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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금나라초기의 비여진인 맹안모극(猛安謀克)

by 중은우시 2023. 6. 15.

글: 정니나(程尼娜)

 

맹안모극제도는 금나라 여진족의 아주 중요한 제도이다. 최소한 4가지 내용이 포함된다: 첫째, 지방하층행정조직이다; 둘째, 군사조직이다; 셋째, 군,정관리이다; 넷째, 세습작위이다. 앞의 3가지항목은 동시에 건립되었고, 마지막 1가지 항목은 약간 늦게 확립된다. 여기에서는 주로 지방행정조직으로서의 맹안모극제도가 비여진인지구에서 추진된 것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1114년, 여진인 완안아골타가 거병하여 요나라에 반기를 든다. 십월, 생여진(生女眞) 삼백호(三百戶)를 모극(謀克)이라 하고, 10개의 모극을 합하여 맹안(猛安)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여진사회 최초의 하층행정조직을 만들었다. 그것은 정치, 군사, 생산의 여러 직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장관(長官)은 세습제였다. 금태조 아골타는 원래의 요나라 주현(州縣)지역의 발해(渤海), 한(漢), 거란(契丹), 해(奚)등족에 대하여 대규모로 맹안모극제도를 추진하여, 이를 부주(府州) 아래의 하층행정조직으로 두었다.

 

요동지구에서 맹안모극을 추진하다.

 

1115년, 금나라가 건립된다. 금나라사람들은 원래의 요나라 주현지구에서 맹안모극제도를 실행하는데, 그 시기는 금태조 수국2년 오월이었다. 여진의 종실귀족 완안알로(完顔斡魯)는 군대를 지휘하여 요동을 공격하고, 동경(東京, 지금의 요녕성 요양)을 점거하고 있던 발해인 고영창(高永昌)의 세력을 멸망시키고, 남로(南路)를 설치한다. 금태조는 조서를 내려 요나라법을 폐지하고, 세금부담을 줄여준다. 그리고 각 족에 맹안모극을 설치하여, 여진의 제도와 같이 했다. 요동지구는 여러 민족이 섞여 살았다. 발해인이 위주였고, 다음으로 한인, 요나라에 복속해 있었던 여진인, 그리고 일정수량의 해인, 거란인이 있었다. 남로도통 완안알로는 금태조의 명을 받아 남로내의 각족에 대하여 여진제도에 따라 전면적으로 맹안모극을 추진하고, 이를 지방 하층통치기구로 삼았다.

 

<금사>에 관련기재는 비교적 여기저기 흩어져 있지만, 우리는 대체로 요동지구에서 맹안모극을 추진한 상황을 알아볼 수는 있다. 발해인 고육가(高六哥)는 그의 고향사람들을 이끌고 금에 투항한다. 그리고 유하주맹안(楡河州猛安)을 수여받는다; 발해인 장현소(張玄素)는 완안알로의 군대가 동경에 이르렀을 때 성문을 열고 투항했다.그리하여 세습 동주맹안(銅州猛安)이 된다; 요양의 발해인 대고(大㚖)는 동경의 발해 명문거족이다. 영강주(寧江州)전투때 금에 투항하고, 금태조가 양자로 거둔다. 그는 금태조와 관계가 친밀했고, 금에 충성했다. 처음에는 동경해민모극(東京奚民謀克)을 수여받았다가 나중에 맹안을 수여받고, 동지동경유수사(同知東京留守事)를 겸직한다. 위에 언급한 인물들은 모두 발해인이다.

 

여진이 거병한 초기에 태조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여진, 발해는 원래 일가이다(女眞渤海本同一家)" 금군이 발해인 고영창과 전쟁을 하는 중에 발해인들은 여진의 편에 섰고, 이는 여진통치자로 하여금 더욱 발해인들을 신임하게 만들었다. 대고가 처음에 해민모극을 맡았다는 것도 이를 설명해준다. 완안알로가 기본적으로 현지의 맹안모극제도를 설치한 후, 대고는 발해맹안(渤海猛安)으로 고쳐 수여받는다. <금사.고표전>에 따르면, 유하주맹안 고육거가 나이들어 물러난 후, 아들 고표(高彪)가 맹안을 승계한다. 천보5년, 국론홀로발극렬(國論忽魯勃克烈) 완안고(完顔杲, 斜也)가 내외군을 이끌고 요나라에 대한 전면공격을 개시한다. 고표는 본부모극을 이끌고 남로도통 완안알로를 따라 참전한다. 이는 금나라가 요동에서 실행한 맹안모극제도가 조직형식이든 운영기제이건 모두 여진맹안모극과 비슷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만, 요동지구의 인구는 여진의 내지보다 훨씬 많았다. 만일 금나라제도대로 한다면, 삼백호가 1모극이고, 10모극이 1맹안이다. 새로 설치된 맹안모극의 숫자가 아주 많아야 한다. 남로의 도통(軍帥)이 효과적으로 직접 맹안모극을 관할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록 전쟁중의 부주급의 행정기구가 이미 상당히 무너졌지만, 통치의 필요로 보류해둔다. 그래서 새로운 지방행정체계가 형성된다: 로(路) - 부주(府州) - 맹안 - 모극. 맹안모극은 대체로 현(縣)급의 기관이었다. 새로 설치된 각족의 맹안모극의 관직은 마찬가지로 세습직이었다. 그리하여 맹안은 부주의 장관으로 발탁되더라도 여전히 맹안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함주로(咸州路)에서 요동모델을 채용하다.

 

금태조 천보2년, 금나라는 요동지구의 맹안모극모델을 함주로에서 실행한다. 태조는 함주도통(咸州都統) 완안도가(完顔闍哥)에게 명하여, "일을 할만한 재능이 있는 자를 골라서 모극을 수여하고, 호족중 진심으로 귀부한 자를 맹안으로 삼아라. 그리고 성명을 기록하여 보고하라." 함주로도 마찬가지로 다민족잡거지구였다. 인구는 한인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해인, 거란인이고 일정한 수량의 발해인이 있었다. <금사.해왕회리보전>에 따르면, "태조는 요나라 군대를 달로고성(達魯古城)에서 격패시켰고, 9백의 해영(奚營)이 투항했다." 구백해영은 한주(韓州, 지금의 길림성 이수)에 거주했다. 수국원년 구월, 해인은 여진장수 완안은술가(完顔銀術可)를 따라 황룡부(黃龍府)를 공격한다. 그해 말, 금나라는 함주로를 설치하고, 구백해영을 함주로 관할구에 편입시킨다. 금군이 함주를 점령할 때, 여러 부족이 연이어 투항해 왔다. 그동안 한인, 거란인, 발해인들이 차례로 귀순한다. 

 

함주로설치초기에는 맹안모극제도를 실행하지 않았다. 개략 천보2년에 비로소 맹안모극제도를 실행하기 시작한다. <금사.태조기> <병지>등의 기록을 보면, 그해에 해인(奚人) 소보(蕭寶), 을신(乙辛)등이 맹안모극이 된다; 요인(遼人) 와리야(訛里野, 아마도 거란인)는 북부 130호로 1모극이 된다; 한인(漢人) 왕육아(王六兒)는 여러주의 한인 65호로 1모극이 된다; 요나라 의주절도사 유굉(劉宏)은 3천호를 데리고 항복하여 맹안이 된다; 왕백룡(王伯龍)은 2만명을 이끌고 항복하여 세습맹안이 되고, 은주지주(銀州知州, 지금의 요녕성 철령시) 겸 쌍주지부(雙州知州, 지금의 요녕성 법고)가 된다. 그외에 요나라에서 투항한 장수 곽석(霍石), 한경화(韓慶和)도 맹안이 된다; 용화주(龍化州)에서 투항한 장응고(張應古), 유중량(劉仲良)도 맹안이 된다; 한인 이효공(李孝功), 발해이가(渤海二哥)가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여, 각각 이끄는 무리의 맹안이 된다. 천보3년, 요나라사람 양순경(楊詢卿), 나자위(羅子韋)가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여, 각각 이끄는 무리의 모극이 된다.

 

금나라제도대로라면, 3백호가 1모극이고 10모극이 1맹안이다. 함주로에서 맹안모극을 설치할 때, 엄격하게 이 규정을 따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항복하는 사람이 데려온 호수는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저 구체적인 상황에 근거하여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6,70호, 1백여호도 모극을 설치해주고, 3천호가량이면 맹안을 설치한다. 왕백룡은 2만인을 데리고 왔는데, 1호를 5인으로 계산해도 4천호이다. 그리하여 그는 맹안을 수여받는 동시에 지주의 관직에도 임명되었다. 함주로도통은 맹안, 모극을 임명한 후, 그 성명을 보고해서 중앙정부에 등록했다. 함주로와 앞에서 언급한 남로는 여진통치자의 원래 요나라 주현지구에서 맹안모극제도를 실시한 대체적인 상황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동북지구에 보편적으로 맹안모극을 설치하다.

 

천보4년에서 7년, 금나라는 연이어 요나라의 상경도(上京道)와 중경도(中京道)를 점령한다. 여진통치자는 마찬가지로 각족지구에 맹안모극제도를 실행한다. 4년, 태조는 모극 신알특랄(辛斡特剌), 이랄굴사(移剌窟斜)를 보내어 임황부(臨潢府)로 보내 항복을 받게 한다. 한인 모자렴(毛子廉)이 2천6백호를 이끌고 귀순한다. "그에게 무리를 이끌고 은패를 차고 아직 항복하지 않은 군민들의 투항을 받아내도록 했다"(<금사.모자렴전>). 금나라제도에 은패는 맹안에게 수여한다. 이를 보면, 모자렴이 2,600호를 가지고 맹안의 직위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금태종 천회원년 십일월, 태종은 공명선두(空名宣頭, 이름을 빈칸으로 한 임명장)와 은패를 상경로 군수 실고내(實古乃), 파로화(婆盧火)등에게 주어, 그들이 편리하게 직위를 수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상경로관리들은 정복하고, 귀순한 민호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맹안모극으로 편제하여 관할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천보6년 정월, 금군은 중경(中京, 지금의 내몽골 영성)을 점령하고, 중경도통사로(中京都統司路)를 설치한다. 이어서, 금태조는 완안달나(完顔撻懶)에게 병사를 이끌고 요나라 중경도의 해인지구를 경략하고, 해로(奚路, 六部路)를 설치하게 했다. 해에는 13부(部), 28락(落), 101장(帳), 362족(族)이 있었다. 완안달나가 해인지구를 수습하는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7년 육월, 요나라에 의해 임명된 해왕(奚王) 회리보(回離保)는 금나라에 반기를 들고 황제를 칭한다. 오월, 해로도통 완안달나가 속고(速古), 철리(啜里), 철니(鐵尼)부 13암(巖)을 공격하여 모조리 평정한다. 회리보는 수하에게 피살당한다. 회리보가 죽은 후, 해인은 차례로 복속한다. 완안달나는 해부족을 평정한 후, 관직을 설치할 것을 주청올린다. 금태조는 조서를 내려 "동경발해의 예에 따라 천호, 모극을 설치하라."고 한다. 그후 완안달나는 군대를 이끌고 계속하여 건주(建州, 지금의 요녕성 건평 서쪽)지구의 거란부족을 공격한다. <금사.창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요나라의 외척 요련소고아(遙輦昭告牙)의 부족이 건주에 있었다. 사야는 기습하여, 그의 처자식과 호족들을 붙잡았다. 완안달나는 다시 공격하여, 그의 장수 갈로조(曷魯燥), 백철갈(白撤葛)을 죽이고, 항복한 민호 천여는 금원현에 귀속시킨다. 조서를 내려 은패 10개를 추가로 하사하였다. 다시 요련(遙輦)의 2부(部)의 항복을 받아내고, 다시 흥중(興中)의 부대를 격파하고, 건주의 관속이 항복하여 산채 스물, 촌보 오백팔십을 얻는다. 아홀(阿忽)은 다시 소고야를 격패하고, 그의 관민들 중에서 항복하는 자가 아주 많았다. 소고아는 형세가 형세가 불리해지자 역시 항복한다. 흥중, 건주가 모두 평정된다. 조서를 내려 장병들에게 상을 내리고, 새로 얻은 백성들을 초안(招安)했다. 완안달나는 요련의 9영(營)을 9맹안으로 할 것을 청했다. 황상은 주변을 빼앗은 공로를 인정하여 4개 맹안을 소고아로 하여금 직접 이끌도록 했다.  5개의 맹안의 도수는 완안달나로 하여금 사람을 골라서 수여하게 한다." 완안달나가 거란의 여러 부족을 정복한 후, 마찬가지로 맹안모극을 두어 관할했다. 요서지구의 한인, 발해인도 역시 남로, 함주로의 모델을 따라, 맹안모극을 설치하고, 부주의 아래에 두었다.

 

금태조 말년, 원래의 요나라 동경도, 상경도, 중경도의 주현지구에는 보편적으로 맹안모극제도가 설치된다. 이를 통해 발해, 거란, 해, 한등 각 민족을 통치했다. 각족의 맹안모극은 통상적으로 본족의 맹안, 모극관리가 본족의 민호를 관할했다. 맹안,모극관리는 본로장관이 주로 임명했다. 조정이 임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맹안, 모극관리의 임명경로는 두 가지이다: 첫째, 새로 점령한 지역에서 각족에서 명망있고, 자산있고, 금나라에 성심성의껏 귀순한 사람을 맹안으로 삼고, 관리로서의 재능이 있는 사람을 모극으로 삼았다. 둘째, 귀순한 전 요나라관리, 각족수령을 임명했다. 인원수의 다소에 따라 맹안 혹은 모극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한인, 발해인의 사회경제발달수준은 여진인보다 훨씬 높았다. 그들의 맹안모극은 일가일호의 조전(租佃)개체경제를 기초로 했다. 맹안모극의 장관이 관할하는 맹안모극호들과는 혈연관계가 없었다. 다만, 맹안모극제도는 정치, 군사, 생산의 삼위일체의 특징이 있고, 장관은 세습하게 되는 특권이 있으므로, 맹안모극호는 장관에 대하여 인신이 종속되는 관계가 강화되게 된다.

 

한인,발해인의 맹안모극이 폐지되다.

 

금나라초기에는 한인, 발해인등에게도 강제로 맹안모극조직에 편입되게 했다. 이는 원래의 요나라 주현지구에서는 퇴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금태종초기, 남경로(치소는 지금의 하북성 노룡)의 군수 완안종망(完顔宗望)이 평주(平州)지구에서 맹안모극제도를 실행할 때, 한족관료와 백성들의 강렬한 반발에 부닥친다. 여진통치집단도 여진족의 특징을 지닌 맹안모극제도가 한인의 조전개체경제사회문화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금태종 천회2년, "완안종망은 풍속이 다르고 백성들이 불편하다는 이유를 들어 맹안모극제를 폐지하고, 단순히 장리(長吏)를 설치하고 그 아래는 한인의 관직명칭을 썼다"(<금사.병지>). 이때부터, 금나라는 한인지구에 맹안모극제도를 더 이상 시행하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중원지역에는 원래의 부, 주, 현의 각급 행정조직이 남아있게 된다.

 

천회6년 팔월, 금태종은 조서를 내려, "주군의 직원명칭과 봉급을 중외(中外)를 나눈다" 정리정돈을 시작하여 요나라, 송나라의 주현제도를 실시한다. 천회8년, 요동, 요서지구의 현제(縣制)를 회복시킨다. 왕적(王寂)은 <선군행장>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그의 부친 왕초(王礎)는 명주(洺州) 계택현령(鷄澤縣令)을 대리하고 있었다. "요동에 다시 군,현의 수령을 둘 때, 모두 당시 치적의 명성이 있는 자를 뽑았다. 선군(왕초)는 해주(海州) 석목령(析木令)이 된다." 중원지역에서 정치적으로 실적을 낸 지방관리들을 옮겨가게 한 것은 이 지역의 주현기구의 업무를 하루빨리 정상화하기 위함이었다. 금나라가 요나라지역에서 현제를 회복시킨 원인은 개략 중원의 주현지구통치경험을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현제가 맹안모극제도보다 훨씬 한인, 발해인들의 통치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요나라땅의 현제를 회복시키고 이후 요동, 요서지구의 한인, 발해인 맹안모극은 폐지시키기 위한 준비작업을 시작한다. 개혁과 조정을 거쳐, 금나라의 부, 주, 현기관은 점차 완비되고, 관제가 통일된다. 금희종 천권3년, 한인, 발해인맹안모극은 정식 폐지된다. 금태조 수국2년부터 금희종 천권3년까지, 동북지구의 한인, 발해인에게서 20여년간 실행되어오던 맹안모극제도는 전면적으로 폐지된 것이다. 이때부터 금나라의 지방행정기구에 설치된 맹안모극은 단지 여진, 거란, 해등의 북방민족사회에서만 실행됙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