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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이일순(李一純): 4번의 결혼, 3명은 유명인, 이혼후 2명의 여동생이 2명의 전남편과 결혼하다.

by 중은우시 2022. 12. 12.

글: 탁설(濯雪)

이일순

민국시기, 수천년동안 봉건예교의 억압을 받다가 결혼자유가 이루어진 후, 많은 급진적인 남녀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애정과 혼인에 대한 선봉적인 이념은 심지어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특이'하고, 현대인들마저도 따르지 못할 정도있다.

 

그중 평생 혁명에 집착한 기여자(奇女子)가 있다. 일생동안 4번 혼인하고(하마터면 5번까지 혼인할 뻔했다), 그중 3명의 남편은 아주 유명한 역사인물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녀가 앞의 두번 이혼한 후에 자신의 여동생을 이전의 자신의 남편들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이는 고금에 없던 일이다. 그러나 그 원인을 살펴보면 탄식할 수밖에 없다.

 

(1) 제1차 결혼과 이혼

 

그녀의 첫번째 남편은 양개지(楊開智)이다.

중국근대의 저명한 교육가인 양창제(楊昌濟)의 아들이고, 혁명열사 양개혜(楊開慧)의 오빠이다. 양개지도 저명한 혁명가이다. 그의 이력은 당연히 범상치 않다. 그렇다면 그의 부인도 분명 범상치 않을 것이다.

 

그녀가 바로 이일순이다. 원래이름은 이숭영(李崇英)이다. 1899년 2월 28일 호남 장사의 문인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두 여동생 이숭덕(李崇德), 이숭선(李崇善)과 함께 어려서부터 양호한 교육을 받았다. 기실 그녀들 세 자매의 이름을 보면 영웅, 미덕, 선량을 숭상했다. 그녀는 학식있는 집안출신인 것이다.

 

이일순은 저명한 주남여중(周南女中)을 다녔다. 주남여중은 중국근대의 저명한 교육가 주검범(朱劍凡) 선생이 만들었고, 학교이름은 <시경(詩經)>의 "득성인지화자(得聖人之化者), 위지주남(謂之周南)"에서 따온 것이다. 주남여중은 '근대중국선봉여성의 요람'이라는 명칭을 얻어, 당시에 아주 유명했다. 적지 않은 유명한 스승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서특립(徐特立), 장유일(張唯一), 주이율(周以栗)등이다. 학교는 적지 않은 여중호걸(女中豪傑)도 배출했다. 예를 들면 저명한 여성혁명가들이 있다. "주남삼걸"로 불리는 향경여(向警予), 채창(蔡暢), 도사영(陶斯詠), 그리고 저명한 작가 정령(丁玲), 저명한 여권운동지도자 노군전(勞君展), 조맹군(曹孟君)등이 있다.

 

이일순은 자질이 우수했고, 용모도 뛰어났다. 주남여중에서도 저명한 재녀형의 미인이었다. 그 '혼돈초개(混沌初開)'의 연대에 그녀가 유명해지지 않기도 어려웠다. 그러므로 일찌감치 적지 않은 재자(才子)들의 관심을 끌었다. 우연하게도 주남여중의 부근에는 더욱 걸출한 학교가 하나 있었다. 바로 호남일사(湖南一師, 호남제일사범학교)이다. 저명한 교육가 양창제 선생이 이곳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모윤지(毛潤之, 모택동), 채화삼(蔡和森), 소자승(蕭子昇)등 걸출한 인재를 배출시켰다.

 

주남여중과 호남일사는 이런 특수한 이웃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두 학교의 재자와 재녀들간에 교류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후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아름다운 인연들이 맺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주남여중의 향경여는 나중에 호남일사의 채화삼에게 시집을 간다; 대재녀 도사영도 일찌기 모윤지와 관계가 밀접했고, 모윤지가 문화서사를 창립할 때 도사영은 자신의 돈을 털어 도와준다. 그리하여 3명의 주주중 한명이 된다; 도사영의 친한 친구인 양개혜는 나중에 모윤지에게 시집을 간다.

 

당시의 이일순은 양창제 선생의 딸 양개혜와 아주 가까운 친구사이였고, 둘은 서로 못하는 말이 없는 사이였다. 나중에 양개혜는 시를 한편 쓰는데, "호유일순자(滬有一純姉), 사이전아회(思伊展我懷). 능식아충장(能識我衷腸), 능별아현우(能別我賢愚)...." 이를 보면 두 사람이 아주 밀접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양개혜는 이일순에게 자신의 오빠인 양개지를 소개해주게 된 것이다.

 

양개지는 이일순보다 1살이 많았다. 당시에 의기풍발, 옥수임풍으로 이일순은 첫눈에 반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결혼을 한다. 당시 이일순의 나이 19살이었다. 1920년 10월 그들 사이의 딸 양전(楊展)이 태어난다.

 

그러나, 이일순과 양개지의 아름다운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또 한명의 걸출한 역사인물이 두 사람의 생활권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2) 제2차혼인과 이혼

1921년, 양개지는 국립북경농업전문학교에 합격한다. 그리하여 처와 딸을 데리고 북경으로 가서 거주하기 시작한다. 1922년, 양개지는 이일순에게 집안을 청소해놓으라고 말한다. 손님이 한분 오실 거라고. 그 손님이 바로 양개지의 호남고향사람인 이입삼(李立三)이었다.

이입삼은 중국노동운동의 초기 가장 유명한 지도자중 한명이었다.

 

당시 나이 겨우 23살이었던 그는 프랑스에 근공검학(勤工儉學)했고, 혁명활동으로 프랑스당국에 의해 강제귀국조치를 당한다. 그는 북경에서 혁명활동을 전개했는데, 비용을 아끼기 위해, 고향사람인 양개지의 집에 잠시 거주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양개지와 비교하면 이입삼이 더욱 우수했다. 그는 학식이 풍부하고, 견식도 넓었으며, 말솜씨도 좋았다. 그리고 이일순과는 나이가 같았다. 이일순이 그를 만난 후, 그에게 끌리지 않기가 힘들었다. 하물며 이일순은 성격이 명랑하고, 열정이 넘친다. 이입삼을 잘 보살펴주게 된다. 이입삼이 그녀의 집에 잠시 머무는 기간동안 두 젊은이는 서로에게 끌리면서 미묘한 감정이 생겨난다.

 

얼마 후, 이입삼은 호남으로 돌아가서 일을 시작한다. 당시 이일순은 북경의 기후와 환경이 익숙하지 않아서 역시 호남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양개지는 그녀에게 이입삼과 같이 가도록 조치한다. 서로 돌봐줄 수 있도록.

 

함께 호남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일순과 이입삼의 감정은 신속히 온도가 상승한다. 이입삼과 이일순은 모두 열정적인 혁명가이고, 감정에 대하여도 열렬하고 낭만적인 타입이며, 둘 다 젊은이였다. 그래서 그다지 많은 것을 생각지 않았다. 이일순은 양개지와의 혼인도 행복했지만, 두 사람의 성격은 그다지 맞지 않았다. 양개지는 성격이 조용하여, 이일순의 성격과는 맞지 않았다. 이일순은 이입삼을 만난 후 다시 명랑해진다. 이일순은 이때 그녀가 이입삼을 만났는데, 그야말로 자신의 진정한 양산백(梁山伯)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를 사랑한다면 그에게 시집을 가야겠다. 그리하여, 이일순은 더 이상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이입삼에게 고백한다. 동시에 그녀는 과감하게 양개지에게 이혼을 요청한다.

 

양개지도 꽉막힌 사람은 아니다. 그도 애정자유를 주장했고, 남성우월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평화롭게 헤어진다.

 

애정을 얻은 이입삼은 불같은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는 호남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직의 파견으로 강서(江西) 평향(萍鄕)으로 가서, 모택동, 유소기등과 함께 안원로(安原路) 광산노동자의 대파업을 지도한다. 이일순도 혁명적이었다. 그녀는 장사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이입삼을 따라 강서로 간다.

 

이일순은 1923년 1월 이입삼과 결혼한다. 이 방면에서 이일순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혁명을 하는 것처럼 시원시원했다. 그러나 제2차혼인전에, 그녀는 한가지 놀라운 일을 벌인다. 즉, 여동생 이숭덕을 전남편 양개지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왜 그렇게 했을까? 생각해보면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일순이 아무리 낭만적이고 혁명적이라 하더라도, 그녀는 어쨌든 여성이고, 여인특유의 온유함과 자애가 있었다. 그녀가 이혼할 때, 겨우 2살된 딸 양전을 양개지에게 남겨놓았다. 아이가 그렇게 어리니, 그녀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양개지가 재혼하면 계모를 만날텐데, 계모가 아이에게 잘 대해줄 수 있을까를 우려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딸이 안심할 수 있는 계모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돌연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여동생 이숭덕을 양개지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이일순의 안목은 정확했다. 이숭덕은 성격이 온유하여 성격이 유순한 양개지와 천생배필이었다. 과연 이숭덕은 양개지와 만나자 바로 서로 뜻이 맞았고, 두 사람은 결혼후에도 행복하게 지내면서 백년해로한다. 당연히 이일순의 딸 양전도 이숭덕이 잘 보살펴주게 된다.

 

(3) 제3차결혼과 이혼

 

이일순은 이입삼과 결혼한 후 아주 행복했다. 이 혁명부부는 뜻이 서로 맞았다. 이일순의 혁명열정이 철저히 자극받아 그녀는 광주농민운동강습소에서 일하게 된다. 심지어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원을 맡기도 했다. 그녀는 이입삼과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낳는다. 이름은 이인기(李人紀)로 짓는다.

 

1925년 10월, 조직은 이입삼을 모스크바로 보내 공산국제(코민테른)집행위원회 제6차확대회의에 참가시킨다. 이일순도 따라간다. 당시 함께 소련으로 간 것은 채화삼(蔡和森) 부부였다.

 

채화삼은 처인 향경여와 서로 싸웠기 때문에, 이미 거의 이혼한 지경이었다. 조직이 두쌍의 부부를 함께 소련으로 보낸 것은 이입삼부부로 하여금 채화삼부부를 잘 다독여 그들의 혼인이 깨지지 않게 하라는 취지도 있었다. 그러나, 최종결과는 엉뚱했다. 이입삼부부는 채화삼 부부의 관계를 유지시키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들 자신의 혼인이 깨지게 된다.

채화삼은 걸출한 혁명가이고, 재능이 뛰어났다. 그는 호남성 상향(湘鄕) 사람이다. 이일순과는 같은 호남사람이고, 서로간에 좋은 인상이 있었다. 당시 채화삼은 몸이 좋지 않았고, 장거리여행으로 피로해서 아주 쇠약하고 수척했다. 처인 향경여는 그와 이혼하자고 하고 있었으므로, 채화삼은 신체와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선량한 이입삼은 그 광경을 보고, 차마 그대로 두지 못하고 처인 이일순에게 채화삼을 잘 보살펴주고 위로해주라고 하게 된다. 친구간에 이것은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일순은 채화삼과 빈번하게 접촉하면서 다시 '사랑이 옮겨간다.' 이입삼과 비교하자면 채화삼은 더욱 박식하고 우아했다. 이일순은 채화삼에게 더욱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한명의 여인으로서, 채화삼의 재능과 기도를 좋아하는 외에 이일순은 모성애도 느낀 것이다. 즉 병약한 채화삼에게 상당한 연민의 정을 느낀다. 이건 치명적이다.

 

채화삼은 처인 향경여가 그를 멀리하자, 아주 비통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일순의 보살핌을 받자 돌연 따뜻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사랑의 따스함이고, 사랑의 맛이다.

 

그리하여, 이일순에게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발생한다. 시원시원하게 사랑하는 혁명여성인 이일순은 다시 채화삼이야말로 그녀의 '양산백'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녀는 다시 한번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이입삼을 떠나 채화삼과 결혼한다.

 

나중에 어떤 사람은 이일순에게 어느 정도 "쓰레기녀"같은 혐의가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새로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에 빠진단 말인가. 이것은 당시의 구체적인 역사환경도 고려해야 한다. 그 시대에 전통혼인관념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은 급진적이고 선봉적인 사람들이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그다지 크게 질책받는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한 사람이 "쓰레기"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려면 그(그녀)의 의도를 보아야 한다. 만일 채화삼이 이입삼보다 돈이 많다거나, 아니면 관직이 높았다면, 이일순의 목적이 불순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입삼과 채화삼의 혁명경력과 직위는 난형난제였고, 심지어 이입삼의 조직내의 직위는 채화삼보다 더욱 높았고, 명성도 더욱 컸다. 그러므로, 이일순의 선택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사랑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입삼도 이런 방면에서는 화통했다. 처가 이혼을 꺼내자 바로 동의한다. 다른 사람의 애정을 이루어주는 것이 남자의 흉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을 다시 한번 놀라게 한 점은 이일순이 다시 한번 놀라운 결정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채화삼에게 시집가기 전에 다시 자신의 막내여동생 이숭선을 이입삼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그 원인도 탄식할 만하다. 첫째, 이일순은 이입삼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이인기가 아직 어렸다. 겨우 두살가량이었다. 모친으로서 이일순은 아들이 계모를 만나야 한다는 것에 안심이 되지 않았다. 만일 자신의 여동생이 계모가 된다면, 걱정할 일이 없을 터였다(사실도 그러했다. 나중에 이숭덕은 이인기를 아주 잘 보살펴 주었고, 이인기도 어른이 된 후에 아주 우수한 공정분야의 엔지니어가 된다). 둘째, 이일순은 이입삼에게 보상해주고, 여동생에게 좋은 사람과 결혼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심적으로 일종의 평형을 얻는다.

 

이일순의 여동생 이숭선도 아주 우수했다. 용모나 학식에서 전혀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입삼과 낯설지도 않았고, 이입삼의 부하로 일한 적이 있어, 서로 잘 알았다. 이일순이 연결시켜주자, 이입삼은 이숭선과 1926년에 결혼한다. 이해 연말에, 27살의 이일순은 채화삼과 모스크바에서 혼례를 올린다.

 

두번의 결혼, 그리고 이혼후 두번에 걸쳐 자신의 여동생을 전남편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이런 일은 역사상으로도 보기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4) 제4차혼인

 

이일순의 애정상의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일순은 채화삼과 귀국한 후 혁명에 열정을 불사른다. 부창부수로 비익제비(比翼齊飛)했다. 결혼후, 이일순은 채화삼과의 사이에 다시 두 아이를 낳는다. 딸 채전(蔡轉)은 1928년 2월 태어났고, 나중에 그녀는 내과의사가 된다; 아들 채림(蔡霖)은 1929년 6월에 태어났고, 나중에 우수한 교육자가 된다.

 

그러나, 이일순의 세번째 애정도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하늘이 좋은 인연을 질투하는 것인지, 하늘이 영재를 질투하는 것인지. 1931년 6월, 반도의 배신으로 채화삼은 홍콩에서 체포된다. 채화삼은 의지가 굳었고, 체포후에 고문을 심하게 당한다. 못으로 그의 몸을 벽에 박고, 칼로 그의 가슴의 살을 도려냈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8월 4일 36세의 채화삼은 영용취의(英勇就義, 사망)한다.

 

이때의 이일순은 32살이었다. 그리고 겨우 3살된 딸을 데리고 있었다(업무로 인하여 이일순은 아들 채림을 반살때 다른 사람에게 보냈다). 당시 그녀는 일이 아주 바빴다. 그녀는 자주 이사를 다녔고, 어떤 때는 하루에 3,4번 이사를 했다.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1933년 6월, 이일순이 불행히 체포당한다. 국민당의 감옥 속에서, 이일순도 굳은 의지를 보였고, 고문을 견디면서 전혀 타협하지 않았다. 1937년, 항일통일전선이 건립된 후, 국민당은 수감되었던 혁명가들을 대거 석방하는데 이일순도 그때 출옥할 수 있었다.

 

자유를 얻은 후 이일순은 즉시 연안으로 간다. 연안노신사범학교, 섬감녕변구행정학원에서 교원으로 일했다.

 

아직 40살도 되지 않은 이일순은 다시 한번 애정의 선택을 하게 된다.

 

이일순의 네번째 남편은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고, 그다지 많은 자료도 남기지 못했다. 그저 성이 이(李)씨라고만 알려졌다. 결혼후 두 사람은 행복하게 지냈고, 1940년, 그들 사이에 딸 이길제(李吉提)가 태어난다. 이길제는 자란 후에 유명한 음악가가 되어 중앙음악학원의 교수가 된다.

 

여기에서 한가지 언급할 것은 이일순의 큰딸 즉 그와 양개지 사이의 딸 양전도 1938년 연안으로 온다. 혁명성지에서 모녀는 이렇게 서로 만나게 된다.

 

이일순의 네번째 남편에 대하여는 남겨진 것이 아주 적다. 아마도 1946년에 무슨 일이 일어나서 희생된 것같다. 아니면 이일순과 이혼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당시 한 전우가 이일순에게 이입삼과 복혼할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 이입삼의 처인 이일순의 여동생 이숭선은 당시 이미 혁명활동을 하다가 희생당했다. 그러나 여러가지 원인으로, 아마도 여동생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이일순은 이입삼과 복혼하지 않았다. 이입삼은 나중에 소련여자 리사(李莎)와 결혼한다. 

 

건국후에도 이일순은 국가의 건설을 위해 힘을 쏟았다. 그녀의 일생은 역경이 많았고 혁명에 60여년간 종사했으며 적지않은 공헌을 한다. 당연히 애정에서도 그녀는 남달랐다. 

 

이일순은 1984년 5월 17일 북경에서 사망하니 향년 85세이다. 그녀는 임종때 막내딸에게 말한다: "나는 간다. 나는 간다. 나는 아주 좋은 붉은 색의...."

 

막내딸은 그녀의 말뜻을 알아듣고 선명한 붉은깃발을 모친의 시신에 덮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