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풍천유(馮天瑜)
무한대학 교수
1.
약 10여년전에, 필자는 <당금 청나라궁중드라마의 역사관을 평한다>라는 글을 써서, <옹정왕조>등 청나라제왕을 칭송하는 TV드라마의 사관(史觀)이 공정을 잃고 치우쳤다고 비판한 바 있다. 폭군을 백성을 사랑한 사람으로 포장하고, 형제를 모조리 죽이고, 문자옥을 벌이며, 공론을 없애버린 음모가인 윤진(胤禛, 옹정제)을 "민심을 얻은 자가 천하를 얻는다"라고 칭송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이 지경으로 왜곡시킬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류의 역사드라마는 확실히 <홍루몽>, <유림외사>, <햄릿>, <리어왕>, <전쟁과 평화>같은 국내외의 문학걸작들이 보여준 사회비판의 전통을 크게 역행하는것이고, 전제군주의 독재를 미화선전하는 어용품으로 전락시켰으니, 실로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악이 적다고 할 수 없다.
2
주목할 점은 그후 십여년간, 같은 류의 드라마가 계속 나왔다는 것이다. 독재제왕에 대한 칭송은 갈수록 높아져서, 심지어 귀머거리에게도 울릴 정도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화 <영웅>은 일류배우들을 기용하여 살인을 밥먹듯이 저지른 독부민적(獨夫民賊) 진왕(秦王, 진시황)을 절세영웅으로 절찬했다. 심지어 그를 암살하러 갔던 협사(俠士)마저도 그에게 감화되어 그에게 무릎을 꿇는다. 이는 철저히 "풍소소혜역수한(風蕭蕭兮易水寒), 장사일거혜불부반(壯士一去兮不復返)"의 형가(荊軻) 대협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이것은 역사계, 문학계의 기발한 작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놀라운 점은 <영웅>이후, 진나라를 칭송하는 장편드라마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시청자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볼 수 있었다. 지금 CCTV는 더더욱 일류배우들을 끌어모아 78부작 <대진부(大秦賦)>를 내놓아 진시황을 높이 칭송한다. <사기>등 사서, <과진론>등의 책론, <아방궁>등의 문장, <맹강녀곡장성>등의 민간이야기에서 절세폭군으로 규정되고, 중국역사상 유례없는 도살자이며, 백가쟁명을 끝장낸 인물을 정치의 최고 높은 자리, 도덕의 성전으로 떠받들었다. "천하고진구의(天下苦秦久矣)" 천하가 진나라때문에 고통받은지 오래 되었다를 "천하반진약구한망운예(天下盼秦若久旱望雲霓)" 천하가 진나라를 고대하는 것이 오랜 가뭄 끝에 구름과 무지개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바꿔버린다. 이는 더더욱 역사계, 문학계의 사상유례없는 창거(創擧)이다. 이제 그런 것을 봐도 이상하다고 여기지도 않게 되었다. 이런 일이 많다보니 더 이상 뭐라고 할 수도 없다. 오늘은 단지 이들 드라마의 역사관의 한가지 핵심을 분석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위의 기발한 입장들은 모두 이 사관(史觀)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3
<대진부>의 사론근거를 종합해보면, "진왕은 군대를 동으로 출동시켜, 육국을 쓸어버리고, 천하를 통일해서, 백성들을 속박에서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천하통일'이 천하제일의 정의로운 일이라면, 성공적으로 그것을 실행한 진시황은 당연히 천하제일의 대영웅이라는 것이다.
분석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살펴보자. 진왕이 육국을 쓸어버리고 천하통일한 것이 백성들을 속박에서 구해준 것인가?
사적을 살펴보고, 고고학적 발굴자료를 살펴보면, 우리는 진왕이 비록 '검수안녕(黔首安寧), 불용병혁(不用兵革)"(백성이 평안하게 지내면 군대를 동원할 필요가 없다)과 같은 멋진 말도 했지만, 그가 "육국을 휩쓸고, 천하를 통일한"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모두 자신이 '천하공주(天下共主)'가 되기 위함이다. 주천자와 같이 분권된 종법봉건공주를 넘어서는 모든 군정재문(軍政財文)의 대권을 장악한 독재집권공주가 되고자 한 것이다. 당나라의 유종원, 명청교체기의 왕부지가 말한 것처럼, 진왕이 한 일은 모두 개인의 사적인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이용했고, 모든 것을 파괴시켰다. 진왕은 칭제를 전후하여 칠국의 신민을 노예로 부리는 피비린내나는 역사를 거친다.
몇 대의 진왕은 상앙(商鞅)의 잔민(殘民), 약민(弱民), 궁민(窮民), 우민(愚民)정책을 봉행한다. 중국문화는 원래 "치민(治民)"에 뛰어났고, "민치(民治)"는 결핍되었다. 진나라제도하에서, 민중은 절대로 정권에 요구할 수 없었고, 그저 군왕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서민은 언제든지 군왕에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는 것이 진나라정치에서 다반사였다. 진나라의 장군 백기(白起)는 한꺼번에 40만의 조나라에서 항복한 병사들을 갱살시킨다.(이같이 포로를 도륙하는 잔혹함은 세계전쟁사상에서 다른 사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다). 영정(진시황)은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의 수도 한단, 위나라의 수도 대량, 초나라의 수도 영을 함락시킨 후, 대살륙을 실시하고, 궁중과 민가를 모두 불태웠으며, 귀족과 문화재는 모두 함양으로 옮겼다. 열국은 진군을 "호랑지사(虎狼之師)"라고 불렀는데,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진왕은 자국의 진나라사람들에게도 극히 잔인무도했다. 폭정과 가렴주구로 골수까지 빠내는 것외에 수십만의 백성들을 징집하여 오랫동안 아방궁을 짓게 만든다(나중에 항우가 이 궁을 불태우는데, 수십일간 불에 탔다고 하니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십년을 하루같이 여산에 능료를 만든다(아직 발굴하지 않은 진시황릉은 아마도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부장품이 가장 많은 황제릉일 것이다. 여기에 부속된 병마용의 규모만 보더라도 황릉이 얼마나 웅대할지 짐작할 수 있다). 완공후에는 능묘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수만의 일꾼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이것도 세계역사상 보기 드문 일이다.
모든 사적을 살펴보면, 진왕이 동쪽 육국을 휩쓸어서 백성을 속박에서 풀어주었다는 사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볼 수 있는 것은 시신이 온 들판에 가득하고, 성벽이 무너진 것뿐이다. 그런데 TV장편드라마 <대진부>는 계속하여 영정이 동으로 나가 천하를 통일하는 것은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기 위함이라고 떠든다. 그리고 초나라사람이 진나라에 투항하는 열렬한 장면도 나온다. 이렇게 사실을 날조하는 것은 실로 이해하기 어렵다.
4
통일전쟁과정에서, 진시황, 진이세는 자신의 문신, 무장 내지 왕족 귀족들에게도 무척이나 가혹하고 잔인하게 대했다. 여불위, 한비자, 이사, 몽염, 미씨등 진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들도 모두 비명에 죽었다. 진나라는 이후 왕조에서 개국공신을 살륙하는 선례를 남긴다. 이는 바로 중국의 전제군주정치는 바로 교육기(絞肉機)라는 것을 말해준다. <대진부>는 이것은 가볍게 넘기거나 교육기를 돌리는 진시황을 허구로 따스한 마음을 가진 것으로(예를 들어 여불위의 죽음을 통한해 한다) 그리거나, 혹은 모신들간에 서로를 죽이는 것을 극력 미화한다(예를 들어 이사가 한비자를 모함해서 죽인 것을 한비자가 이사의 품에서 죽는 것으로 그린다). 통일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진나라조정의 군신(진시황 본인을 포함해서)은 거의 모두 끝이 좋지 못했다. 이것은 바로 진나라정치의 잔혹무정한 속성 때문이다. 이런 류의 역사현상을 <햄릿> <리어왕>은 질책하여 역사교육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대진부>는 거꾸로 이를 칭송하고 역사적 사실까지 왜곡하면서 진나라군신을 포장해주고, 포악하고 교활한 진시황을 아름답게 포장하여, 피비린내나는 교육기를 비단으로 덮어 가려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
5
열국을 통일하여 천하를 통일하는 것은 전국시대 사람들의 공통된 바램이었다. 묵자도 여러번 그런 말을 했다. 맹자도 천하 "청어일(定於一)"의 유명한 말을 했다. 한비자는 더욱 명확하고 구체적인 설계를 내놓았다. 진나라, 진왕은 이 역사대세의 실천자였다. 이 점은 인정할 수 있다. 이지(李贄)는 이런 의미에서 영정을 "천고일제(千古一帝)"라 칭했다. 그건 인정할 수 있다. 다만 모든 범주는 절대화해서는 안된다. 특정한 시간적 공간적 조건하에서 평가해야 하다. "천하통일"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의 통일은 전쟁을 끝낼 수 있고, 경제문화의 발전에 유익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유종원의 <봉건론>의 주장에 찬동한다. 진나라제도에서 육국의 문자를 진전(秦篆)으로 통일한 것이라든지, 도량형을 통일한 것이라든지,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세운 것 등등은 진나라제도가 역사에 공헌한 것으로 무시할 수 없다. 이는 진왕이 '악'의 지렛대로 역사를 진보시킨 것이니, 긍정해야 한다. 그러나, 진나라때 확립된 전제군주집권정치는 이천년간 지속되면서 계속 강화되었다. 중국역사상 이는 방대한 양날의 검이 되어 긍정적인 작용과 부정적인 작용을 모두 무시할 수 없다. 근고에서 근대에 이르러서는 부정적인 작용이 날로 커진다. 군주전제집권제도는 중국사회의 근대화전환을 저해한 주요 원인이다. 그래서 문명의 전환된 근현대에 이르러 군주전제를 칭송하고, 진시황의 덕이 삼황보다 높고, 공이 오제보다 크다는 위치에 놓고 그를 숭배하는 것은 너무나 큰 잘못이다.
6
역사진보의 근본적인 표지는 정치의 분치, 합치에 있지 않고, 문명의 진보여부에 있다. 생산방식, 사회주고, 정치제도, 이데올로기의 진보를 포함하여. 역사의 정의를 간단하게 정교가 통일되었는지로 귀결시키게 되면 반드시 허망함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열국이 분립된 서구가 유라시아대륙을 통일한 러시아보다 낙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통일된 제정러시아는 오랫동안 유럽의 경찰역할을 했는데, 이는 근대 유럽진보의 큰 장애물이었다. 서구의 일부 분치된 소국들 예를 들어,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스웨덴, 덴마크는 현대문명의 비교적 높은 모범국이다. 그러나 통일도니 러시아는 지금도 여전히 중등수입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핀란드는 러시아에 '통일'되었을 때, 고난이 컸다. 그러나 러시아라는 민족감옥을 벗어난 후, 수십년간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중고사를 보면, 통일은 한,당의 창성을 이루었다. 그러나 통일도 사회진보의 영단묘약은 아니었다. 몽골이 유라시아대륙을 통일했지만, 지금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동구의 제문명을 엄청나게 파괴했다. 그리고 몽골칸의 통일제국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아시아 유럽제국의 역사는 진보한다. 몽골이 금, 송을 정복하고 거대한 원나라를 건립하였지만, 중화문명을 가장 높이 발전시킨 송나라문명이 크게 퇴보한다. 만주족이 다시 통일하였지만 가정삼도, 양주십일로 명나라때의 문명을 크게 파괴한다. 특히 상품경제가 발달한 강남지역은 고난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원, 청 두번의 통일은 영토를 확장한 공로는 있다. 그러나 문명이 도퇴된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국가통일은 반드시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하고, 모조리 찬양해서는 안된다.
주목할 점이라면, 냉병기시대에 통일을 이룬 것은 왕왕 강력한 후진적인 무리들이었다. 역사상 여러번 후진문명이 천하통일을 이루어, 선진문명을 파괴했다. 진왕이 육국을 통일한 것을 보면, 도량형통일, 문자통일, 봉건제폐지, 군현제건립등 중화문명의 진보에 도움이 된 것들도 있어 긍정해야 하지만, 한,위,제,초와 비교하면 진나라는 낙후된 문명이었다.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킨 것은 어떤 의미에서 야만이 문명을 이긴 것이다. 그래서 파괴성이 아주 컸다. 한나라초기의 가의(賈誼), 조착(晁錯)등은 진나라통일과정에서 번영했던 육국문화가 훼멸적으로 파괴된 것을 글로 남겼다. 전국시대중기부터 진나라통일까지의 100년간, 인구는 1/3로 격감하고, 한단, 대량, 영같은 번화했던 도시들은 폐허로 변한다. 함곡관 동쪽지역의 문명은 한나라의 문경지치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회복된다. 이를 보면 진나라의 천하통일은 백성과 나라에 가져온 재난이 이익보다 적지 않다. 진이세로 망하면서 역대최단왕조가 된 것이 우연은 아니다.
당나라때의 유종원은 진나라통일의 "제도"는 긍정했다. 그러나 그 포악한 "정치"는 비판했다. 명청때의 황종희, 고염무는 전제통일의 진나라제도는 봉권분권의 주나라제도에 비하여 이해득실을 구체적으로 분석했고, 일률적으로 칭송하지 않았다; 근대민주주의자인 담사동은 더더욱 잔혹한 진나라의 폭정을 비판했고, 이것이 근세중국의 낙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대진부>의 시대로 되돌아가면, 진나라는 2세만에 만했고, 진나라제도를 추진하던 사람들도 비극적으로 최후를 맞는다. 상앙부터 한비자, 이사, 부소, 몽염 그리고 진시황본인까지, 모두 비명에 간다. 그리고 진나라이후 2쳔여년동안의 치란순환은 치와 란 모두 진나라제도와 관련이 있다. 중국문명의 현대화가 서구, 일본보다 곤란했던 점은 모두 '백대가 모두 진나라정치와 법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권군소송진시황(勸君少頌秦始皇) 여러분은 진시황을 칭송하지 마십시오
민치정비군치강(民治定比君治强) 백성이 다스리는 것이 군주가 다스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2021년 원단, 풍천유가 무창 낙가산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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