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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초기)

추잉(褚英): 누르하치 장남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22. 10. 5.

글: 지식거륜(知識巨輪)

추잉

아르하투투먼패륵(阿爾哈圖圖門貝勒)은 누르하치의 장남 추잉(褚英)이다. 추잉은 누르하치의 첫번째 대푸진(大福金, 푸진은 만주어로 부인이라는 뜻임)인 퉁자씨(佟佳氏) 소생으로, 만력8년(1580년)에 태어났다. 이때 그의 부친 누르하치의 나이는 22살이었다. 추잉은 용맹하고 지모가 뛰어나서, 전투에 능했고, 전공을 여러번 세운다. 만력26년(1598년) 정월, 누르하치는 막내동생 바야라(巴雅喇), 추잉과 가가이(噶蓋), 페이잉동(費英東)에게 1천의 병사를 이끌고, 동해여진(東海女眞) 안추라쿠루(安楚拉庫路)를 정벌하게 한다.

 

추잉의 공적

 

이때 추잉의 나이는 겨우 17살이었다. 그러나 그는 힘든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밤을 세워 달려가서" "둔채(屯寨) 20곳"을 취했다. 그러자, 나머지 둔채들도 "모두 항복했다." 이를 통해 인축(人畜) 일만여를 얻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다. 누르하치는 아직 미성년인 장남이 용맹하게 전투에 나서서 전공을 세우자 "홍바투루(洪巴圖魯)"라는 칭호를 수여한다. '바투루'는 만주어의 batunu의 음역인데, '영용(英勇)'하다는 뜻이다. 이번 출정은 누르하치가 건국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만력11년(1583년) 유갑십삼부(遺甲十三副)를 가지고 거병한 후, 상당한 기간동안, 주로 누르하치는 병사를 직접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여 솔선수범했다. 셋째동생 슈르하치(舒爾哈齊)와 둘째동생 무르하치(穆爾哈齊)도 함께 전투를 기획하고 함께 전장터에 나서서, 누르하치 일족의 사람들이 전투에 직접 참여한다. 어이두(額亦都), 페이잉동등 장수들도 병사들을 지휘하여 용맹하게 싸웠다.

 

이번 출정부터, 누르하치의 아들, 동생, 조카등 패륵, 타이지(貝勒, 台吉)들이 장수와 병사를 이끌고 사방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비록 5대신등 개국공신들이 여전히 전장터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주요장수였지만, 전체군대를 통솔하는 총사령관은 칸(누르하치)이나 패륵타이지들이 직접 장악했다. 이때는 칸의 지위가 이미 높아졌고, 칸의 독재권력이 증강되어, 종실귀족의 형성을 촉진하는데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친다. 만력35년(1607년) 삼월, 슈르하치, 추잉, 다이샨(代善, 누르하치의 둘째아들), 페이잉동, 후르한(扈爾漢), 양구리(揚古利)는 3천의 병력을 이끌고 비우성(蜚優城)이 여진에 귀순하는 것을 접수하러 가서, 오갈암(烏碣巖)에서 우라(烏拉)의 1만군대를 격패시킨다.

 

이때, 슈르하치, 추잉, 다이샨이 각각 5백의 병력을 이끌고, 후르한, 페이잉동이 각각 2백의 병력을 이끌며, 나치부샤(納齊布蝦)와 상슈(常書)는 각각 1백의 병력을 이끈다. 양구리의 병력수는 미상이다. 누르하치의 성쇠를 가늠하는 이 전투에서, 3명의 패륵이 이끄는 병력의 수는 전체군대의 절반이상이었고, 이를 보면 그들이 전쟁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누르하치는 추잉이 "적군을 맞이했을 때, 앞장서서 돌진하여" "용맹하게 선두에 섰다"는 이유로 그에게 "아르하투투먼"이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아르하투투먼은 만주어의 음역인데, '아르하'는 계모(計謀)라는 뜻이고, 투먼은 '일만(一萬)'이라는 뜻이다. 합치면 '만가지계책'이라는 뜻이다. 지모가 뛰어나다는 것인데, 한자로는 '광략패륵(廣略貝勒)'으로 부른다.

 

이를 보면, 추잉은 지모가 뛰어나고 과감하여 용맹하고 완강하다. 여진국의 발전에 부친의 세력을 키우는데 그는 중요한 공헌을 했다.

 

기이한 점이라면, 만력41년(1613년)이후, 이 연전연승하던 황장자(皇長子)가 돌연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3부의 청태조 <실록>에서 다시는 추잉에 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그에게 직위가 있었는지, 공과가 있는지, 언제 사망했는지, 병사인지 선종인지, 아니면 전쟁터에서 죽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죄를 지어 주살당한 것인지 전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추잉의 수수께끼

 

누르하치가 사망했을 때, 만일 추잉이 아직 세상에 살아있었다면 그는 칸의 첫째 대푸진 소생의 장남으로 적장자(嫡長子)여서 칸의 지위를 계승할 자격을 가장 갖추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왜 칸위를 다투는 각축에서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을까? 이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이다. 35년이후 <청세조실록> 권37에 비로소 처음 언급이 나온다. "태조의 장자는 일찌기 패란(悖亂)으로 국법(國法)에 따라 조치된다". 다시 60년이 지나서, 강희제는 이런 말을 한다: "예전 우리 태조고황제(누르하치)때, 여러 패륵 대신들이 알고(訐告)한 건으로 아르하투투먼패륵 저연(褚燕, 추잉일 것임)이 법에 따라 조치되었다)" 그후 <청사열전>에 간략히 기록된다: "을묘년 윤팔월, 추잉은 죄로 인하여 주살되고, 작위는 박탈된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패란'이고, '무슨 알고(고발)를 한 것이며, 어떤 죄를 범했단 말인가. 모두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만문노당(滿文老檔)>을 살펴보아야 비로소 이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추잉의 일생에 대한 기본적인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 그는 전공이 혁혁했고, 후계자로 세워졌으며 국정을 장악했었고, 칸의 자리를 다투었다. 부친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고, 결국 부친에 의해 참살당한다.

 

첫째, 공헌이 현저했다. 추잉은 여진국, 후금의 창립과 발전에 중대한 공헌을 세운다.

 

그는 나이 겨우 17살떄 안추라쿠루를 정벌하는데 공을 세워 부친에게 '홍바투루'라는 칭호를 받고, 26살때, 다시 소수의 인원으로 병력이 많은 적군을 오갈암전투에서 격패하여 크게 위풍을 세우고, 선봉에 섰으므로, 다시 부친에 의해 '아르하투투먼'(한자명으로 광략패륵)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만문노당>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누르하치는 스스로 "여러 아들이 없었더라면, 그는 대업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너무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누르하치의 건국과 발전은 여러 아들들이 세운 전공과 뗄레야 뗄 수 없다는 것을 이때는 계축년이고, 만력41년(1613년)이다. 누르하치에게는 이미 14명의 아들이 있다. 이 14명의 황자들 중에서 제10자 더거레이(德格類), 제11자 바부하이(巴布海)는 겨우 17살이고, 제12자 아지거(阿濟格)가 8살, 제13자 라이무부(賴慕布)가 2살, 제14자 도르곤(多爾袞)이 1살이다. 이 5명의 황자는 만력41년(1613년)이전에는 전공이 없었다.

 

제3자 아바이(阿拜), 제4자 탕구다이(湯古代), 제6자 타바이(塔拜), 제9자 바부타이(巴布泰)는 각각 천명10년(1625년) 및 천총(天聰)연간에 비로소 출정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이들은 일생동안 큰 전공을 세운 바가 없다. 제11자 바부하이는 이때 이미 24살이지만 여전히 출정기록이 없고, 평생 전공을 세운 기록도 없고, 정치업적도 없다. 이 몇몇 황자는 칸인 누르하치가 나라를 세우고 발전시키는데 공을 세웠다고 말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제7자 아바타이(阿巴泰)는 비록 용맹하고, 이때 이미 24살이지만, <만주실록>의 출정기록을 보면, 단지 신해년(만력39년)에 이르러 비로소 페이잉동, 안페이양구(安費揚古)와 병력1천을 이끌고 동해 와집부(窩集部)의 우르구천(烏爾古辰)과 무링(穆稜) 2로(路)를 정벌하여 천여명을 포로로 잡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는 크지 않은 전쟁이었다.

 

누르하치가 "심장, 간처럼 사랑하는 네 아들"이라고 불리는 황자는 다이샨, 아민(阿敏), 망구얼타이(莽古爾泰), 홍타이시(皇太極)은 모두 지혜와 용맹을 갖춘 패륵들이다. 그러나, 아민은 슈르하치의 아들로 칸의 친조카이다. 망구얼타이는 이때 26살로 임자년(만력40년)에 비로소 "태조를 따라 우라를 정벌했다" 홍타이시는 이때 21살인데, 역시 임자년에 칸인 부친을 따라 우라를 처음 공격하는데 참가한다. 이들 황자의 나이와 출정시간과 전공을 보면, 누르하치가 말한 그를 도와 대업을 이룬 "여러 아들"이라 할 수 있다. 비록 표면적으로 보자면 14명이 있지만, 진정 역할을 한 사람은 추잉, 다이샨, 망구얼타이, 홍타이시의 4명의 황자이다. 그리고 또 한명의 조카 아민이 특별히 큰 역할을 했다. 다만 추잉과 다이샨은 모친이 같은 친형제였고, 특히 추잉이 두드러졌다.

 

둘째, 후계자로 세워지고 정무를 집행한다.

 

<청태종실록>등의 서적에서는 모두 이렇게 말한다. "태조는 초기에는 제업을 반드시 이룰 것이라는 생각도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후계자에 대한 논의도 한 적이 없다." 이 내용은 홍타이시의 즉위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복선이지만, <만문노당>의 기록을 보면, <태종실록>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문노당>에는 명확히 적고 있다. 누르하치는 이렇게 생각했다: "만일 내가 장남을 기용하여, 전주대국(專主大國), 집장대권(執掌大權)하면, 그는 편협한 마음을 버리고 공정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아르후투투먼에게 집정(執政)하도록 명했다!" 첫째는 추잉에게 '전주대국'하게 하고, 다시 그로 하여금 '집장대권'하게 하며, 셋째로 '아르하투투먼이 집정하도록 명했다' 이를 보면, 추잉은 확실히 칸에 의해 집정자로 세워졌다. <만문노당>에는 또한 이렇게 쓰고 있다. 추잉은 후계자로 세워진 후 여러 동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칸의 지위에 오른 후, 나를 따르지 않은 여러 동생들과 여러 대신들을 다 죽여버리겠다!" 

 

누르하치는 추잉의 잘못을 질책할 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라사람들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너로 하여금 정권을 장악하게 했다" 이는 말해준다. 추잉은 이미 칸에 의해 후계자로 세워져서 '집장대권'했고, 향후 칸이 사망하면 그가 칸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것을.

 

셋째, 대권쟁탈

 

<만문노당>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추잉은 성격이 편협되어, 네 동생과 다섯 대신을 학대했다. 기실 이것은 무슨 마음이 좁아서라고 하기는 어렵다. 추잉은 칸인 부친, 네 동생과 군국대권을 다투었다. 여기서 말하는 "네동생"은 바로 다이샨, 아민, 망구얼타이와 홍타이시를 가리킨다. 모두 권세가 있는 패륵들이다. 그들은 많은 장병을 거느리고 있고, 자주 출정하여 전공을 세우면서, 부친 혹은 백부인 칸에게 총애를 받았다. 칸이 "자신의 심장, 간처럼 아끼는 네 아들"인 것이다. 누르하치가 슈르하치를 연금시킨 후, 각 기(旗)는 모두 그의 관할이 된다. 그는 일부 기(旗)와 우록(牛錄)을 아들과 조카에게 나누어주어, 그들이 우록지주(牛錄之主), 고산지주(固山之主)로 만들어 주었다.

 

다만, 누르하치는 최고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아들과 조카에게 주었지만, 우록을 바꿔줄 수도 있었고, 회수할 수도 있었다. 그는 각기의 주인으로 이들 패륵들을 징계하거나 승진시킬 권한이 있었던 것이다.

 

추잉의 상황은 달랐다. 권력은 부친만큼 크지 않았다. 추잉은 부친의 명을 받아 집정했고, 그는 첫째 대푸진 소생의 '황장자'로서 칸의 후계자였다. 그는 직접 5천호를 관할했고, 계속하여 출정해서 전공을 세웠다. 그러므로, 그는 네 동생을 괴롭힐 수 있었고, 그들이 괴로워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칸이 아니다. 부친의 뒤를 이어 칸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라, 부친의 명에 따라 집정하고 장래 칸의 자리에 오를 후계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칸인 부친처럼 최고권력이나 최종결정권을 장악할 수는 없었다. 다른 동생들이 가지고 있는 우록과 고산을 지배할 수는 없었다.

 

<만문노당>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추잉이 이렇게 말한다. 칸인 부친이 죽은 후, 자신은 동생들에게 재물과 마필을 주지 않을 것이며, 그가 즉위한 후에 그와 원수진 여러 동생과 여러 대신들을 죽여버리겠다고. 이는 말해준다. 이때 그는 부친의 명을 받들어 집정하고 있었지만, 아직 그럴 권한은 없다는 것을 부친이 형제들에게 준 재물(장병 포함)을 몰수할 수도 없고, 대량의 재물과 장병을 여러 패륵과 대신들에게 하사할 권한도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이때 그는 부친이 그에게 준 권한에 따라 '국인지주(國人之主)'가 되었지만, '전국지주(全國之主)'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큰 권한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명을 따르지 않는 패륵과 대신을 죽일 권한도 없었다. 칸인 부친은 그에게 그런 권한까지는 넘겨주지 않았다.

 

바로 이런 국면에서, 소위 "네 동생과 다섯 대신"은 추잉이 그들에게 가하는 압박을 '학대'라고 말했다. 만일 누르하치가 그렇게 했다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생사영욕은 모두 칸이 결정한다. 그래서, 추잉은 비록 칸의 뜻을 어기고 여러 패륵을 '괴롭힐' 수는 있었지만, 여러 패륵들은 거기에 불복하여 오히려 공동으로 칸에게 고발하기에 이른 것이다. 만일 이런 '괴롭힘'을 누르하치가 했다면 그들은 감히 고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위로는 '전국지주'인 칸 누르하치가 있고, 아래로는 세력이 강대하고 장기간 이미 자신과 나란히 불리는 "네 동생"이 있다. 그리고 칸이 직접 기용한 심복 "다섯 대신"도 있다. 추잉의 자리는 공고하지 못했다. 통치권력은 제한을 많이 받았다. 추잉은 자신의 군국대권을 공고히 하고자 했고, 칸위를 반드시 물려받고자 했다. 그러려면 반드시 네 동생과 다섯 대신을 제한하고 타격해야 했다. 이렇게 되면 칸인 누르하치를 허수아비로 만들 수 있고, 점차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이 점을 네 동생과 다섯 대신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추잉의 편협함과 학대로 네 동생, 다섯 대신은 공동으로 누르하치에게 고발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는 추잉과 칸간의 권력다툼이다. 네 동생패륵들과의 권력다툼이다. 이것은 칸의 권력을 놓고 싸운 것이며, 기주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행동과 권한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행동과 이에 대한 반격등의 격렬한 정치투쟁이었던 것이다.

 

넷째, 불만을 품었다가 참살당하다.

 

네명의 동생과 다섯 대신이 칸에게 고발하면서, 추잉이 학대하고 정보를 봉쇄했다고 말한다. 그들로 하여금 추잉의 행동을 칸에게 보고하지 못하게 막았다는 것이다. 누르하치는 만력11년(1583년) 유감십삼부로 거병한 후, 30년간 전투를 해왔으며, 쉽지 않게 나라를 건립했다. 그는 창업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고, 사람의 마음은 알기 어렵다는 것과 권력을 놓고 각축을 벌이는 것이 얼마나 잔혹하고 무정한지도 잘 알고 있다. 장남의 이런 행동을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는 화가 나서, 추잉을 질책하고 그를 경계한다.

 

추잉은 칸위를 물려받기 어렵게 되었고, 큰 화가 닥칠 것이라고 생각하자, 불만이 컸고, 우려도 컸다. 다만, 추잉이 정말 <만문노당>에서 말하는 책을 불사르면서 하늘에 칸과 네 동생, 다섯 대신을 저주하면서, 전투에서 패전하기를 기도했는지, 그리고 패전하면 칸과 동생패륵들이 입성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는 등의 죄행은 확실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첫째는 이것이 소위 저주에 참여했다는 4명의 추잉의 부하들이 사후에 고발한 것이고, 현장을 발각당하여, 증인과 물증이 모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진실성을 완전히 믿기는 어렵다. ㄹ

 

둘째는 책을 태워서 저주한다는 것은 그저 저주일 뿐이고, 효과는 불분명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확실히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역시 부하들이 추잉을 무고한 것이라 할 것이다.

 

셋째는 추잉이 병력을 이동시키거나, 독약을 몰래 넣어 칸과 네 동생을 해치려 했따는 것은 조사확인되지 않았다. 어찌 부하들이 저주했다는 등의 말만 가지고 추잉이 부친과 동생을 죽여서 나라를 어지럽히려 했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이는 너무 한쪽의 말만 듣고 경솔하게 조치한 것으로 보인다. 누르하치는 "여러 아들들에게 이를 거울로 함게 하기 위하여" 한때 추잉을 그저 연금했을 뿐이다.

 

그의 이런 우려는 확실히 선견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례는 이후에도 계속하여 출현한다. 22년이 지나서, 천총9년(1635년), 망구지(莽古濟) 거거(格格)의 부하인 냉승기(冷僧機)는 천총칸 홍타이시에게 고발한다: 이미 죽은지 3년된 화석패륵, 정남기 기주 망구얼타이는 금방 사망한 친동생 정남기 기주패륵 더거레이 그리고 망구얼타이의 친여동생인 망구지 거거는 "맹세하며 홍타이시를 원망했다" 그리하여 홍타이시는 망구지 거거와 망구얼타이의 아들 어비룬(額必倫)을 죽이고, 정남기를 빼앗아 버린다.

 

다시 18년이 지나서, 순치8년(1651년), 사망한지 한달려가 지난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 도르곤의 부하 쑤커사하(蘇克薩哈), 잔다이(詹垈)는 도르곤이 죽을 때, 시녀가 용포를 관안에 넣었다는 것과 다른 나쁜 짓들을 고발한다. 순치제는 도르곤의 죄를 추궁하여 작위를 박탈하고 정백기 및 인원과 재산, 저택을 몰수하고, 그의 심복들을 엄히 처벌한다. 이를 보면, 추잉의 죄나 처벌은 누르하치가 확실히 나쁜 선례를 남긴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이 겨우 36살의 용맹하고 전투에 능한 아르하하투먼패륵(광략패륵) 추잉은 이렇게 세상을 떠나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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