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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도주장군(逃跑將軍) 손원량(孫元良)": 탐재호색(貪財好色)한 그는 103살까지 살았다.

by 중은우시 2022. 7. 25.

글: 민국삼십칠(民國三拾柒)

 

1924년, 손중산(孫中山) 선생은 군벌을 타도하고, 군사인재를 배양하기 위하여 이름도 유명한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를 설립한다. 모두 알다시피 황포군관학교의 앞의 7기동안 호종남(胡宗南), 장영보(張靈甫), 두율명(杜聿明)등 우수한 장군들을 배출해냈고, 그들중 대부분은 "황포계"로 '교장' 장개석(蔣介石)이 최고지도자로 성장하는 기반이 된다. 그중에는 황포 1기출신의 손원량이 있는데, 장개석이 크게 인정한 인물이다.

 

장군으로서 손원량은 잘 싸웠고, 적지 않은 평가할만한 우수한 전적도 있다. 송호항전(松滬抗戰)때 그는 부대를 이끌고 묘행진(廟行鎭)에서 일본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으며, 이 전투는 당시 국제적으로 '국군이 최초로 일본군을 격패시킨 전투'로 평가되었다. 그리하여 손원량은 큰 상과 훈장을 받는다. 그리고 88사단의 사단장으로 승진한다. 상해에서 철수한 후, 손원량의 88사단은 다시 남경보위전에 참가한다. 1944년, 그는 29군을 이끌고 독산(獨山)에서 일본군을 막았다. 이곳이 일본군의 중국침략에서의 종착역이 되게 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전공이 혁혁한 항일영웅이 '도망장군' '소대종(小戴宗, 대종은 수호전의 神行太保)'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손원량이 손자병법의 삼십육계에 정통했는지는 모르지만, 삼십육계 주위상(走爲上)을 가장 잘 운용한 사람으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장개석선생으로부터 높이 평가받았고, 동료들도 인정하고 밀어주었기 때문에, 손원량은 순조롭게 국민혁명군 제1사 1단의 단장에 올랐다. 그러나, 공부성적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탁상공론이다. 손전방(孫傳芳)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작전경험부족으로 손원량의 부대는 야간에 기습을 당하여 일패도지한다. 이때 원래 부하를 끌어모아 신속히 반격해야할 단장인 손원량은 부대를 버려두고 혼자서 도망쳐버린다.

 

지휘관을 잃은 부대는 그저 모래알과 같다. 금방 패퇴하게 되고, 여러 전략적 요충지를 빼앗기게 된다. 손원량이 전투를 앞두고 도망쳤다는 말을 듣고, 장개석은 대노한다. 그는 직접 전선으로 달려가 한바탕 욕을 하고, 손원량을 총살하여 일벌백계로 삼겠다고 소리친다. 당사자인 손원량은 그 말을 듣고 놀라서 감히 장개석의 앞에 나오지도 못한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설득하고, 또 손원량은 충성심이 있으며, 처음 전쟁터에 나간 것이라는 점등을 고려하여, 장개석은 그에게 은혜를 베푼다. 그리고 그를 일본으로 유학보낸다.

 

모든 일에 처음이 있으면 다음도 있는 법이다. 도망경험이 있는 손원량은 남경보위전때 다시 한번 도망가게 된다. 당시 88군단은 일본군의 맹렬한 공격을 버텨내기 힘들었고, 진지가 거의 함락될 위기에 처한다. 손원량은 다른 부대가 아직 저항하고 있는 틈을 타서,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철수해서 하관(下關)까지 물러난다. 거기서 장강을 건너 도망칠 계획이었다. 예전의 친구이자 제36사의 사단장인 송희렴(宋希濂)이 총구를 들이밀고 그를 설득하자, 손원량은 할 수 없이 다시 병력을 이끌고 중화문(中華門)으로 가서 전투에 참가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손원량은 다시 한번 부대를 남겨두고, 혼자서 도망쳐버린 것이다. 그날 사단총사령부에서 회의를 마친 후, 그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한 기원(妓院)으로 숨어들어간다. 포주에게 금덩이를 건네줄 뿐아니라, 그녀를 양어머니로 모시면서 반달가량 숨어있다가 나오게 된다. 그의 88사단 부하들은 지휘관이 없어지자, 궤멸하여 철수할 때 대부분 장강을 건너지 못하고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 죽임을 당한다. 아쉽게도 독일식 무기로 무장한 정예부대가 손원량때문에 전멸해버린 것이다. 

 

전쟁터에서 도망치는 뛰어난 재주를 가진 것 이외에, 손원량의 탐재호색도 유명했다. 항전대치기간동안 손원량은 재정부에서 국방공정에 쓰도록 지급한 돈을 사적으로 챙겼을 뿐아니라, 백성들이 항전을 지지하기 위해 기부한 물자까지도 팔아서 현금으로 바꾸어 자기의 주머니를 채웠다. 손원량은 이 돈을 가지고 온갖 향락을 즐긴다. 남경에는 별장까지도 만들어 놓았다.

 

송호회전때, 상해의 학생대표들이 88사단 총사령부로 위문을 왔다. 색심이 동한 손원량은 그중 한 예쁜 여학생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교묘한 말로 그에게 부대내에 며칠 더 놀다가도록 설득한 후, 색심을 채우려 했다. 만일 부사단장 풍성법(馮聖法)이 눈치채고 막지 않았다면 그는 원하는대로 욕심을 채웠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하여 손원량은 전혀 부끄럼없이 말했다: "영웅은 미인을 좋아한다. 나같이 전공을 세운 사람이 이 정도 일은 저지르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다."

 

1949년 손원량은 대만으로 간다. 우울증에 걸린 그는 관직을 사퇴하고 사업을 시작한다. 일찌기 서상침직공사(瑞祥針織公司)의 동사장을 맡기도 했다. 말년에, 그는 자신의 회고록 <억만광년중의 일순간>을 쓴다. 그는 2007년 타이페이에서 서거하니 향년 103세였다. 가족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유골을 남경으로 돌려보낸다.

 

하나 언급할 일은 손원량의 다섯째 아들인 손상종(孫祥鍾)이 바로 진한(秦漢)으로 유명한 영화배우이다. 그는 국제적으로 여러 상도 받았고, 임청하(林淸霞)와 21년간 서로 사랑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