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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초기)

아민(阿敏): 후금의 사대패륵(四大貝勒)중 한명

by 중은우시 2023. 1. 17.

글: 철기여풍(鐵騎如風)

 

1616년, 누르하치(努爾哈齊)가 허투아라(赫圖阿拉, 지금의 요녕성 신빈)에서 후금을 건립한 후, 다이샨(代善), 망구얼타이(莽古爾泰), 홍타이시(皇太極)과 아민을 사대패륵에 봉한다. 패륵은 여진(女眞)의 제후에게 주는 봉호이고, 일종의 세습 작위이고, 지위는 친왕(親王)과 군왕(郡王)에 바로 다음 간다.

 

아민은 누르하치의 동생인 슈르하치(舒爾哈齊)의 아들이면서 나머지 3명의 누르하치의 아들들과 함께 4대패륵중 한명으로 봉해질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그의 지위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이로 보면, 그는 홍타이시의 사촌형이고, 또한 홍타이시가 칸(汗)에 오르는 것을 극력 옹호했다. 그렇다면 왜 그는 홍타이시가 칸에 오른 후, 아민은 서서히 숙청당하게 되었을까?

홍타이시기마도

1583년, 누르하치와 동생 슈르하치는 13벌의 갑옷을 가지고 거병하여, 그후 30여년동안 여진 각부족을 통일했다. 그 기간동안 슈르하치는 누르하치를 도와 후금의 기반을 다지는데 큰 공을 세웠다.

 

누르하치가 점점 발전하면서, 명나라에 반기를 들려는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 슈르하치는 야심을 보여 누르하치로부터 시기와 배척을 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차례로 그의 지위와 권세를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슈르하치는 그렇게 밀려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또한 명나라와의 관계도 좋은 편이었다. 당시의 요동총병 이성량(李成梁)은 누르하치의 세가 커지자, 슈르하치를 지원해서 누르하치를 대체하려는 계획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슈르하치와 그 아들 아르통아(阿爾通阿), 자사크투(扎薩克圖)도 명나라의 힘을 빌어 누르하치에 대항할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명나라측에 암암리에 누르하치가 반기를 들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슈르하치의 둘째아들인 아민은 부친의 편에 서지 않았다. 누르하치가 슈르하치와 두 아들을 감옥에 가둔 후 처형할 때, 아민은 줄을 바로 섰기 때문에 누르하치가 남겨둔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처럼 대한다. 아민은 누르하치가 여진 우라부(烏拉部)를 토벌할 때, 누르하치에게 수령 부잔타이(布占泰)를 치도록 건의하여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다. 아민의 전공과 후금건립에 대한 공헌으로 그는 누르하치에 의해 상남기(鑲藍旗)의 기주패륵(旗主貝勒)에 봉해진다. 그후 다시 화석패륵(和碩貝勒)에 봉해지며, 다이샨, 망구얼타이, 홍타이시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며, 나이로 서열2위가 된다.

 

누르하치가 명나라에 반기를 든 후, 아민은 사르후(薩爾滸)전투에서 두송(杜松)부대를 대파한다. 그후 다른 패륵들과 함께 유정(劉綎)의 부대와 싸워 누르하치가 사르후전투에서 전면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예허부(葉赫部)를 토벌할 때와 심양, 요양을 공격하는 전투에서도 아민은 전공을 세운다.

 

슈르하치의 일맥은 원래 후금에서 중요한 지위를 누렸다. 다만 누르하치가 슈르하치를 죽인 후, 아민이 슈르하치계의 대표가 되며 상남기 하나를 가지게 된다. 최초의 사기(四旗) 때는 그가 누르하치 자손의 세력과 1:3이었다. 그러므로 후금에서 그의 지위는 비교적 특별했다.

 

1626년, 누르하치는 직접 대군을 통솔하여 요서의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하나, 원숭환(袁崇煥)에게 격패당한다. 심양으로 돌아온 후, 누르하치는 몸이 좋지 않았다. 자신이 다이샨의 후계자의 지위를 폐출시켰는데, 다음 후계자는 누구로 뽑을 것인가?

 

사대패륵가운데, 망구얼타이는 유용무모(有勇無謀)형의 인물이다. 국가대사를 감당할 수 없다. 누르하치는 비록 홍타이시의 재능을 인정했지만, 그는 너무 원활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아민은 슈르하치의 아들이기 때문에, 천성적으로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누르하치는 계속하여 누구를 후계자로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견해에 따르면, 누르하치는 눈길을 더욱 어린 아들 예를 들어, 아지거(阿濟格), 도르곤(多爾滾)과 도도(多鐸) 형제에게 돌렸다고 한다.

 

홍타이시는 칸의 자리에 눈독을 들인지 오래되었다. 이전에 다이샨이 후계자의 자리에서 쫓겨난 것도 그가 뒤에서 조종했기 때문이다. 지금 그는 후금국에서 세력이 강대하여, 다이샨에 바로 다음갔다. 그러다보니 후계자의 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민은 홍타이시가 칸이 되기를 꿈꾼다는 것을 알았고, 이전부터 홍타이사와의 관계도 좋았기 때문에, 그는 홍타이시의 편에 서기로 결정한다. 이를 통해 그를 칸에 옹립하는 공(從龍之功)을 세우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아민은 소총명(小聰明)은 있지만, 대지혜(大智慧)는 없었다. 누르하치가 위중할 때, 아민은 마침 그의 곁에 있었다. 누르하치는 그에게 대복진(大福晋) 아바하이(阿巴亥)에게 아지거, 도르곤과 도도를 데리고 오라고 전하게 했다. 그러나 아민은 누르하치의 영장(營帳)을 나선 후, 이 일을 홍타이시에게 말한다. 그리하여 홍타이시의 안배하에 홍타이시와 아민의 부하들이 누르하치의 행영(行營) 주위를 둘러싸고, 아바하이 한 명만 누르하치의 영장(營帳)으로 들여보낸다. 누르하는 그 광경을 보고 이미 형세를 자신이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포기한다. 그는 마음 속으로 홍타이시는 능력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자신이 이전에 생각했던 계획을 포기하고 편안히 세상을 떠난다.

 

아민은 왜 누르하치의 명을 다르게 전했을까? 누르하치가 생전에 정한 팔기의정제도(八旗議政制度)에 따르면, 만일 도르곤이 즉위하게 되면 보정(輔政)할 사람은 홍타이시, 다이샨등 몇몇 누르하치의 아들들이 될 것이다. 자신은 방계이므로 뒤로 밀리게 될 것이다. 다만 만일 홍타이시를 도와 즉위시킨다면, 자신은 사대패륵의 한명이고, 홍타이시와의 관계도 가까우므로 자신의 지위가 더욱 높아져서 최고의사결정권층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마지막 순간에 누르하치의 명을 어기고 홍타이시에게 붙은 것이다.

 

누르하치의 후사를 처리할 때, 아민은 잔머리를 굴려서, 홍타이시에게 누르하치가 생전에 유명(遺命)을 남겨, 아민에게 영토를 떼주어 왕에 오르도록 하라고 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에게는 홍타이시를 옹립한 공이 있기 때문에, 홍타이시가 그런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홍타이시는 구두로는 승락했지만, 속으로는 아민에 대하여 경계하는 마음을 품게 된다. 

 

홍타이시는 대칸(大汗)의 지위를 승계했지만, 조회(朝會)떄 원래의 사대패륵이 나란히 용상에 앉았다. 그 장면은 아주 우스웠다. 이는 비록 홍타이시가 대칸이지만, 국가권력은 "사가분금(四家分金, 네 가문이 후금은 나눠가진다)"의 상태라는 것을 말해준다.

 

홍타이시는 총명한 사람이다. 당연히 용상에 네 사람이 앉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마음 속으로는 분명 나머지 세 사람을 쫓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아민의 이어진 행동은 바로 홍타이시가 그를 쫓아내는 이유가 된다.

 

1627년, 홍타이시는 아민과 패륵에게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가서 모문룡(毛文龍)의 부대를 치도록 명령한다. 모문룡은 조선의 철산(鐵山)에 웅거한지 오래 되었는데, 부대는 후금군을 만나자 일거에 궤멸하고, 본인은 섬으로 도망친다. 그후 아민은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쳐들어가서 연이어 여러 성을 함락시킨다. 조선국왕 이종(李倧)은 사신을 보내 화의를 청한다. 아민과 여러 패륵들은 조선에 칠대죄(七大罪)가 있다고 말하며 화의요청에 응하지 않는다. 아민은 조선의 도성을 함락시키고 싶었으나, 여러 패륵과 한족장수 이영방(李永芳)은 대칸이 이미 명을 내렸으니 조선과 형제지맹을 맺고 회군하자고 말렸다. 계속 조선으로 치고 들어가는 것은 도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아민은 화를 벌컥내며 이영방을 쫓아내고, 계속 진격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유흥조(劉興祚)를 보내어 이미 강화도로 도망친 이종을 질책한다.

 

왜 아민은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모두 물리치고 자신의 뜻대로 했을까? 원래 홍타이시가 그에게 영토를 떼어주면서 왕이 되고자 하는 것을 만족시켜주지 못하자, 그는 이 기회에 조선을 점령하여 자신이 조선의 국왕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홍타이시가 그에게 회군을 명령하자, 그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돌아가지 않고, 패륵들과 상의하면서 자신은 이곳에 남아서 군대를 주둔시키고 싶다고 말한다. 실제로는 조선에 남아 자신의 왕국을 건립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홍타이시는 그렇게 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도도는 직접 아민이 이곳에 남고 싶다는 요청을 거절하여, 장면이 한때 난감하게 된다. 지르하랑(濟爾哈朗)도 아민에게 돌아가자고 권한다. 아민은 모두가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자, 자신 혼자 이곳에 남아서 왕이 될 수는 없겠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국왕과 형제지맹을 맺는데 동의하고 3일동안 사람과 가축을 약탈한 후 군대를 되돌린다.

 

홍타이시는 아민의 행위에 분노한다. 다만 그를 맞이할 때는 아주 열정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그러나 아민이 황제에게 고개를 숙여 절을 할 때, 홍타이시는 같이 맞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끌어안기만 한다. 이전에 이 4명은 서로 동등하게 예를 표했었다. 그런데 홍타이시의 이번 태도는 자신이 주군이고, 아민은 신하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아민이 진정 무너지게 된 것은 명나라와의 전투였다. 1629년, 홍타이시는 대군을 이끌고 북경성 아래까지 쳐들어간다. 그러나, 관녕군의 방어에 북경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포기하고, 준화(遵化), 난주(灤州), 영평(永平), 천안(遷安)의 네 개성을 함락시킨 후, 자신은 주력을 이끌고 회군한다. 원래 아민은 후금의 대본영을 지키고 있었고,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었다. 이번에 홍타이시는 그를 불러 이곳을 수성하게 한다. 홍타이시는 그에게 5천의 인마만을 준다. 그가 상대하는 명나라군대가 몇명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그가 수성하는 과정에서 인마를 잃게 되면 권세와 영향력이 더욱 약화될 것이라는 심산이었다.

 

홍타이시는 원래 아민이 성을 지켜내지 못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아민은 난주를 잃자, 직접 나머지 3개 성을 지키지 않으면서, 명을 내려 성내의 한족관리와 백성을 모조리 도살해 버리고, 군대를 이끌고 돌아온다. 홍타이시는 그의 행위에 분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를 숙청할 기회가 생겼다고 암암리에 기뻐한다.

 

아민이 회군한 후, 홍타이시는 아민에게 성밖 15리에 주둔하도록 명한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성을 빼앗긴 원인을 질책한다. 3일후, 홍타이시는 여러 패륵과 대신을 소집한다. 웨퉈(岳托, 다이샨의 아들)에게 명하여 사람들 앞에서 아민의 16대죄를 읽게 한다. 내용에는 예전에 부친 슈르하치에게 명나라와 결탁하여 누르하치를 배반하도록 종용한 것(실제로는 아민이 부친을 배신한 것이었다), 조선에 머물면서 돌아오지 않으려 한 것은 다른 야심이 있어서였다는 것, 차하르(察哈爾)를 정벌할 때 암중으로 홍타이시의 말을 투셰투(土謝圖) 액부(額駙, 황제의 사위를 가리킴)에게 말해주었다는 것, 집에 있을 때 그저 먹고 마시고 놀기만 했다는 것, 국군의 자태로 웨퉈와 하오거(豪格, 홍타이시의 아들)를 대했다는 것, 자기 마음대로 관내 4개성을 포기했다는 것, 마음대로 성내의 민중을 도살했다는 것등등이다. 아민은 분노하여 홍타이시를 욕했다. 그러나, 주변에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 지르하랑도 그에게 저항을 포기할 것을 권한다.

 

원래 아민의 죄는 사형에 처할 것이지만, 홍타이시는 자신의 관대함을 보여주고자 그저 그를 자택에 연금시킨다. 상남기는 지르하랑에게 넘긴다. 후금의 사대패륵중 한명인 아민은 이렇게 자신의 사적인 욕심과 대국관의 결핍으로 총명하기 그지없는 홍타이시에게 차례로 숙청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