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우군(王友群)
1949년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이후, 수십번에 걸쳐 피비린내나는 정치운동을 발동시켰다. 매번 정치운동때마다 중공에 숙청당한 대상은 모두 중공에 의해 "국내외적대세력"과 관련이 있다고 칭해졌다. 즉, "자산계급의 당내대리인" 혹은 "국내외적대세력의 당내대리인"이라고 규정되었다.
고요(高饒)는 "자산계급의 당내대리인"으로 규정되다.
1954-1955년 중공은 당정후 첫번째 반당집단을 규정했다. "고강(高崗),요수석(饒漱石)반당연맹"이다.
고강은 당시 중공정치국위원, 중앙정부부주석, 중앙군위부주석, 국가계위주석이었고, 요수석은 당시 중공중앙조직부장이었다.
고요는 중공에 의해 모택동을 우두머리로 하는 당중앙영도핵심을 '전복하기를 기도하고' '당과 국가의 최고영도권을 찬탈하고자' 했다고 규정되었다.
1955년 3월 31일, 중공중앙은 <고강,요수석반당연맹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켰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요의 '반당활동'은 제국주의와 자산계급반혁명분자의 바램을 적응시키려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실제로 이미 자산계급의 우리 당내 대리인이 되었다"
즉, 고,요는 '국내외적대세력'의 중공당내 대리인이라는 것이다.
1954년 8월 17일 고강은 핍박을 받아 자살한다.
1955년 3월, 고강이 자살한 7개월후, 중공은 "반당음보의 수뇌아 죽을때까지 회개하지 않은 반도"로 당적이 박탈되고, 당내외 일체의 직무를 면직당한다. 요수석도 당적이 박탈되고, 당내외일체의 직무에서 면직당한다. 1965년, 이미 감금된지 10년이 된 요수석은 유기징역14년형을 받는다. 그후 그는 감옥에서 생을 마친다.
객관적인 사실은 고강, 요수석은 '반당'하지도 않았고, '반당연맹'을 결성하지도 않았으며, '국내외적대세력'의 중공당내 대리인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중공내부투쟁의 희생양일 뿐이었다.
팽덕회(彭德懷)는 '자산계급의 당내대리인'으로 규정되다.
1959년 7-8월 여산회의(廬山會議)에서 당시 중공정치국위원, 중앙군위부주석, 국방부장, 중공원수인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솔직한 서신을 썼다가 모주석의 진노를 산다.
1959년 8월 16일, 중공8기 8중전회에서 <팽덕회를 우두머리로 하는 반당집단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키는데, 이 결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전체 회의에서 드러난 대량의 사실은 팽덕회, 황극성(黃克誠), 장문천(張聞天), 주소주(周小舟)등이 인정하고 그들의 동모자, 추종자들이 진술한 사실을 포함하여, 팽덕회를 우두머리로 하는 반당집단은 여산회의기간과 여산회의이전의 활동에서 목적을 가지고, 준비를 하고, 계획을 하며, 조직적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활동은 고요반당연맹사건의 계속이자 발전이다. 현재 이미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팽덕회와 황극성은 일찌감치 고강과 반당의 연맹을 형성했고, 이 연맹의 중요한 구성원이었다."
1961년 1월의 중공7천인대회에서 1959년 반우경기회주의운동이래의 잘못 숙청된 사람의 명예를 회복시키기로 결정한다. 다만, 유소기는 발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은 명예회복시킬 수 있지만, 팽덕회만은 명예회복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팽덕회는 "일부 외국인과 공모하여 중국에서 전복활동을 한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이통외국(裏通外國)'은 팽덕회의 첫번째 죄명이 된다.
다만, 1978년 12월에 이르러, 중공중앙은 정식으로 팽덕회를 명예회복시킨다.
1981년 6월 27일, 중공11기 6중전회에서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키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8기8중전회의 소위 '팽덕회, 황극성, 장문천, 주소주반당집단'의 결의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즉, 팽덕회는 '반당'하지도 않았고, '반당집단'을 결성하지도 않았으며, '고강반당집단의 중요구성원도 아니고' '이통외국'한 일도 없다. 자산계급의 당내대리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습중훈(習仲勛)은 자산계급의 당내대리인으로 규정되다.
1962년 9월 소집된 중공8기10중전회에서 당시 국무원부총리 겸 국무원비서장이던 습중훈은 소설 <유지단(劉志丹)>으로 인하여 '반당집단'의 두목으로 몰린다.
1962년 9월 24일, 중공8기10중전회가 중남해 회인당(懷仁堂)에서 개막한다. 모택동은 이렇게 말한다: "현재 소설을 쓰는 것이 성행하고 있지 않은가? 소설을 쓰는 것을 이용하여 반당활동을 하는 것은 하나의 큰 발명이다. 무릇 하나의 정권을 무너뜨리고자 한다면, 먼저 여론을 만들어야 하고, 이데올로기를 만들어야 하며, 상층구조를 깨야 한다. 혁명은 그런 것이고, 반혁명도 마찬가지이다."
발언에서 모택동은 당시 중공중앙총서기 등소평에게 5명의 회의에 불참한 인원의 명단을 선포하게 한다. 등소평이 선포한다. 중공정치국상위회는 습중훈등 5명을 '심사받아야할 주요분자'로 규정하여 회의에 불참시켰다.
이어서 모택동이 말한다. "그들의 죄악은 실로 너무나 크다. 심사로 명확히 밝혀지기 전에는 이런 회의에 참가할 자격이 없다."
모택동은 이어서 말한다: "1959년 8기8중전회에서 팽덕회반당집단의 당에 대한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10중전회에서 다시 팽덕회반당활동-고요반당분자 구성원인 습중훈을 밝혀냈다."
1962년 9월 26일, 중공중앙부주석 유소기는 회의에서 이런 말을 한다: "팽(덕회), 고(강), 습(중훈)은 원칙이 없는 반당음모집단이다. <유지단>의 팔십만언서는 바로 강령이다. 우리가 이번 회의에서 팽,습의 반당음모를 적발한 것은 우리 당의 위대한 승리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 만일 팽,고,습의 음모가 실현되었더라면, 복벽했을 것이고, 실제로는 반봉건반식민지의 길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습중훈의 오래된 비서는 습중훈의 2가지 사건을 고발한다. 그중 하나는 "이통외국"이다. 그는 이렇게 고발했다: 습중훈은 일지기 중공중앙의 절대기밀문건을 1부 베껴서, 소련주중대사관으로 보낸 바 있다.
'습중훈반당집단'은 나중에 "팽(덕회),고(강),습(중훈)반당집단"으로 격상된다.
팽덕회, 고강은 모두 '자산계급의 당내대리인'이었다. '팽,고,습반당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습중훈도 자연히 '자산계급의 당내대리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1979년 8월 4일, 중공중앙이 전체당에 돌린 <소설유지단명예회복에 관한 보고>에서 <유지단>은 반당소설이 아니다라고 규정한다.
1980년 2월 25일, 중공중앙은 <소위 '습중훈반당집단'의 명예회복에 관한 통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소위 '습중훈반당집단'은 순전히 사실이 아닌 말이다. 습중훈에게 억지로 붙여진 죄명은 마땅히 뒤집어져야 한다.
즉, 습중훈도 무슨 '자산계급의 당내대리인'이 아니었고, '이통외국'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유소기(劉少奇)는 '국내외적대세력'의 당내대리인으로 규정되다.
모택동이 문혁을 발동시킨 후 타도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모택동이 스스로 지정한 제1후계자이자 당시 중공의 2인자이며, 중공중앙부주석, 국가주석인 유소기였다.
1968년 10월 개최된 중공8기12중전회에서 통과된 <반도(叛徒),내간(內奸),공적(工賊) 유소기죄행에 관한 심사보고>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대량의 물증, 인증, 방증은 당내 최대의 자본주의도로의 당권파 요소기가 당내에 암약하는 반도, 내간, 공적으로 죄악이 가득한 제국주의 현대수정주의와 국민당반동파의 주구라는 것을 충분히 증명한다."
40여년동안, "유소기는 일관되게 반혁명양면파의 수법을 사용하여, 초항납반(招降納叛), 이통외국(裏通外國)하면서 미친 듯이 모주석을 대표로 하는 무산계급혁명노선에 반대했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반혁명결탁을 저질러, 당내반혁명수정주의집단의 총두목, 자본주의복벽세력의 총대표가 되었다."
"1947년 2월, 유소기는 북평(북경의 당시 명칭)의 미국전략정보처에서 연안으로 파견한 미국간첩 왕광미(王光美)와 결합한다. 1950년 5월, 유소기는 직접 그의 처남인 미국간첩 왕광기(王光琦)를 홍콩으로 보내어 미제중앙정보국에 '가치가 아주높고 미국측이 중시하는 적지 않은 정보를 공급했다."
한마디로, 유소기는 당시 '국내외적대세력'의 중공당내 총대리인이었다는 것이다.
1980년 2월 29일, 중공11기5중전회에서는 "유소기명예회복의 결의"에서 8기12중전회에 유소기에게 붙인 '반도,내간,공적'의 죄명과 유소기를 '영원히 당적박탈하고, 당내외일체직무를 취소한다'는 잘못된 결의를 취소하고, 원심사보고서를 취소하고 유소기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즉, 유소기에게는 '이통외국'의 문제가 없었으며, '자산계급의 당내대리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임표(林彪)는 '국내외적대세력'의 당내대리인으로 규정되다.
1971년 9월 13일, 중공의 2인자 임표가 몽골의 원두르칸에서 비행기추락으로 사망한다.
1973년 8월 20일, 중공중앙은 중앙전안조의 <임표반당집단반혁명죄행에 관한 심사보고>를 통과 비준시킨다. 이 보고서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일찌기 '9대'를 전후하여, 임표는 초항납반, 결당영사하여 그의 부인 섭군(葉群)과 함께, 진백달(陳伯達), 황영승(黃永勝), 오법헌(吳法憲), 이작붕(李作鵬), 구회작(邱會作)등과 결탁하여, 임표를 우두머리로 하는 자산계급사령부를 결성했다. 그는 또한 그의 아들 임입과(林立果)를 통하여 비밀리에 반혁명특무조직인 소'연합함대'를 비밀리에 건립하였다. 임표반당집단은 국내 지주, 부호, 반혁명분자, 나쁜놈, 우파와 국제제국주의, 수정주의, 반중세력의 대리인이다."
"그들은 반혁명정변의 음모를 꾸미고, 모주석을 우두머리로 하는 당중앙을 타도하고자 했다."
보고서에서 임표에 대한 처리의견은 이러했다: "영원히 자산계급야심가, 음모가, 반혁명양면파, 반도, 매국적인 임표의 당적을 박탈한다"
임표는 모택동이 직접 지명하고, 중공9대 당장에 이름이 명시된 후계자였다. 당시 중공중앙부주석, 중앙군위부주석이었다. 그가 왜 '반당'한단 말인가? 왜 '당권을 찬탈'하려 한단 말인가?
<염황춘추>의 부주석 유가구(劉家駒)의 소개에 따르면, 그는 일찌기 중공 <해방군출판사>의 "성화요원(星火燎原)"편집부의 요청으로 <임표전>을 쓴 바 있다. 이를 위하여 그는 근 백명을 인터뷰하면서 신뢰할만한 사실을 획득했는데 그것을 종합하면,
"임표반당집단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임표는 9.13사건에서 무죄이다; 임표는 전혀 모택동을 해치려는 범죄의 수뇌가 아니다."
즉, 임표가 '국내외적대세력'의 당내총대리인이라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황당무계한 말이라는 것이다.
강청(江靑)은 '국내외적대세력'의 당내대리인으로 규정되다.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이 사망한다.
1976년 10월 6일, 모택동이 사망한지 1달도 되지 않아, 모주석이 생전에 직접 지정한 "네가 하면 내가 안심된다(你辦事我放心)"는 후계자 화국봉(華國鋒)이 모택동의 처 강청등 '사인방'을 체포하도록 명령한다.
1977년 7월, 중공10기3중전회에서 통과된 <왕홍문, 장춘교, 강청, 요문원반당집단에 관한 결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4인방'은 자산계급야심가, 음모가이고, 철두철미한 극우파이며, 신로반혁명이 결성한 조폭집단이다. 그들은 지주자산계급의 우리 당내의 전형적인 대표자이고, 장개석국민당의 우리 당내의 전형적인 대표자이다."
그들은 "무산계급독재를 자산계급파시스트독재로 바꾸어, 사회주의중국을 다시 반식민지반봉건국가로 전락시키려 했다."
우리당이 "4인방"과 투쟁한 것은 "무산계급과 자산계급간의 계급투쟁의 연속이다"
강청의 비서 염장귀(閻長貴)는 이렇게 썼다: "모택동은 문혁때 강청을 극히 신임했다. 가장 유력한 증명은 그가 1966년 7월 8일 강청에게 쓴 서신에서의 '흑화(모택동의말)'와 1967년 8월 4일 강청에게 보낸 서신으로, 좌파에 총을 나눠주어, 좌파를 무장시키라는 말등이 있다. 이 서신은 강청을 통하여 정치국에 전달되었고, 전체당, 전국에서 관철집행했다. 강청도 모택동의 '두터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모택동의 문혁에 관한 모든 중대한 전략적 조치에....강청은 적극 호응하고 전력을 다해서 집행했다. 그래서 모택동은 강청이 문화대혁명에서 특별히 유소기를 비판하고, 임표를 비판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칭찬했다."
염장귀는 특별히 이런 말도 했다: "모택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청을 타도하지 않았다. 그럴 생각조차 없었다."
강청은 중공창시자 모택동의 처이다. 강청의 문혁때 여러 중대한 활동은 모두 모택동의 지지를 받았다. 강청 자신의 말을 빌리면, "나는 모택동은 한 마리 개였다" 강청이 어찌 '자산계급의 당내전형적인 대표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결론
왜 중공은 걸핏하면 '국내외적대세력'을 핑계로 삼을까?
필자의 생각에 주로 다음의 두 가지 점때문이다.
첫째, 중공의 조사인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이론
마르크스는 인류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보았다. 마르크스주의는 탄생한 이래, 주로 무산계급과 자산계급의 투쟁으로 보았다.
공산당에 있어서, '자산계급'은 자연히 가장 편리하게 '국내외적대세력'에 붙일 수 있는 두드러진 레테르가 된다.
중공은 '고요반당연맹'의 숙청에서 '강청반혁명집단' 숙청에 이르기까지, 상투적으로 쓴 것은 모두 같은 방식이다. 득세한 일방은 스스로 무산계급을 대표한다고 말하고, 타도된 일방은 '국내외적대세력'의 중공당내대리인 혹은 자산계급의 중공당내대리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거짓말은 중공내부투쟁사에서 무수히 반복된다. 문혁후 절대다수의 소위 '반당집단'은 명예회복되고, 모든 '주자파'가 명예회복되었다는 점이 이를 충분히 증명한다.
둘째, 책임을 떠넘기고, 모순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가장 간단한 방식이다.
중공의 관성적인 사고는 이러하다: 잘못은 모두 남이고, 옳은 것은 항상 어르신이다.
문제가 생기면 모두 '국내외적대세력'이 파괴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국내외적대세력'이라는 틀을 이용하여 중공은 자신이 져야할 책임까지 모두 이 틀에 집어넣어버린다.
위의 소위 '자산계급의 당내대리인' 혹은 '국내외적대세력의 당내대리인'은 모두 중공이 만들어낸 말이다. 그 어느 하나도 근거가 없다. 고강, 요수석도 아니고, 팽덕회도 아니며, 습중훈도 아니고, 유소기도 아니다. 임표도 아니고, 강청도 아니다.
중공내부투쟁사는 이미 충분히 증명한다.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이론은 극단적으로 황당무계하다. 그것은 중공의 "적이 없으면 적을 만들어내서 투쟁한다"는 중요한사상의 근원이 되었다.
고금중외의 역사는 반복하여 증명한다. 내부요인은 만사만물의 발전변화에서 근본원인이다.
하나의 정당,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내부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책임을 소위 '국내외적대세력'에 미룰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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