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격와랍(格瓦拉)
백산흑수(白山黑水, 장백산과 흑룡강)의 사이에서 흥기한 청나라(청나라의 전신은 누르하치가 창건한 후금정권이고, 홍타이시가 재위할 때 국호를 청으로 고친다)가 반세기도 되지 않아, 조그마한 나라에서 천하를 통일한 대제국으로 성장한 것은 많은 한족신하, 장수들이 투항해 와서 보좌한 것과 큰 관계가 있다. 한족장수가 청나라에 투항하는 물길을 연 것은 바로 명나라의 요동지역에 있던 장수 이영방이다. 그렇다면, 이영방은 왜 명나라를 배신하였을까? 청나라에 투항한 후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1. 명을 배신하고 청에 투항하다.
이영방은 명나라말기 요동 철령 사람이다. 생년과 집안배경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설에는 요동총병 이성량(李成梁)의 손자라고 한다. 처음에는 무순천호소(撫順千戶所)의 비어관(備御官)을 지낸다. 만력42년(1614년), 명나라는 무순일대의 방어를 강화한다. 이영방의 직위는 비어에서 유격(遊擊)으로 승진하여 1개영(營) 3천여명의 변방군을 통솔하며, 주둔지의 방어와 지원업무를 책임졌다. 그 1년전에 명나라는 여진족의 건주부(建州部)와 오라부(烏喇部)의 충돌을 조정한다. 누르하치는 직접 무순으로 가서 명나라사신에게 상황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영방과 알게 된다.
만력44년(1616년), 기본적으로 여진의 각부를 통일한 누르하치는 대칸(大汗)을 칭한다. 이렇게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정권이 건립된다. 그리고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한다. 2년후(1618년), 누르하치는 '칠대한(七大恨)'을 명목으로 거병하여 명나라에 항거한다. 보병,기병 2만을 이끌고 무순을 향하여 공격을 진행한다. 그리고 직접 이영방에게 투항을 권하는 서신을 보낸다. 적은 많고 아군은 적은 국면 앞에서, 이영방은 투항권유서신을 본 후에, 남문에 올라 거짓으로 누르하치에게 투항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암중으로 병사들로 하여금 방어태세를 갖추게 지시한다.
누르하치는 이영방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급히 병사들에게 명하여 운제(雲梯)를 써서 공성한다. 금방 성벽에 오르고, 수비(守備) 왕명인(王命印)을 참살한다. 이영방은 청군이 용맹한 것을 보고, 계속하여 저항하다가는 죽는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자신과 성안의 군민의 목숨을 고려하여, 할 수 없이 성문을 열고 나가 투항한다. 누르하치는 이영방이 시무를 안다고 여기고 기쁜 나머지 그를 살려준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성안의 백성을 죽이지 못하게 명령한다. 이렇게 하여 무순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처음 청나라에 투항한 명나라 장수로서 이영방은 주군의 신임을 크게 받는다. 그는 삼등부장(三等副將)에 임명했을 뿐아니라, 원래의 부하들을 그대로 통솔하게 한다. 그리고 누르하치의 손녀(누르하치의 7째아들인 패륵 아바타이의 딸)을 처로 삼는다. 이렇게 그는 청왕조의 부마가 된다. 이때부터 이영방은 누르하치에 충성을 다한다.
2. 개국공신
무순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북경으로 전해진 후, 만력제는 사태의 심각함을 느낀다. 그리하여 급히 병부좌시랑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에 임명하고, 그에게 20만 정예군을 이끌고, 병력을 4로로 나누어 후금을 공격한다. 병사수에서 차이가 크기 때문에 직접 부딛쳐서는 결과가 참혹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영방은 누르하치에게 "적군이 몇 로로 나누어 쳐들어오든 우리는 1로만 막는다."는 전략을 주장한다. 누르하치는 이영방의 건의를 받아들여, 각개격파의 방식으로, 살이호전투에서 승리한다. 이를 통해 쌍방의 요동에서의 군사대치균형은 변화하게 된다.
살이호전투이후, 명나라는 요동의 방어가 상당히 박약해진다. 누르하치는 그 기회를 틈타 청하, 철령, 요양, 심양등 군사요충지를 취한다. 그리고 세력을 요서로 확장한다. 이 기간동안 이영방은 전투마다 참가한다. 그리고 각종 사회관계와 가족관계를 이용하여 책반과 정보업무를 진행한다. 이렇게 하여 개원천총(開原千總) 김옥(金玉), 광녕수비(廣寧守備) 석정주(石廷柱)등 일련의 명나라장수들을 성공적으로 청에 투항하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후금은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이들 군사요충지를 획득하게 된다.
홍타이시(청태종)이 등극한 후, 이영방은 계속하여 전쟁터에서 활약한다. 패륵 아민(阿敏)을 따라 조선정벌에 나서서, 철산, 정주, 안주, 평양등지를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그렇게 하여 조선국왕 이종(李倧)은 강화도로 피난간다. 그때가 천총원년(1627년)이다. 망국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이종은 아민에게 화의를 청한다. 아민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초보적으로 조약을 체결한 후 도성 한성으로 진격할 준비를 했다. 다행히 이영방이 극력 말려서 그 계획은 실행되지 않는다. 이를 보면 조선이 멸망을 피한데 이영방의 공도 있다.
군사행동외에 이영방은 정치분야에서도 공헌이 컸다. 예를 들어, 그는 누르하치의 명령을 받아 명나라의 법률제도를 정리하여 보고했고, 이를 통해 후금의 법률제도를 확립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이와 동시에, 이영방은 여러번 명을 받아 변방에 주둔한다. 진강(鎭江, 지금의 단동)일대에서 한족을 회유하고, 조정에 '현명한 인재'를 추천한다. 정권의 건설에 관련된 중대한 전략문제에서 이영방이 모두 참여했다. 이를 보면 누르하치부자는 그를 아주 높이 평가했다.
3. 부귀만년
공로에 따라 상을 내리는 원칙에 따라, 이영방은 청나라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데 큰 공로를 세운다. 당연히 큰 상을 받아야 했고, 사실도 확실히 그러했다. 누르하치는 이영방의 충성심과 공로를 포상하기 위해 그에게 면사3차(免死三次)의 특권도 주고, 여러번 그의 휘하병력을 증가시켜준다. 부하의 수량은 만명이 넘었다.
그러나, 누르하치의 조카사위이면서 명나라에서 투항한 장수인 유애탑(劉愛塔)이 다시 명나라로 귀순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영방은 의심을 받게 되고 점점 세력이 약화된다. 천총5년(1631년), 청나라는 한군기(漢軍旗)를 만든다. 이영방은 겨우 6개 좌령(佐領)만 통솔한다. 그의 세력은 이미 이전만 못하게 되었다. 3년후(1634년), 홍타이시는 작위를 내리는데, 공로가 큰 이영방에게는 겨우 "삼등앙방장경(三等昻邦章京)(三等子爵)"의 봉호를 내렸다. 이는 큰 치욕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이에 상처를 받아서인지 이영방은 금방 병으로 쓰러지고 같은 해에 사망한다. 이때의 나이는 미상이다.
이영방의 말년은 비록 처량했지만, 그의 후손은 청나라에서 계속 영화부귀를 누린다. 시간은 100여년에 달한다. 정사기재에 따르면, 이영방은 9명의 아들을 낳았다. 장남 이연경(李延庚)이 다시 명나라로 귀순하려고 하다가 피살된 것을 제외하고, 다른 아들들은 모두 청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높은 관직과 작위를 받는다. 그중 성취가 가장 높고, 명성이 혁혁한 사람은 이영방의 차남 이솔태(李率泰)이다. 그는 관직이 대학사(大學士), 민절총독(閩浙總督)에 오르며, 1등아사합니합번(一等阿思哈尼哈番, 즉 男爵)에 봉해진다.
이영방의 현손(玄孫)대에 이르러 성취가 가장 높은 사람은 이시요(李侍堯)이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건륭제는 일찌기 이시요를 만주부도통(滿州副都統)에 임명한 바 있다. 당시 이부(吏部)는 조제(祖制)에 위반된다는 것을 이유로 반대했지만, 건륭제는 이렇게 반박한다: "이영방의 현손인데, 어찌 다른 한군(漢軍)과 같이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를 보면, 이영방의 가족은 청나라에서의 지위가 특수했음을 알 수 있다. 이시요의 최종관직은 태자태보(太子太保), 민절총독으로 신하로서는 최고의 직위에 오른다. 이영방이 저승에서라도 알고 있다면 아마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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