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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진시황의 왕후는 어느 나라출신이었을까?

by 중은우시 2022. 7. 5.

글: 해숙설춘추(海叔說春秋)

 

사서를 아무리 뒤져 보아도 진시황의 왕후에 대한 기록이 없다. 소위 진황한무당종송조(秦皇漢武唐宗宋祖)중 나머지3명의 왕후에 대하여는 모두 기록이 있다. 그러나 진시황은 중국역사상 아주 중요한 군주임에도 왕후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는 기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현존하는 사서에서는 진시황의 황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지만, 그 왕후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추측해보는 것은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진시황의 앞 3대 즉, 진소양왕(秦昭襄王), 진효문왕(秦孝文王), 진장양왕(秦莊襄王)을 살펴보면, 진시황 가족내의 미묘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진소양왕이 가장 총애한 후궁은 초나라여인 미팔자(羋八子, 羋月)이고, 진효문왕이 가장 총애한 후궁은 화양부인(華陽夫人)이다. 이 두 명은 모두 초나라여인이다. 이에 상응하여 많은 초나라사람들 혹은 초나라파벌에 속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진시황의 <추증백기무안군조(追贈白起武安君詔)>에 따르면, "자이(諮爾), 무안군백기(武安君) 백기(白起), 선원양초(先源兩楚), 계차삼진(繼次三秦)"이라고 되어 있어, 백기의 조상은 초나라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나중의 창평군(昌平君), 창문군(昌文君), 위염(魏冉)등등도 모두 초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들이다.

 

만일 여불위(呂不韋)와의 관계를 완전히 배제한다면, 진시황의 부친 진장양왕은 조금 달랐다. 진장양왕은 조(趙)나라에서 조희(趙姬)를 데려온다. 이 조희는 초나라여인이 아니다. 이 조희는 진나라에서 평가가 좋지 못했다. 아마도 조희가 진장양왕을 따라온 것은 그 자체로 진나라 후궁들 중에서 초나라파벌에게 큰 타격이 되었을 것이다. 그중 특히 화양태후를 우두머리로 하는 중량급인물들에게 그러하다. 그리하여 내심으로 진장양왕에게 초나라출신 부인을 찾아주려고 생각했을 것이다. 쉽게 조희의 지위를 인정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희에 대한 평가는 아마도 상당한 부분이 진나라후궁내의 초나라파벌들이 지어낸 작품일 것이다.

 

다시 진시황의 곁에 있는 사람들을 보자. 가장 유명한 이사(李斯)는 기실 초나라사람이다. 그후 창평군, 창문군, 그중 창평군은 초나라 고열왕(考烈王)의 아들이다. 이를 보면, 진시황시대에도 초나라사람은 여전히 진나라의 조정내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진효문왕, 진장양왕 두 명은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그렇다면 영정(嬴政, 진시황)을 순조롭게 진나라의 최고권력자에 오를 수 있게 한 핵심인물로서, 화양부인은 당연히 초나라파벌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TV드라마 <대진제국>에서도 아마도 이 점은 인정하는 것같다. 직접적으로 화양부인을 진나라내에서 초나라의 대변인으로 그리고 있다. 화양부인은 당연히 초나라사람으로서 진나라내에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반드시 더 많은 초나라사람을 권력중추에 넣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정을 위하여 초나라여인을 배필로 골라주는 것은 최선의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진왕 영정은 초나라여인을 취했을까? 사서에서는 답안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나중에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난때 내건 기치가 바로 "부소(扶蘇), 항연(項燕)"이다. 정한 국호는 "장초(張楚)"이다. 그렇다면, 항연은 초나라사람이므로 문제가 없는데, 부소는 왜 나왔는가? 부소는 진왕 영정 즉 진시황의 적장자(嫡長子)이다. 농민반란군이 내세운 인물이 그런데 부소이다. 이는 아주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소를 왜 항연과 나란히 내세웠을까? 왜 "초"와 그를 관련시켰을까? 여기에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서주이래의 예법중에서 소위 적장자계승의 법칙이다. 즉 부소는 적장자로 당연히 진나라의 황제가 되었어야 했다. 그의 동생인 진이세 호해가 아니라. 진승오광이 부소를 내세운 이유는 아마도 천하에 난을 바로잡고 제대로 세우겠다고 선포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부소와 초나라간의 관계는 아마도 부소의 모친이 초나라사람이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왜 사서에서 단 한마디도 찾아볼 수 없을까? 아마도 부소가 계승권을 박탈당한 후, 진나라의 조정과 후궁에서 엄청난 사태가 일어났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큰 사태였을까?

 

이것은 아마도 진나라의 한 전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진나라의 대장 이신(李信)은 병력을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한다. 창평군은 초나라의 항연과 손을 잡고 초나라땅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신의 대군을 앞뒤에서 협공한다. 이신의 참패는 아마도 진나라에서 근 백년이래 최대의 참패였을 것이다. 20만대군이 모조리 섬멸되었다. 핵심원인은 바로 창평군의 반란이다. 그렇다면, 창평군은 왜 반란을 일으킨 것일까?

 

창평군은 정통의 초나라 공족자제이다. 진나라대군이 고국의 땅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만일 초나라사람의 입장에 선다면, 다연히 창평군은 선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창평군의 선택은 진나라를 배반하는 것이었다. 창평군의 이 결정은 진나라에서 생활하는 초나라출신의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그후 왕전(王翦)이 전국의 병력을 끌어모아 초나라를 멸망시킨다. 만일 부소의 모친이 초나라사람이었다면, 그녀와 창평군의 관계에 대하여 분명 의심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부소의 계승권을 박탈하고, 후계자의 지위를 진이세 호해에게 넘겨준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중에 진시황이 순행중에 급사하고, 조고가 비불방상(秘不發喪)하면서 유조를 고쳐서 진이세에게 황위를 넘겨주었다는 이야기도 아마 사실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세를 세우는 것은 진시황이 결정했기 때문이다.

 

진승오광이 "부소, 항연"을 내세운 배후에 숨겨진 것은 아마도 이런 비밀일 것이다: 진시황에게 왕후가 있었다면, 아마도 부소의 모친일 것이고, 그녀는 바로 초나라 여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