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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초기)

효장황태후(孝莊皇太后): 사후 37년간 정식으로 매장되지 못한 이유는...?

by 중은우시 2022. 8. 4.

글: 박서(博書)

 

효장황태후는 1613년에 태어났다. 그녀의 친정은 콩골 커얼친(科爾沁)부이며, 본명은 붐부타이(布木布泰)이다. "효장"은 그녀가 죽은 후에 받은 시호(諡號)이다. 13살때, 붐부타이는 후금(後金)이 사대패륵(四大貝勒)중 한명인 홍타이지(皇太極)에게 시집가서, 후금 "대영명칸(大英明汗)"이 되는 누르하치(努爾哈赤)의 며느리가 된다.

 

2년후, 누르하치가 병사하고, 홍타이지가 즉위한다. 23살의 붐부타이는 "장비(莊妃)"에 봉해진다. 32살때, 아들 푸린(福臨)이 즉위하니, 그녀는 순치제(順治帝)때 황태후(皇太后)가 된다. 49살때, 손자 현엽(玄燁)이 즉위하니 그녀는 다시 강희제(康熙帝)때 태황태후(太皇太后)가 된다. 

 

효장은 75살까지 살았다. 그녀가 13살에 입궁한 때부터 계산하면, 누르하치, 홍타이시, 순치와 강희의 네명의 황제시대 함계 62년간 황궁에 있었다. 그녀는 순치, 강희 두 황제를 길렀고, 순치, 강희가 즉위하는데 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강희제는 황조모인 효장이 직접 길러주었고, 이후 61년간 재위하면서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열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일대명군이 된다.

 

효장황태후는 현명하고 예지있으며,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 그는 중국봉건사상 다시 없을 전설적인 여인이다. 그녀를 둘러싼 많은 수수께끼들이 있고, 야사와 연의소설에서는 없는 이야기를 많이 지어내어, 그녀에게는 더더욱 신비한 색채가 덧씌워지게 된다.

 

예를 들어, 그녀는 왜 13살의 나이에 자기보다 20살이나 많은 친고모부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을까? 그리고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미색으로 도르곤(多爾袞)을 유혹하여 그로 하여금 자신의 아들 푸린을 보좌하여 황제에 오르게 만들고, 나중에 다시 태후의 신분으로 도르곤에게 시집을 갔다고 한다; 그녀가 죽은 후에 남편인 홍타이지(청태종)과 합장되지 않겠다고 하여, 강희제에게 난제를 남겼다. 그리고 37년간이나 정식으로 매장되지 못했다.

 

1616년, 후금이 굴기하며, 공개적으로 대명과 갈라선다. 명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후금은 몽골과 연맹을 맺고, 누르하치는 아들과 조카들에게 몽골족 여인을 처로 맞이하게 한다.

 

붐부타이이전에 홍타이시에게는 이미 3명의 부인이 있었다. 그중 1명은 효장의 친고모이고, 그녀보다 15살이 많은 효단황후(孝端皇后)이다. 효단황후는 자식을 낳지 못하여, 홍타이지는 다시 붐부타이를 취한 것이다. 이치대로라면 홍타이지는 붐부타이에게 친고모부이고 그녀보다 나이가 20살이나 많았다.

 

홍타이지는 붐부타이를 취한 후, 다시 11명의 비를 취한다. 이들 비중에서, 고모인 효단황후를 제외하고 또 다른 신비(宸妃)가 있었다. 그녀는 붐부타이의 친언니인 하이란주(海蘭珠)이고 그녀보다 5살이 많았다. 하이란주는 26살때 홍타이지에게 시집을 온다. 그리하여, "고모조카 3명이 같은 남편을 모시는" 국면이 펼쳐진 것이다.

 

붐부타이가 홍타이지에게 시집온 후, 전후로 3명의 딸을 낳는다. 1636년, 홍타이지가 황제에 오르고,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고친다. 그리고 황후와 황비를 책봉하는데, 붐부타이는 "장비"에 봉해져서 영복궁(永福宮)에 거처한다. "오궁"중 한명이 된 것이다.

 

2년후, 25살의 장비는 황구자(皇九子) 푸린을 낳는다. 그가 바로 나중의 순치제이다.

 

장비가 황자를 낳았는데, 그녀는 오히려 홍타이지로부터 냉담한 대우를 받는다.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그녀의 언니인 하이란주때문이다.

 

하이란주는 "신비"로 봉해졌고, 역시 "오궁"의 한명이다. 그녀는 입궁할 때 이미 26살이고, 이미 결혼했었다. 그녀의 첫 남편은 누구일까? 왜 홍타이지에게 시집오게 되었을까? 청사고(淸史稿)에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입궁했을 때 이미 성숙한 여인이고, 젊은 장비에 비하여 홍타이시의 사랑을 받기 쉬웠다는 것이다.

 

하이란주는 용모가 뛰어났고, 성격도 온화해서, 입궁후에 홍타이지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홍타이지는 그녀가 거주하는 궁을 "관저궁(關雎宮)"이라고 이름붙인다. "관관저구(關關雎鳩), 재하지주(在河之洲)"에서 따온 것이다. 이를 보면 그녀가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알 수 있다.

 

신비는 황팔자(皇八子)를 낳았고, 홍타이지는기뻐서 바로 그를 황태자(皇太子)에 봉한다. 아쉽게도 이 어린 황자는 1살도 되지 않아 요절한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신비는 매일 슬퍼하다가 얼마후 중병에 걸린다.1638년 정월 신비는 병사한다. 홍타이지는 크게 비통해 한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신비가 죽은 이틀후에 장비는 황구자 푸린을 낳는다. 황자의 탄생도 홍타이지의 슬픔을 거두게 하지는 못했고, 오히려 푸린은 때를 잘못 잡아 태어나서, 홍타이지는 푸린에 대하여 그다지 호감을 갖지 않는다. 장비도 이로 인하여 더욱 냉태받고, 홍타이지가 죽기전까지 6년간 그녀는 더 이상 자녀를 낳지 못한다.

 

몽골 커얼친부에서 온 고모와 조카 3명중 효단황후는 홍타이지의 정비(正妃)이고, 신비의 지위는 황후의 바로 다음이었으며, 장비는 말석이었다. 다만 효단황후와 신비는 모두 아들이 없었고, 장비는 홍타이지와의 사이에 1남3녀를 낳았다. 그리하여 그녀가 나중에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1643년, 홍타이지는 돌연 중병을 앓다가 사망한다. 당시 장비 붐부타이는 32살이고, 그의 아들 푸린은 겨우 6살이었다. 홍타이지가 생전에 황위계승자를 정해두지 않았고, 또 유조(遺詔)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조제(祖制)에 따라 팔기(八旗)의 기주들이 공동으로 '현자(賢者)'를 추대하여 황제에 올려야 했다.

 

그리하여 종실귀족들은 모두 황위를 노리게 된다. 황위계승자를 둘러싸고, 만주귀족내부에서는 격렬한 투쟁이 벌어진다. 그중 가장 유력한 두 명의 경쟁자는 홍타이지의 장남인 하오거(豪格)과 홍타이지의 동생인 도르곤이었다. 황위계승투쟁 초기에 푸린은 아예 후보군에 포함되지 못했다.

 

도르곤은 누르하치의 14째아들이고, 정백기(正白旗)의 기주이며, 화석예친왕(和碩睿親王)에 봉해졌다; 하오거는 황장자로서 숙친왕(肅親王)에 봉해졌고, 정남기(正藍旗)의 기주이다. 도르곤은 양백기(兩白旗, 정백기와 상백기)의 지지를 받았고, 하오거는 정남기와 양황기(정황기와 상황기)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도르곤과 하오거의 '방휼지쟁'으로 장비가 '어부지리'를 얻는다. 두 사람이 대치하여 결론이 나지 않자, 장비와 도르곤은 푸린을 황제에 앉히고, 도르곤을 섭정왕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기로 암중 결맹을 맺는다. 장비는 또한 덕망이 있는 다이샨(代善)과 치르하랑(齊爾哈朗)을 설득하여 푸린을 황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한다.

 

푸린도 홍타이지의 아들이다. 그래서 양황기도 입장을 바꿔 푸린을 지지하게 된다. 하오거는 고립된다. 결국 6살의 푸린이 황위에 올라 순치제가 되고, 도르곤이 보정(輔政)이 된다. 장비는 황태후에 오른다. 

 

효장은 어떤 방법으로 도르곤을 설득했을까? 야사에 따르면 그녀와 도르곤은 사통했다고 한다.

 

<효장비사>에 만들어낸 이야기도 있다. 효장황태후가 입궁하기 전의 이름이 "대옥아(大玉兒)"이고, 친왕이던 도르곤과 함께 자랐으며, 죽마고우였으며, 서로 사랑했다고 하였다. 대옥아가 장성한 후, 뛰어난 미오를 자랑했고, 어느 날 홍타이지가 보고는 그녀를 입궁시켜 비로 삼았다는 것이다.

 

형인 황제에게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기자 도르곤은 상심이 컸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중에 대옥아가 황자 푸린을 낳는다. 홍타이지가 사망하자, 도르곤이 푸린을 지지하여 황위에 오르게 한다. 이는 효장황후와의 옛사랑을 생각해서이다.

 

이런 견해는 명나라말기의 유로(遺老) 장황언(張煌言)의 <건이궁사(建夷宮詞)>에 나오는 싯구에서 유래한다: 

 

상수양위합급존(上壽觴爲合卺尊), 자녕궁리난영문(慈寧宮裏爛盈門)

춘관작진신의주(春官昨進新儀注), 대례궁봉태후혼(大禮躬逢太后婚)

 

이 시로 인하여, 도르곤이 권력을 잡아 섭정왕이 된 후, 일찌기 비밀리에 효장황태후를 취했다는 전언이 돌게 된 것이다.

 

야사와 연의소설의 두찬(杜撰)은 당연히 아무런 근거없는 이야기이다.

 

당연히 효장황태후와 도르곤간에는 확실히 일정기간동안의 "정치적 밀월기"가 있었다.

 

푸린이 즉위할 때 나이가 겨우 6살이었고, 효장도 32살이었다. 효장과 도르곤의 관계가 청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터였다. 도르곤은 7년간 섭정했고, 그와 효장간의 관계는 동맹에서 점점 소원해진다. 심지어 나중에는 원수로 바뀐다. 이 모든 것은 도르곤이 효장과 푸린 두 모자가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한 것때문이다.

 

도르곤이 섭정을 하면서 황태후와 황제가 "분궁이거(分宮而居)" 즉 궁을 따로 나누어 거처하도록 요구했다. 청사고의 기재에 따르면, "예왕섭정시, 황태후와 짐은 궁을 나우어 따로 거주했고, 매월 한번만 만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황태후가 아주 그리워했다." 모자간을 떨어뜨려놓게 되면서 효장은 도르곤에게 원망의 마음을 품게 된다.

 

황제는 나이가 어렸고, 도르곤이 권력을 독단했다. 순치원년부터 5년까지 도르곤의 봉호는 "숙부섭정왕(叔父攝政王)"에서 "황숙부섭정왕(皇叔父攝政王)"으로 다시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으로 차례로 격상되고, 전횡발호하여, 그가 사용하는 의장, 음악과 호송인원등은 모두 황제와 같았다.

 

도르곤은 비록 황제가 아니지만, 그는 명실상부한 청나라의 '실권자'가 된다. 만일 도르곤이 황제에 올랐다면, 효장모자는 폐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권력의 쟁탈전에서 효장과 도르곤은 서로가 상대를 경게하는 상태가 된다. 옛날의 맹우는 이제 서로 대립하는 적이 된 것이다.

 

효장은 도르곤을 내쫓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여러 해동안 은인자중하던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순치7년 십이월, 도르곤이 변방으로 사냥을 갔다가 돌연사한다. 영구를 경성으로 운송한 후, 푸린은 먼저 조서를 내려 국장을 거행하도록 한다. 이어서 도르곤이 황궁에서 가져간 왕부의 인새(印璽)를 모조리 회수한다.

 

도르곤의 심복들과 일당은 아직 와해되지 않았고, 그들이 병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14살의 푸린이 친정을 선포한다. 이 모든 것은 당연히 모후인 효장이 뒤에서 암중 조치한 것이다. 효장의 견식과 지혜로 푸린은 신속히 친정을 할 수 있게 된다.

 

도르곤이 죽은 후, 양백기는 수도호손산(樹倒猢猻散), 나무가 쓰러지면 원숭이는 흩어진다는 국면이 된다. 순치8년 이월, 도르곤에 대한 청산이 시작된다. 순치제는 도르곤의 14개조의 죄상을 열거하며 조서를 전국에 반포한다.

 

도르곤은 작위가 박탈되고, 가산이 몰수되며, 그의 모친과 부인에 내린 봉호도 박탈된다. 도르곤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에 대하여 묘를 파내어 편시(鞭屍)하고, 효수(梟首)한다.

 

효장은 왜 순치제가 도르곤을 청산하는 것을 막지 않았을까? 그것만 보더라도 그녀가 도르곤과 무슨 사적인 감정은 없었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더구나 도르곤에게 시집갔을 리는 없다. 남명의 유로가 <건이궁사>에서 그녀를 모욕한 것은 단지 한족들의 청나라통치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것뿐이다.

 

도르곤의 세력이 제거되고, 인욕부중하던 세월이 끝난다. 소년황제는 마침내 친정을 하게 되고, 효장태후의 마음은 아주 편해진다. 국사도 순조롭게 운영하고, 조정을 안정시키는 것이 그녀의 최대 관심사였다.

 

효장은 황태후의 신분으로 여러번 궁중의 절약한 돔으로 이재민들을 구휼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에게 청나라조정에 대한 호감이 늘어나게 만든다. 그후 그녀는 다시 결혼동맹의 수단으로 세 명의 한족번왕 오삼계(吳三桂), 상가희(尙可喜), 공유덕(孔有德)을 안정시킨다. 그리하여 청나라의 통치는 더욱 공고해진다.

 

순치17년 연말, 나이 겨우 24살의 순치제 푸린이 천연두에 걸린다. 효장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천연두는 당시로서는 불치병이었다. 치료약이 없었다. 그녀는 전국에 "콩을 볶지 말고(勿炒豆), 등을 켜지 말고(勿點燈), 물을 뿌리지 말도록(勿潑水)" 명한다. 이를 통해 황제의 건강을 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푸린은 회복되지 못하고 죽고만다.

 

순치제가 죽은 후, 누가 황위를 계승할 것인가? 효장은 8살된 황삼자(皇三子) 현엽을 선택한다. 탕약망(湯若望, 아담 샬)의 기록에 따르면, 현엽은 어렸을 때 이미 천연두를 앓았기 때문에 다시 천연두에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이 현엽에게 황위쟁탈전에서 가장 큰 장점이었다.  

 

효장은 8살된 손자 현엽을 황제의 보좌에 앉힌다. 이 해에 그녀의 나이는 49세였고, "태황태후"가 된다. 사실은 증명한다 그녀의 선택은 옳았다고. 현엽은 즉위하여 강희제가 되고, 61년간 재위했으며, 청나라역사상 재위기간이 가장 길고, 근정애민한 현명지군이 되었다.

 

효장의 보좌하에 강희제는 14살에 친정한다. 조모의 가르침하에 권신 아오바이(鰲拜)를 제거하고 삼번의 난을 평정하여, 청나라의 통치가 강희제때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고, 흥성하게 한다.

 

강희제는 8살때 부친을 잃고, 9살때 모친을 잃고, 조모인 효장의 손에 길러진다. 그녀는 조모와의 사이가 아주 좋았다. 강희제가 친정한 후, 효장은 전혀 권력을 탐하지 않고, 후궁으로 물러나 말년을 보낸다.

 

강희26년 연말, 청나라의 네 명의 황제시대를 겪은 효장은 75년의 생애를 마치고, 자녕궁에서 눈을 감는다. 임종때, 그녀는 현엽에게 자신의 후사에 대한 당부를 한다:

 

"태종문황제재궁안봉이구(太宗文皇帝梓宮安奉已久), 비불동존(卑不動尊), 차시미편합장(此時未便合葬). 황아심련여황부급여(況我心戀汝皇父及汝), 불인원거(不忍遠去). 무어효릉근지택길안조(務於孝陵近地擇吉安厝), 즉아심무감의(則我心無憾矣)"

(청태종 홍타이시의 묘는 이미 안장된지 오래되었다. 아랫사람때문에 윗사람의 묘를 다시 건드릴 수는 없으니, 지금 합장을 할 수는 없다. 하물며 나는 너의 부황과 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어, 차마 먼 곳으로 갈 수가 없다. 모쪼록 효릉(순치제의 묘)의 가까운 곳에 좋은 자리를 골라서 안치해달라. 그러면 나는 아무런 여한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황조모를 안장하여야 한단 말인가? 이는 현엽에게 큰 난제였다. 조손간에 감정이 깊었다는 것 외에 더욱 중요한 것은 제도상의 어려움이었다. 청태종과 합장하지 않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효장을 효릉 가까운 곳에 안장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효릉은 효장의 아들 순치제의 능이다. 모친의 능이 아들의 능에 붙어 있다는 것은 고금이래로 볼 수 없는 일이다. 

 

황조모를 효릉내에 안장하는 것은 중원의 예법에 맞지 않는다. 물론 만주족의 전통에도 맞지 않았다. 다만 그렇다고 황조모의 유언을 어길 수도 없었다. 결국 강희제가 선택한 것은 황조모가 거처하던 자녕궁 동쪽의 한 전우(殿宇)를 해체하여 효릉 풍수장(風水墻) 바깥에 세우고 "잠안봉전(暫安奉殿)"이라 칭한다. 그리고, 효장의 관을 거기에 안치한다.

 

그후 강희제가 재위한 35년간, 효장은 계속 거기에 "잠안봉"되어 있는다.

 

강희제가 죽은 후, 옹정제가 즉위한다. 증조모인 효장을 어디에 안장해야하는지는 마찬가지로 옹정제의 앞에 놓인 난제였다. 부친 강희제도 해결하지 못한 난제였으므로, 옹정제도 원래는 회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눈치없는 대신들이 상소를 자구 올려서 효장문황후의 능을 만들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더 이상 회피할 수 없겠다고 여긴 옹정제는 대신들을 불러모은다. 그리고 의견을 내놓게 한다. 효장의 유언을 언급하자, 대신들은 합장하지 않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밝힌다. <예경>에도 합장은 그저 형식일 뿐이라고 했다. 청나라는 효장문태후가 사망한 후 국운이 나날이 발전했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그녀의 관이 소재하는 곳이야말로 풍수길지라는 것이다.

 

효장의 유언에서 능묘가 아들 푸린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를 바랐으므로, 그것은 유언에 위배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일은 아주 간단하다. 직접 지금 관이 놓여있는 곳에 능묘를 만드는 것이다. 그게 가장 좋은 일이 아닌가. 황상의 뜻은 아주 명확했다. 대신들도 바로 그에 호응한다. 그리하여 "잠안봉전"은 효장의 능침장소가 되어 버린다.

 

옹정2년 십일월, 37년간 안치되어 있던 효장의 관이 드디어 안장된다. 효장의 능묘는 홍타이지를 안장한 성경의 소릉(昭陵)에서 서쪽에 위치해 있으므로, "소서릉(昭西陵)"이라 부른다. 이렇게 하여 효장은 사망한 후 37년만에 안장된다. 강희제가 해결하지 못했던 난제를 아들 옹정제가 해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