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진시황의 병마용(兵馬俑)과 "요괴(妖怪)" 이야기

중은우시 2020. 12. 9. 12:04

글: 악남(岳南)

 

1974년 봄, 진시황릉의 아래에 위치한 섬서성 임동현(臨潼縣) 서양촌(西楊村)의 야외에서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한무더기의 도기파편을 발견한다. 나중에 국가문물국과 고고학자들의 감정을 거쳐 진시황릉에 배장된 병마용 군진(軍陣)으로 밝혀진다.

 

이해의 7월 15일 오후, 섬서성 고고학자인 항더저우(杭德洲), 위안중이(袁仲一)등 일행은 도구를 가지고 서양촌의 큰 나무 아래에 텐트를 치고, 농민들이 우물을 팠던 현장을 탐사하기 시작한다. 현지농민이 파낸 깊이 4.5미터의 네모난 갱을 보니, 단면으로 볼 때 농경층 이하는 홍소토(紅燒土), 회신(灰燼), 도편(陶片)과 병마용의 머리, 팔, 다리로 가득했다. 병마용은 이미 부서져서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크기는 알아볼 수 있었다. 이런 규격의 도용(陶俑)은 본 적이 없었다. 고고학자들은 크게 놀라서, 부지불식간에 탄식을 낸다: "기적이다. 정말 기적이다!"

 

한차례 감탄을 한 후, 고고인원들은 발굴절차에 따라 일을 시작한다. 현지의 지리환경을 파악한 후, 다시 일련의 사진촬영, 문자기록, 측량등 고고인원들에게 불가결한 일들을 진행한다. 그후에 일제조사를 시작한다. 문헌도 찾고, 현지인들도 인터뷰한다. 역대왕조에서 편찬한 역사서에는 병마용에 관한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을 노인들에게서 들은 바에 따르면, 진시황릉 주변의 황탄(荒灘) 아래에서 자주 '요괴'가 나타났다고 한다. 현지 촌민들은 그게 복인지 화인지 몰랐고, 겁을 먹었다. 어떤 '요괴'의 출토에 대하여는 현지에 문자기록이 남아 있기도 했다.

 

요괴이야기 1

 

명나라 숭정17년(1644), 이자성이 서안에서 건국한 후, 대군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북경으로 진격한다. 도르곤은 수십만의 팔기자제를 이끌고 산해관 동쪽의 설원에 주둔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대명제국은 이미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고, 역사의 사해(死海)로 가라앉고 있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여산(驪山)의 아래에도 난민들이 운집한다. 서양촌은 졸지에 피난온 백성들이 넘쳐났다.

 

여전히 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왔다. 마을에 유일한 우물 하나만으로는 사람들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난민들은 사람을 모아 마을 남쪽의 황탄(荒灘), 진시황릉에서 3리쯤 떨어진 저지대에 우물을 팠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고, 3일만에 파낸 우물의 아래에서 맑은 물이 솟아났다. 그런데, 하룻밤만에 우물물은 사라져 버린다. 그래하여 물통을 내려도 물을 길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모두 괴이하다고 여긴다.

 

한 청년이 밧줄을 자신의 허리에 묶고, 우물로 내려가 살펴보기로 한다. 우물 위에 있던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고 있는데, 갑자기 우물 아래에서 공포에 질린 비명이 들려온다. 그리고 나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 급히 청년을 끌어올렸다. 청년은 입에 게거품을 물고, 혼절해 있었다. 사람들은 청년을 급히 들것에 실어 마을로 돌아간다. 강탕(姜湯)을 먹여서 깨운다. 그 청년은 깨어난 후 뭐라고 소리치며, 손짓을 하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대담한 사내가 칼을 들고 다시 우물로 내려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로 한다. 우물의 아래는 어두워서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내는 손으로 벽을 더듬으면서 사방을 살폈다. 우물벽은 이미 물때문에 한층이 무너져 있었다. 

 

바로 이때 등뒤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사내는 급히 몸을 돌렸는데, 우물벽이 한무더기 무너져 내렸다. 이어서 검은 구멍이 나타났다. 구멍이 있는 곳에는 무섭게 생긴 요괴가 서 있는데, 마치 그를 향해 다가오는 것같았다.

 

사내는 본능적으로 칼을 휘둘러 요괴를 베었고, 우물 위를 향해 구해달라고 소리친다. 그를 우물밖으로 끄집어 냈을 때, 그의 얼굴은 이미 흙색이 되어 있었고, 혼절하여 바닥에 쓰러진다.

 

이 소식이 퍼지자 그후론 아무도 우물 아래로 내려가서 확인해보려고 하지 않았다. 서양촌의 한 노수재는 역사전적을 뒤져서 마침내 '흙을 파서는 안된다(不宜動土)'는 근거를 찾아낸다. 그리고 수수께끼같은 우물은 다시 메워진다.

 

그 노수재는 후인들이 '흙을 파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특별히 '필기'형식으로 이 사건을 기록한다:

 

"대명 숭정 17년 삼월 초칠일. 백성들이 마을 밖에서 우물을 팠다. 삼일만에 물이 나왔다. 그날 밤에 물이 사라지고 더 이상 물을 길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이상하다고 여겼다. 한 젊은이가 몸을 묶고 우물을 내려간다. 그는 놀라서 소리치며 혼전했다. 강탕을 먹여서 깨웠지만, 그 젊은이는 우물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다른 장사가 칼을 차고 다시 그 우물을 내려간다. 벽이 무너지고, 한 괴물이 진짜 사람같았다. 사람을 몰아부치는 것같은 모습이었다. 그 장사는 너무 놀라서, 칼을 휘둘러 괴물을 베었다. 괴물은 쓰러지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장사가 구해달라고 소리치는 것을 듣고는 끄집어 냈다. 장사는 오랫동안 혼절하여 깨어나지 않았다. 내가 그것을 듣고, 흙을 파서는 안된다고 말해주었더니, 다시 메웠다. 오호, 나라가 망하려고 하니 요물이 나타나는 구나 이를 기억하게 해서 후인들을 일깨우고자 이 글을 쓴다."

 

노수재의 이 '흙을 파서는 안된다'는 이론은 비록 후인들을 일깨워주지는 못했지만, 이곳을 파는 것은 중단시켰다. 다만 이 '필기'는 최초로 진시황릉 병마용에 대한 정보를 기록한 것이 된다.

 

요괴이야기 2

 

청나라 선통연간, 여산의 아래에 있는 하화촌(下和村)에 화흥도(和興道)라는 노인이 돌연 병사한다. 가족들은 비통해 하면서 그를 위해 무덤을 만든다. 한 풍수선생이 가르쳐준대로 서양촌 남쪽의 황탄을 묘지로 선정한다. 풍수선생의 말에 따르면, "이 땅은 여산을 등지고, 진릉을 서쪽에 의지하고 있으며, 화산의 아름다운 봉우리가 오른쪽에 있으며, 위하의 물에 임해 있으니 실로 얻기 힘든 풍수길지이다. 이곳에 매장하면, 분명히 집안이 흥성할 것이다."

 

화씨일가는 풍수선생이 정해준 구체적인 장소를 파내려갔다. 묘지가 거의 완공되었을 때, 공포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얼굴이 사납게 생긴 '요괴(실제로는 도용)'의 머리가 지면에 나타난 것이다. 놀란 나머지 화씨일가는 일족의 어르신을 모셔서 살펴본다. 그 어르신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장탄식을 하고 말한다: "이는 불길한 징조이다. 우리가 풍수선생에게 속았다. 그는 우리의 후대를 끊으려 했나보다!"

 

일이 복잡해 졌다. 현지의 풍속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묘지로 1곳을 선정해야 했다. 묘자리가 정해지고, 일단 첫삽을 뜨고나면, 무슨 일이 발생하더라도, 죽은 사람은 그곳에 묻어야 한다. 만일 묘지를 바꾸면, 집안에 누군가가 반드시 죽는다고 한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게 되었는데, 이곳은 명백하게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분개하고 실망한 화씨일가는 풍수선생을 찾아가서 따지게 된다.

 

돈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서 여유있게 술을 마시고 있던 풍수선생은 돌연 쳐들어온 네명의 장정들에게 뺨을 얻어맞고, 술상은 뒤집어 진다. 풍수선생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4명의 장정은 그를 붙잡아 묘지로 끌고 간다. 이때는 이미 도용이 모두 화씨가족들에 의해 파내어져 있었따. 

 

풍수선생은 땅위에 놓여 있는 진짜 사람크기의 '괴물'을 보고 먼저 크게 놀란다. 이마에서는 땀이 솟아났지만, 점점 정신을 차리게 된다. 그가 수십년간 풍수를 봐주었지만, 이런 일은 생긴 적이 없었다. 정말 세상에 온갖 일이 다 일어나는 법이다. 

 

이런 사납게 생긴 '괴물'과 화씨가족의 비분강개한 모습을 대하면서도 그는 그동안 강호에서 굴러온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대응해 나간다. 그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화씨가족의 어르신 앞으로 가서 큰 소리로 말한다: "너희는 어떻게 이렇게 은혜를 원수로 갚느냐?"

 

"이걸 봐라. 이게 뭐냐?" 어르신은 흰 수염을 부들부들 떨면서 도용을 가리킨다: "너는 죽은 사람이 이런 요괴와 같이 지내라고 했단 말이냐? 이게 자손을 끊기 위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풍수선생을 교활한 웃음을 지었다. "그것때문이군요. 보세요. 이게 뭡니까?" 그는 어르신의 시선을 멀지 않은 들판을 가리켰다.

 

들판에는 십여개의 언덕이 보였다. 어르신은 그것을 쳐다보았지만 무슨 말인지 몰랐다. "잘 모르겠다!" 풍수선생은 말을 부드럽게 바꾼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땅 아래에 묻힌 것은 모두 돌아가신 선조들입니다. 이들 선조의 후손들은 모두 성공했습니다." 풍수선생은 화씨일족을 데리고 언덕으로 간다. 그리고 하나하나 가리키면서, "이것은 삼국시대 오관중랑장 조세제(趙世濟)의 부친묘지입니다; 이곳은 명나라 가정연간 예부상서 왕전승(王戰勝) 모친의 묘지입니다; 이는 청나라 강희4년 장원 양무완(楊茂完)의 부친 묘지입니다; 그리고 이 몇 개는 모두 역대 명인 선비집안의 선조들의 장지입니다...."

 

풍수선생은 목을 가다듬은 다음에 그 백발의 어르신에게 말한다: "그들의 후손들이 무엇때문에 이렇게 혁혁하고, 사람위의 사람이 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무엇때문인가?" 이때는 화씨일족이 이미 풍수선생의 운산무조(雲山霧罩), 불착변제(不着邊際)의 언변에 이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분노를 억누르고 이렇게 반문한다.

 

풍수선생은 화씨일족들이 이미 어느 정도 그의 말에 넘어왔다고 느끼고 대담하게 그의 사기술을 펼친다. 그는 도용의 앞으로 가서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의 공로입니다."

 

화씨일족은 더더욱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제 풍수선생의 교묘한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선부(先父)가 돌아가실 때, 나를 불러서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아이야. 내가 평생 풍수를 보았기 때문에 이곳저곳을 모두 다 알고 있는데, 오직 마을의 동남쪽의 그 황탄은 잘 모르겠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땅인데, 어떻게 그곳에 묻히기만 하면 모두 집안이 성공하는지. 나는 평생 아무도 그곳에 묻으라고 하지 못했다. 너도 아무렇게나 사람을 그곳에 묻도록 하지 말라. 언젠가 네가 깨닫고 나면 그때 행하도록 해라' 말을 마치시고 선부는 눈을 감으셨습니다." 풍수선생이 여기까지 말하자, 마치 시장터에서 소설을 읽어주는 사람처럼 고의로 신비로운 점을 남겨서 사람들의 궁금증을 부추겼다.

 

"그 다음에는?" 마침내 누군가 그의 함정에 걸려 들었다. 

 

"나는 선부의 유훈을 기억했고, 이곳에 대하여 연구했다. 다만 30년이 지났지만 깨닫지 못했다. 나중에 나는 황고묘(皇姑廟)에서 향을 사르며 기도했다. 마침내 선인(仙人)의 가르침을 받았다. 원래 이곳에 묻힌 선인들의 묘의 곁에는 이 보배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고서에서 말하는 천신(天神)이다. 이 천신이 보우해서 매장된 사람들의 후손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인가?" 화씨일족들은 그의 말에 완전히 넘어 왔다.

 

"내가 보기에 너희 화씨일족은 사람됨이 후덕하고 충성스럽다. 나의 부친과도 교분이 있다. 그래서 묘혈을 이곳으로 정해준 것이다. 나는 원래 이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천기는 누설해서 안되는 법이다. 그저 자연에 맡겨야 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너희가 이렇게 난리를 쳐서 이제 천기를 누설해 버렸다. 너희 화씨일족의 백년조화는 이제 연기로 날아갔다. 안타깝다. 정말 안타깝다!" 풍수선생은 말을 마치고, 땅에 주저앉아 숨을 내쉬었다. 아주 안타깝다는 듯ㅇ.

 

화씨일족은 그제서야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백발의 어르신은 부끄럽고 후회되어, 얼굴이 벌개져서 사죄를 한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풍수선생의 집에 술과 고기를 보내주도록 한다.

 

조금전의 치욕을 씻기 위하여, 그리고 술기운에 의지하여, 마음 속으로 괴이한 초식을 떠돌려 화씨일족을 놀려주기로 한다. 술과 음식을 다 먹은 후, 그는 백발의 어르신을 속여서 다시 한번 돈을 뜯어낸다.

 

풍수선생이 시킨대로 밤에 화씨일족은 '요괴'를 조용히 집으로 데려갔고, 밧줄로 묶어서 죽은 자의 앞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아들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서 도용의 머리에 뿌린다. 그후에 도화나무로 도용을 때린다. 여명이 되어 닭이 울때까지 그렇게 했다. 이렇게 연속 3일간 계속한 후, 화씨일족은 다시 깊은 밤에 '괴물'을 묘지로 들고 가서 묻어준다. 이것은 풍수선생의 화씨일족에 대한 보복이었다. 화씨일족은 정말 이렇게 하면 자손이 무성하고 가업이 흥성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이런 전설적인 야이기는 나중에 고고학자들이 부근의 농촌을 조사하다가 들었다. 이야기해준 사람은 바로 그 풍수선생의 아들이었다. 나이는 이미 팔순이 넘었고, 백발이 성성했다. 그는 조상의 가업을 이어받아 풍수를 봐주는 사람이다. 그의 부친은 그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목적은 그에게 임기응변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여러가지 생각지도 못한 위험한 국면을 맞이하더라도 대응방법을 찾아내라는 것이다.

 

이야기는 비록 어느 정도 윤색된 것같다. 그러나 기본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나중의 대규모 발굴에서 확실히 십여기의 묘장은 이미 병마용갱을 뚫고 들어갔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한나라때의 것이고, 두 개는 명청시기의 묘장이다. 주위의 도용은 모두 움직여진 명백한 흔적이 있었다. 아쉽게도 이런 정보는 더 많ㅇ느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고 우매하게 매장해 버렸었던 것이다.

 

요괴이야기 3

 

1932년 봄, 진시황릉 내성 서쪽벽의 바깥 약 20미터 지점에서 현지인이 땅을 파다가, 1미터깊이의 지하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진흙 '요괴'(실제는 도용)를 파낸다. 이때 관중은 군벌혼전이었고, 사방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 도용은 금방 행방불명이 된다. 추측에 따르면, 이 '요괴'는 나중에 대만으로 도망친 국민당군대가 가져간 것같다.

 

1948년 가을, 진시황릉 동쪽의 초가촌(焦家村) 부근의 농민이 다시 2개의 진흙 '여요(女妖)'를 발굴해낸다. 모두 앉은 자세였다. 몸에는 교금장의(交襟長衣)를 입고 있으면서, 머리 뒤로는 원형의 상투가 있었다. 하나는 임동현 문화관이 소장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중국역사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

 

이 3개의 '요괴'(도용)는 운이 좋게 사람들에게 돌아왔다. 다만 사람들은 그것을 발견하였지만 중시하지는 않았다. 현지인들은 내력이 불명확한 '요괴'로 취급했다. 문화재업무종사자들은 그저 그 자체의 가치를 평가해서 '진나라전성기의 위대한 예술창작품'이라고 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더욱 상세하게 연구하지는 않았다. 일대명가 정진탁(鄭振鐸)이거나 중국역사박물관의 연구원이라는 직함을 가진 전문가들도 모두 그 남성궤좌용(男性跪坐俑)을 '여성'이라고 보았다. 당연히 겉모습만 보면 그 도용은 젊은 여자같기는 하다.

 

요괴이야기 4

 

1964년 9월 15일, <섬서일보>는 1면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위치에 한가지 뉴스를 싣는다:

 

"임동에서 진나라때의 도용이 출토되다.

 

최근 임동 진시황릉 부근에서 다시 진나라때 도용이 1개 발견되었다. 초가촌 서남쪽 약 150미터 지점이다. 금년 4월, 군중은 면화지를 정리하다가, 지면에서 약 1미터 지점에서 발견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여자 도용이다. 이 도용은 해방전에 발견된 2개의 도용보다 더욱 완벽하다. 머리카락, 옷무늬가 분명히 드러난다. 모습은 조용하고 대범하며 마치 살아있는 것같다. 현재 문화재는 임동현 문화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는 진용이 20여세기를 매장되어 있다가 처음 관방문자로 보도된 것이다. 또한 이 지하군진을 지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중요한 정보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킨 후, 이 정보는 금방 잊혀진다. 이 8천여개의 병마용이 암흑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직 1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