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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초기)

청나라의 대학사(大學士) 제도

by 중은우시 2019. 10. 8.

글: 사우춘(史遇春)


청나라의 대학사를 얘기하자면, 약간의 역사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둘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세하게 셋,넷을 물으면 상세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기실, 청나라때의 대학사라는 이슈는 전문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원래 쓰지 않으려 했다. 그중 주요한 고려는 바로 흥미를 가질 사람이 얼마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보는 사람이 적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슈에 대하여 네가 서너번 본 후에, 이런 기초지식을 보충하고 배워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결정했다. 이 내용을 쓰기로 하자. 첫째는 이것이 나의 역사지식을 보완하는 것이고, 둘째는 내 생각에 나와 비슷하게 이에 대하여 흥미를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자. 그냥 스스로 공부한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모두 같이 발전한다고 생각하자.


먼저 출처를 얘기해보면, 이 글은 청나라때의 주팽수(朱彭壽)의 <안락강평실수필(安樂康平室隨筆)>이 출처이다.


정치제도는 인류사회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모두 전승되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독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 개념에 기초하여, 청나라때의 대학사제도를 얘기하자면, 그것은 청나라사람들이 발명하거나 오리지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명나라때부터 있었던 제도를 답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청나라때, 처음에 대학사를 수여받은 사람은 반드시 육부(六部)중 어느 한 부의 상서(尙書)여야 했다.


소위 육부는 수,당이후 중앙행정기구의 이부(吏部), 호부(戶部), 예부(禮部), 병부(兵部), 형부(刑部), 공부(工部)의 총칭이다. 수나라때부터 육부를 설치했는데, 처음에는 "이(吏), 예(禮), 병(兵), 도관(都官), 탁지(度支), 공(工)부였다. 금방 도관은 형부로 고쳐지고, 탁지는 민부(民部)로 고쳐진다. 그리하여, 이, 예, 병, 형, 민, 공의 육부가 된다. 당고종(이치)이 즉위한 후, 민부(民部)를 호부(戶部)로 바꾼다(이세민의 이름을 피휘하는 것임). 이리하여, 이, 예, 병, 형, 호, 공의 육부의 형태가 완성된다.


육부의 연혁은 그 이전 왕조부터 얘기해야 한다. 진,한때, 구경(九卿)은 중앙의 행정사무를 분장했다; 위진이후, 상서가 분조(分曹)하여 업무를 맡았다. 수나라때부터 육부를 상서성(尙書省)의 구성부분으로 삼고, 전국의 행정사무를 장악한다. 중당때부터 오대에 이르기까지, 육부의 권력은 약화되어, 형동허설(形同虛設)이 된다. 북송 전기에 군정은 추밀원에 귀속되고 재정은 삼사(三司)에 귀속된다. 육부가 장악한 업무는 아주 적었다. 각부의 정관(正官)은  특지공직자(特旨供職者)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기록관(寄祿官)이다. 원풍개제이후, 육부는 다시 본직을 회복한다. 서하, 요, 금의 각 왕조는 모두 한인의 제도를 본받아 육부를 설치한다. 원나라때, 육부는 중서성(中書省)에 소속된다. 명나라초기, 원나라제도를 답습한다. 주원장 홍무13년(1380년)에 재상의 직위를 없애고, 중서성을 패지하고, 그 권한을 나누어 육부에 나누어 귀속시킨다. 이렇게 하여 육부는 독립하고, 직접 황제의 명을 받게 된다. 지위도 더욱 높아진다. 청나라때는 명나라제도를 승계한다. 청덕종 광서28년(1891년) 외무부를 증설하여, 반열을 육부보다 높게 하였다. 광서32년(1906년) 호부를 탁지부로 고친다. 병부는 육군부로 고치고, 형부는 법부로 고치며, 예부는 전례원으로 고치며, 농공상부를 추가한다(공부를 이에 편입시킨다). 민정부, 학부등도 설치된다. 이제 육부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된다.


먼저, 대학사는 반드시 육부중 어느 한 부의 상서를 겸직해야 한다. 다만, 반드시 알아야 할 ㄱ서은, 이때의 대학사가 겸임한 육부상서는 실직이 아니라 허함(虛銜)이다. 그들은 실제로 관리에 참여하거나 자신이 겸직한 '모 부'의 사무를 보지 않았다. 이때 육부상서는 각각 다른 사람이 있었다.


청고종 건륭(1736-1796) 중엽, 이때의 대학사는 육부중의 어느 한 부의 상서를 겸임할 때, 비로소 실질적으로 자신이 겸임하는 '어느 부'의 구체적인 사무를 관리하는 상황이 나타난다.


청인종 가경(1796-1820)시기에 대학사가 육부중의 어느 한 부의 상서를 겸임할 때, 자신이 겸임하는 어느 부의 구체적인 사무를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이미 통상적인 규정으로 확정되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했다.


이렇게 보면, 대학사가 겸임하는 상서의 직무는 명실상부해진다. 그리고 관직이 분명해진다.


여기에서 설명해야할 것은 군기처(軍機處)가 설립된 후, 대학사는 더 이상 기요(機要)업무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학사는 원래 내각(內閣)에 속한다. 다만, 군기처가 생긴 후, 내각의 권력은 자연스럽게 상응하여 약화된다. 이후, 내각에서 대학사가 맡았던 일은 주로 매일 각부, 각성에서 올라온 문건에 대하여 초보적인 답변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조정의 문건을 하달하여 반포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 외에 조정에서 채택한 보고문건에 대하여, 반드시 정식 공문의 형식으로 반포했다. 대학사가 명의상 맡은 이상의 일은 많은 것을 중서(中書)에서 분담했다; 당연히, 이상의 이런 일을 일상적으로 시독관리했다. 그리하여, 대학사는 기본적으로 그냥 앉아있는 것이었다. 그때 국가에 만일 큰 전례가 있거나 큰 회의가 있으면, 대학사는 실제로 일년내내 내각에 갈 필요가 없었다. 나중에 조정은 그렇게 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조정은 대학사에게 육부 중 어느 한 부의 상서직위를 맡게 하였다. 그렇게 되니 대학사는 일년내내 출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동시에 대학사는 공식적인 근무장소가 있었다. 당연히 대학사의 겸임업무는 단순히 모 부의 겸직에 한하지 않는다. 일부 대학사는 지위가 높고 덕망이 있어서 동시에 여러 직위를 맡기도 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대학사는 전력을 다하여 맡은 직위, 내각의 일을 실질적으로 관리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상은 대학사에 대한 기술이다. 아래에서는 청나라때 대학사의 전각(殿閣) 설치에 대하여 얘기해보자.


청나라 입국초기의 대학사는 삼원(三院)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각각 홍문원대학사(弘文院大學士), 비서원대학사(秘書院大學士), 국사원대학사(國史院大學士)이다.


청세조 순치16년(1659년), 삼원대학사를 사전이각대학사(四殿二閣)대학사로 고친다. 이 사전대학사는 각각: 중화전대학사(中和殿大學士), 보화전대학사(保和殿大學士), 문화전대학사(文華殿大學士), 무영전대학사(武英殿大學士)이고, 이각대학사는 각각 문연각대학사(文淵閣大學士),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이다.


청세조 순치18년(1661년), 다시 원래의 삼원대학사를 회복시킨다; 홍문원대학사, 비서원대학사, 국사원대학사.


청성조 강희10년(1671년), 다시 사전대학사로 고친다: 중화전대학사, 보화전대학사, 문화전대학사, 무영전대학사.


청성조 강희38년(1699년), 다시 삼전이각대학사로 고친다: 삼전대학사는 각각 보화전대학사, 문화전대학사, 무영전대학사; 이각대학사는 각각 문연각대학사, 동각대학사이다.


청고종 건륭14년(1749년0에 이르러, 삼전삼각대학사로 확정된다: 삼전대학사는 각각 보화전대학사, 문화전대학사, 무영전대학사. 삼각대학사는 각각 문연각대학사, 동각대학사, 체인각대학사(體仁閣大學士).


이제 대학사는 정원이 초보적으로 확정된다. 즉 대학사는 4명을 둔다.


이전에 청나라의 대학사의 정원은 일정한 수가 없었다. 그 수는 5,6명에서 11,12명까지 서로 갈랐다.


다만, 청고종 건륭35년(1770년), 보화전대학사인 문충공 부찰부항이 사망한 후, 보화전은 더 이상 대학사를 두지 않는다.


이후 청나라 대학사는 이전삼각이 남게 된다. 이 이전대학사는 각각 문화전대학사, 무영전대학사이다. 삼각대학사는 각각 문연각대학사, 동각대학사, 체인각대학사이다.


대학사의 직위를 수여할 때의 명칭은 청성조 강희이후 확정된 법칙이 없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어느 전, 어느 각에는 대학사를 두지 않고, 어떤 때는 하나의 전, 하나의 각에 여러명의 대학사를 두었다.


청인종 가경4년(1799년) 이후, 비로소 매전매각에는 1명의 대학사를 두기 시작한다. 다만, 그때는 이미 확정되어 있었다. 대학사의 정원은 4명만이다. 누가 알았으랴. 이전삼각은 모두 5개인데, 정원은 4명이다. 그래서 대학사로 되는 것은 이전이각, 일전삼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조합은 일정한 원칙이 없었다. 그저 황제의 그때그때 기분에 따랐다. 그가 마음대로 정한 것이다.


이상 대학사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대학사의 서열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삼원 중에는 홍문원대학사가 첫째, 비서원대학사가 둘째, 국사원대학사가 셋째이다. 이전삼각중에서는 문화전대학사가 가장 높고, 무영전대학사가 그 다음이고, 문연각대학사, 동각대학사, 체인각대학사가 차례로 그 다음이 된다.


이런 대학사제도는 청나라말기까지 그대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