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이비웅(李飛雄)사건: 북송 최대의 사기극

by 중은우시 2023. 3. 16.

글: 조대반(趙大胖)

 

1

 

북송 태평흥국3년(978년) 봄의 어느 저녁, 봉상(鳳翔) 주질(盩厔, 지금의 섬서성 周至縣, 중국발음으로는 盩厔, 周至가 같다)의 관청 마굿간에 관마(官馬)를 탄 남자가 출현한다. 그는 스스로 개봉(開封, 북송의 도성)에서 온 황제의 사자(使者)라고 하면서 변방으로 가서 공무를 집행해야 하니, 말을 몇 필 내달라고 요구한다. 

 

마굿간을 지키는 병사들의 우두머리는 의심이 들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그에게 문건을 내놓거나 혹은 신분을 증명할 물건을 내놓을 것을 요구한다. 이 사자는 당황하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으면서 품 속에서 조정의 고관들이 사용하는 말끈(馬纓)을 꺼내어 그에게 보여준다.(고대의 말끈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군수물자였다. 일반백성은 말을 키울 수는 있지만, 말을 키우더라도 말에 말끈을 맬 수는 없었다.)

 

병사는 개봉의 신물을 본 적이 없어서, 기본적으로 진위를 가릴 능력이 없었다. 그저 사자의 당당한 태도를 보고 "이 자는 진짜이다"라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그는 사자의 요구에 따라 말을 몇 필 제공하고 다시 병사 한명을 길안내하도록 붙여준다. 

 

사자는 병사와 말을 데리고 출발했다. 떠나기 전에, 그는 고개를 돌려 역참(驛站)의 하급관리인 요승수(姚承遂)를 보고는 소리친다: "너도 따라와라!"

 

요승수는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그를 따라나서게 된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하러 가는지도 모른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그저 개봉에서 온 사자를 따라가서 기밀공무를 수행해야한다는 것뿐이었다.

 

2

 

그런데, 자칭 '개봉에서 온 사자'라는 자는 사자가 아니다. 그는 단지 무료한 나머지 일을 벌인 관료자제였다. 

 

그의 이름은 이비웅(李飛雄)이고, 진주(秦州, 지금의 감숙성 천수시 진주구)의 2인자인 절도사판관(節度使判官) 이약우(李若愚)의 아들이다. 이비웅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하지 않았으며, 말썽만 부리는 아이였다. 이약우도 그를 어찌할 수가 없게 되자 그를 포기한다. 그리하여 그를 사회에 내보내 고생을 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비웅은 사회에 나가서 고생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를 가지고 놀았다. 오랫동안 하남 개봉, 하북 대명(大名), 산동 요성(聊城)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각지의 건달들과 어울려 술마시고 도막하면서 부친과 같이 지낼 때보다 훨씬 잘 살았다.

 

한동안 이렇게 놀다가, 이비웅은 그런 생활도 재미가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큰 사고를 치려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부친을 따라 진주에서 오래 지냈다. 그리하여 현지의 창고, 주둔지, 지형을 모두 잘 알았다. 그리고 그곳은 변경에서 멀지 않기 때문에 일이 잘못되면 토번(吐蕃)으로 도망쳐서 거기서 관직을 얻어 일생동안 부귀영화를 누리면 될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첫번째 목표를 주질로 삼는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장인인 장수영(張秀英)이 그곳의 현위(縣尉)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몰래 장인의 관마를 훔쳐내어 첫단계로 주질의 마굿간에 간 것이다. 

 

3

 

이비웅은 품 속에 개봉의 암시장에서 구매한 마영(馬纓)을 품고, 관마로 구성된 마대(馬隊)를 이끌고, 병사가 앞장서고, 하급관리인 요승수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확실히 황제가 보낸 흠차(欽差)로 보였다.

 

그들 일행은 계속 서쪽으로 가서 농주(隴州, 지금의 섬서성 보계 농현), 오산현(吳山縣, 지금의 섬서성 보계 진창구)에서도 주질에서와 똑같은 방식으로 관리들을 속여서 자신을 따르는 인원을 늘인다. 그해 오월에 당당하게 청수현(淸水縣)에 도착한다.

 

당시 진주에서는 마침 귀순해왔던 강족(羌族)과 토번(吐蕃)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조정에서 무장들을 파견하여 청수현에서 반란을 평정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나중에 소의군절도사(昭義軍節度使)가 되는 전인랑(田仁朗), 송태조의 사촌동생으로 나중에 영원군절도사(寧遠軍節度使)가 되는 유문유(劉文裕), 나중에 양업(楊業)을 핍박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은 왕신(王侁), 나중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使)가 되는 마지절(馬知節)이 있었다. 모두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이비웅은 이들을 속이기 위해 산 속에 호랑이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걸어서 호랑이굴로 들어간 것이다.

 

이비웅이 이렇게 대담할 줄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청수현에 도착한 후, 자신은 조광의(趙光義, 송태종)가 진왕(晋王)으로 있을 때의 심복이라고 말하며, 황제의 이름으로 모든 무장들을 소집한다. 그후 자신이 데려온 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모조리 포박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반란을 평정하는데 적극적으로 하지 않으면서, 제자리에 머물고 있으니 모조리 주살하겠다.

 

무장들은 모두 멍해진다. 땅바닥에 꿇어앉아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때 전인랑만은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소리쳤다: "폐하께서 우리를 죽이시려면 조서는 내려주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비웅은 냉소를 지으면서 말한다: "당초 영남(嶺南)의 봉주지주(封州知州) 이학(李鶴)이 법과 기율을 어겼을 때, 폐하가 그를 죽이면서 조서를 내렸던가?"

 

이학이 주살된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송태종의 일관된 스타일도 알고 있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되었다.

 

4

 

그러나, 이비웅은 즉시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 이비웅이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는 이들을 남겨서 자신의 부하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병사들을 이끌고 토번에 투항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장수들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들 무장들을 묶어서 말에 태우고 그들을 진주로 끌고가서 목을 칠 것이라고 겁을 준다.

 

당연히 이비웅은 이들을 데리고 감히 진주로 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부친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가면 바로 들통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이들 무장들이 용서를 빌며 자신의 말을 따르겠다고 하게 하기 위함이다. 과연 유문유(劉文裕)가 입을 연다. "사신께서는 폐하의 심복입니다. 나도 폐하의 친척입니다. 예전에 진왕부에서 일한 적도 있습니다. 우리는 동료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신께서는 우리를 살려주시지요."

 

이비웅은 그 말을 듣자, 이젠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유문유를 단독으로 만나서 그에게 말한다: "그대는 나와 함께 부귀를 누리겠는가?"

 

그의 돌연한 말에 유문유는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그는 즉시 그렇겠다고 거짓으로 응답한 후 반격의 기회를 노린다. 과연, 이비웅은 그를 풀어주고, 그에게 다른 사람들도 회유하도록 시킨다.

 

유문유는 말을 몰고 전인랑에게 간다. 그리고 그에게 귓속말로 몇 마디 한다. 이비웅은 유문유가 그를 회유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유문유는 전인랑과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귓속말을 마치자, 전인랑이 그대로 말에서 쓰러져  땅바닥에 떨어진다. 그리고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비웅은 기이하게 여겨 앞으로 나아갔는데, 전인랑은 이미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을 시켜 전인랑을 묶은 것을 풀어주도록 한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묶인 것을 풀어주자마자 전인랑은 즉시 튀어올라 이비웅을 붙잡는다. 그후 유문유도 싸움에 가담한다. 두 무장이 힘을 합치지, 이비웅은 적수가 되지 않았고, 바로 붙잡혀버린다. 전인랑이 그를 묶을 때까지도 그는 "전인랑이 모반하여 사자를 죽이려 한다"고 소리쳤다.

 

5

 

이 사건이 개봉에 보고되자, 송태종은 대노한다. 

 

이비웅과 그의 부친 이약우, 그의 장인 장수영을 포함하여 '삼족'을 주살한다; 당초 이비웅과 함께 술을 마시고 도박을 했던 하대거(何大擧)등도 모조리 목을 자른다; 그와 함께 다닌 주질의 역참관리 요승수도 요참(腰斬)을 당한다; 최초로 이비웅에게 말을 내줬던 주질의 마굿간병사도 일족을 죽여버린다.

 

가장 억울한 사람은 좌찬선대부(左贊善大夫) 이약졸(李若拙)이었다. 송태종은 그의 이름만 보고 이약우와 친형제라고 여긴다. 대지여우대교약졸(大智如愚大巧若拙)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그까지도 붙잡아서 죽이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자세히 조사해보니, 그들은 친척이 아니었다. 다만 두 사람은 관계가 좋았다. 비록 이약졸은 이 일을 전혀 몰랐지만, 그래도 관직을 파면당하고 사문도(沙門島)로 유배를 간다(물론 나중에 다시 풀려나서 돌아왔다). 

 

송태종은 살인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제도상으로 유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할 필요가 있었다. 그후 그는 두 가지 조치를 내놓는다:

 

첫째, 각 문신무장은 이비웅의 사례를 거울로 삼아, 자신의 자식을 잘 관리해라. 만일, 관리하지 못하겠으면 개봉으로 보내라. 그러면 내가 직접 관리하겠다.

 

둘째, 이후 조정에서 보내는 모든 사자는 특별히 만든 은패(銀牌)를 증빙으로 삼는다. 더 이상 말로만 하거나 마영같은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이렇게 관료자제 하나가 벌인 사기극은 끝났다. 가련하게도 그 이름도 대단한 무장들이 가짜 사자의 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전혀 반항하지 못했으며, 하마터면 목이 날아갈 뻔했다. 송태종이 얼마나 엄하게 무장들을 대했는지를 알 수 있는 일면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