)은 강종(强宗), 나가(羅伽), 보웅(步雄) 3부족의 영지이며, 수산군(秀山郡)은 아북(阿僰)부족의 영지이다. 부는 절도사구가 변경된 것이다. 대리국후기의 절도사, 도독의 명칭은 연습(演習), 연람(演覽)으로 개칭된다. 부급에는 감부사(監府事)라는 직이 설치되는데 송나라의 통판(通判)과 유사한 직위이다.

 

부 아래에는 현(縣)을 두는데, 장관을 현윤(縣尹)이라고 했고, 유관(流官, 중앙정부가 임명하는 관리)이다. 소수민족취락지구에는 토관(土官)을 설치하는데 부장(部長), 전장(甸長)이라고 불렀고, 지위는 현윤과 유사했다.

 

3. 정교합일과 과거제도

 

천룡팔부를 보면 가장 인상깊은 것이 대리국에는 불교가 성행했다는 것이다. 대리국의 국왕조차도 출가하여 화상이 된다. 역사상 승려는 대리국정치에서 아주 큰 영향력이 있었다.

 

대리국시기, 운남불교는 크게 발전한다. 대리국의 22명 황제중에서 모두 11명이 출가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불교세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대리국의 승관(僧官)제도도 완비되어 있었다. 승려는 국사(國師)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대리국의 전통이자 법도가 된다. 대리국의 승관제도는 상당히 복잡했다. 승려의 최고관직은 "대불정사도지천하사부중(大佛頂寺都知天下四部衆)"이다. 이는 대리국의 전체 불사와 승려를 총괄관리하는 직위이다. 그 아래에 보각려(補閣黎), 사자대사(賜紫大師), 사금간승(賜金襇僧), 사호대사(賜號大師)가 있었고, 여기에 승려총관을 찹쳐서 5류의 승려는 모두 관직이라 할 수 있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대리국은 과거제도를 시행했다. 이는 대리국이 중원왕조에 통일된 원인중 하나가 된다. <남조야사>에 따르면, "단씨는 나라를 세웠는데, 과거를 시행해서 선비를 뽑았는데, 뽑은 사람은 모두 승려, 도사로 유서를 읽은 사람이다." 이를 보면, 대리의 과거는 기본적으로 중원과 같이, 유가경서를 시험친 것이다. 그러나 과거대상은 승려, 귀족이었고, 평민은 과거를 칠 수 없었다.

 

4. 대리국이 강대했는가

 

대리국은 완비된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어, 동시대의 송, 요, 서하와 비교해도 그다지 뒤쳐지지 않았다. 다만 진정 대리국을 난세에 자리잡게 한 것은 대리국의 완비된 군사제도이다. 이것이 바로 나라의 독립을 보장하는 최우선조건이었다.

 

대리국의 군대는 상비군, 상군(厢軍), 부락병(部落兵)의 세 종류가 있었다. 상비군은 전문군인이다. 인원수는 적고, 병사들은 급여를 받았으며 하루종일 훈련을 받았다. 대리국의 정예부대라 할 수 있다. 상군은 민병이다. 당나라의 부병(府兵)과 유사하여 촌(村)을 단위로 하여 필요할 때 집합하고, 평소에는 농사를 지으며, 농한기에는 훈련을 받고, 전쟁시에는 출정한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들판으로 돌아온다. 부락병은 각 부락에서 뽑은 병력이다. 남조의 최고군사장관은 "군장(軍將)"이다. 대리국은 부대를 4군으로 나누었고, 각각 4명의 "장(將)"이 통솔했다. 그 네명의 "장" 위에 '군장' 1명을 둔 것이다. 매번 출정할 때마다, 대리국의 황제는 감군(監軍)을 파견한다. 출정때, 군사들은 스스로 양초를 준비하도록 했고, 약탈을 허용했다. 약탈은 병사들의 전투력은 높이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 점은 후금의 팔기병과 유사했다.

대리국의 총인구는 약 300만이고, 부녀자와 노약자를 빼고나면 성인남자는 약 100만이다. 10명중 1명이 병사가 되는 것으로 계산하면, 총병력은 10만에 불과하다. 그리고 대리국은 시종 완전한 봉건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고, 각 부락의 족장이 자신의 봉지내에서 칭왕칭패하여 대리황제의 역량은 분산되어 있었다. 그래서 대리국의 군사역량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대리국의 군대가 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북송때, 북송의 강역은 비교적 광대했고, 돈도 많았다. 그래서 968년 대리국은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칭신납공(稱臣納貢)한다. 그런데, 송나라에서는 이렇다 저렇다 대답을 주지 않는다. 982년, 송태종은 여주(黎州)의 부두를 만들어 대리에서 조공을 바치기 편리하게 한다. 그렇지만 쌍방은 아직 종번관계(宗藩關係)를 건립하지 않았다. 1117년이 되어서 비로소, 송휘종(宋徽宗)이 대리국 통치자인 단화예(段和譽)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검교사공(檢校司空), 운남절도사(雲南節度使), 상주국(上柱國), 대리국왕(大理國王)"에 봉한다. 이렇게 하여 송나라와 대리국은 정식 종번관계를 건립하게 된다.

 

남송은 영토를 계속 남방으로 확장하였다. 1136년, 대리국이 임안(臨安)으로 진공(進貢)하러 갔으나, 송고종은 대리국의 신복(臣服)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쌍방은 더 이상 종번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송이 대리를 침공하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도의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대리국을 놀라자빠지게 만든다. 이때는 아직 악비, 한세충이 죽지 않았을 때였고, 남송군대는 오랫동안 금나라군대와 전투를 진행하여 전투력이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후 남송은 금나라와의 전쟁문제로 인하여, 대리국을 신경쓸 여유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대리와 감히 전쟁을 개시하지도 못한다. 그렇게 쌍방의 관계는 애매하게 된다.

 

대리국이 송나라에 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베트남, 미얀마등에 대하여는 종주국으로 자처했다. 대리국이 건국된 이래 인도차이나반도의 야인들과 자주 전쟁이 벌어졌고, 그 전쟁은 대부분 대리국의 승리로 끝난다. 그리하여 대리국은 영토를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당시의 운남은 지금의 운남성보다 훨씬 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