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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남송(南宋)이 항주(杭州)를 도읍으로 정한 이유는....?

by 중은우시 2023. 2. 16.

글: 심경독사(深更讀史)

 

정강지치(靖康之恥)이후 북송(北宋)이 멸망하고, 황족은 일망타진된다. 송휘종(宋徽宗)의 아홉째아들이자, 송흠종(宋欽宗)의 동생인 강왕(康王) 조구(趙構)만이 유일하게 그물에 걸리지 않은 물고기(漏網之魚)가 되었다. 그는 대신들의 옹립으로 하남(河南) 상구(商丘)에서 황제로 등극하니 그가 바로 송고종(宋高宗)이다. 그러나, 상구에서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금나라병사들이 쳐내려오기 때문에 황급히 양주(揚州)로 도망쳐야 했다. 다시 금나라군대가 양주로 쳐들어오자, 그는 다시 낭패하여 장강을 건너 진강(鎭江)을 거쳐, 항주(杭州)로 간다.

 

그러나, 항주도 안전하지 않았다. 1129년(건염3년) 구월, 금나라군대가 다시 장강을 건너 남으로 쳐내려온다. 송고종은 즉시 신료들을 데리고 남으로 도망친다. 십월에 월주(越州, 지금의 절강성 소흥)에 도착하고, 이어서 다시 명주(明州, 지금의 절강성 영파)로 간다. 그리고 다시 명주에서 정해(定海, 지금의 절강성 진해)로 간다. 그후 배를 타고 온주(溫州)로 간다. 건염4년 여름에 이르러 금나라군대가 강남에서 철수한 후, 그는 다시 소흥부(지금의 절강성 소흥), 임안부(臨安府, 지금의 절강성 항주)등지로 되돌아온다. 이를 보면 항주는 남송 혹은 조구에 있어서 안정적인 지방이 아니었다. 그렇긴 하지만, 조구는 임안을 남송의 도성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항주가 안전하지 않은데도 왜 조구는 항주에 머물며 항주를 도읍으로 삼았을까?

 

조구가 남으로 계속 도망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바로 금나라군대에 쫓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금나라군대에 저항할 결심이나 담량도 없었다. 방대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던 북송,남송은 이미 외적들에게 여러번 패전하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구는 정강지치를 직접 겪은 사람이고, 그는 일찌기 금나라군대와 의화(議和)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직접 느꼈다. 그래서 조구는 금나라군대와 감히 싸울 생각을 못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실력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항주를 도성으로 정한 것은 안전하지 못했다. 소흥31년(1161년) 가을, 금나라의 해릉왕(海陵王) 완안량(完顔亮)이 대거 남침한다. 조구는 다시 항주에서 도망치려고 준비했다. 만일 완안량이 돌연 피살당하지 않았더라면, 조구는 분명 다시 도망쳤을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그가 다음해에 퇴위를 선택한 원인중 하나일 것이다.

조구는 남송의 개국황제이고, 계속 도망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수도는 필요했다. 조구도 안정을 찾아야 했다. 매일 도망만 다닐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도망만 다닌다면 황제의 자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북방의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는 것은 확실히 가능성이 없었다. 비록 악비등은 계속 북벌하고자 했지만, 조구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남방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는 것만 해도 이미 괜찮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당연히, 가장 관건적인 것은 금나라군대도 남하하여 남송을 멸망시킬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비록 여러번 남하했지만, 효과는 모두 좋지 못했다. 남송도 악비같은 무장들이 북벌을 계속 계획할 정도로 실력이 여전히 괜찮았던 것이다.

 

조구는 안정을 찾기 위하여, 금나라와 의화(議和)를 한다. 비록 치욕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더 이상 두려움에 떨 필요는 없었다.

 

항주라는 지방은 괜찮았다. 자연조건이건 경제발전이건 모두 괜찮았다. 소위 위에 천당이 있으면 아래에 소항(蘇杭, 소주항주)이 있다는 말처럼, 항주는 풍경이 아름답고, 기후가 사람살기 좋아 풍수길지라 할 수 있다.

 

당시 일부 대신들은 남경을 도읍으로 삼자고 건의한다. 그러나 남경이 좋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적합하지 않았다. 북방과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것이다. 리스크가 너무나 큰 것이다. 만일 항주라면 일단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도망칠 기회는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