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묘안관사(猫眼觀史)
모주석과 같은 중국의 영수도 전쟁시대에는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으면서, 다른 이들의 냉대를 받았었다. 특히, 1932년 10월애 개최된 영도회의(寧都會議)후 그는 한때 홍군 지도층에서 철저히 배제된 적도 있다.
"사실은 웅변보다 강하다." 1935년 1월에 개최된 준의회의(遵義會議)에서 박고(博古)를 대표로 한 잘못된 노선으로 당과 홍군은 사상유례없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여기에서, 모택동은 마침내 당중앙과 홍군의 지도자지위를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준의회의때 한 사람의 그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오랫동안 모주석이 가슴에 담아두게 된다.
"너, 모택동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아느냐? 너는 기껏해야 <손자병법> <삼국연의>를 봤을 뿐이잖나. 군사지식이라는 것이 모두 거기에서 배운 것이고. 지금은 쓸모가 없다. 네가 또 뭘할 수 있느냐. 그저 <손자병법>에서 말하는대로 지휘하고 싸우는 것뿐이지 않느냐?"
당시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잘못을 알면 바로 고치고, 음모를 꾀하지 않는다(知錯改錯, 不搞陰謀)"라는 개풍(凱豊)이다. 당시를 되돌아보면, 그는 준의회의때 모택동을 가장 멸시했던 중앙위원이다.
1962년, 모택동은 일찌기 일본방문단과 그 당시의 일들을 얘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준의회의때, 개퐁은 나의 싸우는 방식이 고명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그저 두 책을 보고 따라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는 삼국연의이고 다른 하나는 손자병법이다. 기실 싸우는 것을 어찌 책만 따라서 할 수 있겠는가. 그후 어쩔 수 없이 나는 손자병법을 뒤져봐야만 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회의가 끝난지 2달후에, 이전까지는 모주석을 비판했던 개풍이 입장을 바꾸어 모택동을 옹호하게 된 것이다. 특히 나중에 장정에 나섰을 때 어러번의 정치적 전환점마다 그는 계속 굳건하게 모택동의 노선을 지지했다.
예를 들어 사와회의(沙窩會議), 모아개회의(毛兒蓋會議), 아계회의(俄界會議)떄 개풍은 선명하게 모택동의 노선을 지지하고, 장국도의 노선을 반대했다.
개풍과 모택동의 관계를 살펴보면 시작은 비난과 불신이었지만 나중에는 신뢰하고 탄복하는 것이 되었다.
개풍의 본명은 하극전(何克全)이고, 1906년 강서 평향에서 태어난다. 15세에 공청단에 가입하고, 대혁명실패후 모스크바로 가서 공부를 한 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1930년 귀국후에는 혁명의 길로 들어선다.
당시 홍군지도자들 중에서, 개풍은 이론과 선전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예를 들어, 반우회의(班佑會議)에서, 그는 명을 받아 중앙선전위원회를 조직한다. 나중에 중공중앙이론간행물 <간부필독>의 편집위원이 된다.
1936년 1월 17일, 와요보회의(瓦窑堡會議)떄 홍군동정계획이 통과된다. 개풍은 그후 모택동, 장문천과 함께 출정하여 동정기간동안의 군중선전업무를 아주 뛰어나게 완성한다. 5월, 중앙당보위원회가 설립될 때 그는 잡지의 편집, 출판, 발행업무를 책임진다.
풍운이 격변하던 시대에, 항전발발후 복잡한 국내정세에 중앙정치국위원인 개풍은 각종 중요회의에 참석하면서 여러 중대방침의 제정에 모두 참가한다.
강서사나이의 직설적인 성격을 지닌 그는 내심으로 모택동을 인정한 때로부터, 그의 모택동에 대한 옹호는 절대적이었다. 장국도의 잘못된 노선을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고발한 것을 제외하고도 1937년말 왕명의 잘못된 노선이 득세할 때도 중요한 순간에 그는 여전히 모주석의 편에 섰다.
그후의 혁명생애에서 개풍은 대부분의 시간을 선전이론전선에서 분전했다. 그는 앞뒤로 중공중앙 선전부, 장강국, 남방국, 동북국의 선전업무를 책임진다.
그가 이처럼 뛰어난 선전술을 갖게 된 것은 당초 소련에 유학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이론수준이 뛰어나며, 문필실력도 상당했다. 그는 일찌기 백편이상의 글을 써서 국내외형세와 당의 방침정책을 선전했으며, 중국공산당의 선전이론업무방면에서 지울 수 없는 공을 세웠다.
1945년 중공7대때, 개풍은 준의회의때의 잘못으로 인하여 결국 중앙위원에 오르지 못한다. 그러나 이 일은 모택동에게 큰 유감으로 남았다. 다행히 개풍은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계속 열심히 일만 했다.
건국후, 동북국위원 겸 선전부장인 그는 심양시위서기가 된다. 알아야 할 것은 당시의 심양은 중앙직할시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이 점만으로도 당중앙이 개풍을 얼마나 중용하고 신임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952년 9월, 북경으로 돌아온 그는 선전부 부부장, 마르크스레닌학원 원장이 되어, 당의 이론공작분야에서, 특히 전국에 과도시기총노선을 창도하는 일에서 개풍과 선전부의 몇몇 중요지도자들은 계속하여 노력했다.
아쉽게도 그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19554년 나이 겨우 49살인 그는 북경에서 병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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