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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진시황릉: 역대제왕릉은 남향인데, 왜 진시황릉은 동향일까?

by 중은우시 2019. 5. 18.

글: 남몽도주(藍夢島主)


진시황 영정은 육국을 휩쓸고, 천하를 통일하여 화하의 대통일을 완성한다. 그는 중국 최초로 황제를 칭한 군주이다. 그리고 고대에 가장 명실상부한 천고일제(千古一帝)이기도 하다.


진시황과 같이 역사의 정상에 선 인물에 대하여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수도 없이 많다. 예를 들어, 생부(生父)의 수수께끼, 사인(死因)의 수수께끼, 전위(傳位)의 수수께끼등등. 그중 진시황릉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가장 많고, 가장 신비하다. 예를 들어, 진시황릉의 특이한 방향과 같은 것이다.


진시황릉은 섬서성 서안시 임동구의 성동쪽 5천미터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여산을 의지하고, 북으로는 위수를 이웃하고 있다. 아주 뛰어난 풍수의 길지이다. 다만, 진시황릉의 조향(朝向)은 풍수에 부합하지 않는다. 죄서향동(坐西向東) 즉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이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현대 고고학에 따르면, 일찌기 원시사회때, 중국의 원주민들은 좌북조남(坐北朝南) 즉 북에서 남으로 향하도록 촌락과 집을 지었다. 이렇게 하면 채광에 유리하고 바람을 피하는데도 유리하다. 그리고 중국고대인들의 풍수학의 이념에도 들어맞았다. 이천년동안의 봉건왕조사를 살펴보면, 역대왕조의 제왕릉은 대부분 좌북조향이다. 일르 통해 사후에도 여전히 지고무상의 제왕의 존엄을 누리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생전에 구오지존(九五之尊)의 자리에 있었고, 사후에도 여전히 군림천하(君臨天下)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시황릉은 도대체 왜 좌북조남이 아니라, 좌서조동으로 만들었을까?


일찌기 영정이 진왕으로 있을 때, 이미 거대한 능침의 건설공사를 시작한다. 그래서 먼저 확실한 것은 좌서향동의 능침방향은 바로 진시황의 뜻이라는 것이다. 진시황이 통상적인 방식과 달리 이렇게 선택한 구체적인 원인을 따져보면 다음과 같다. 만일 부당하거나 부족한 점이 있다면 지적해주기 바란다.


원인 하나:


모두 알고 있다시피, 진시황은 신선을 찾아서 장생불사의 도리를 깨치고자 했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그는 심지어 어의 서복을 파견하여 불사의 비방을 찾게 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죽을 때까지 그 소원은 이루지 못한다.


고대인들은 신선은 동쪽에 산다고 믿었다. 진시황릉이 좌서향동을 한 원인중 하나는 바로 그가 자신의 사후에도 동영을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를 통해 신선을 만나 천국선경에 이르고 싶어 했고, 살아 있을 때 이루지 못한 바램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원일 둘:


사마천의 <홍문연>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항왕(項王), 항백(項伯)은 동향(東向)으로 앉괴 아부(亞父)는 서향(西向)으로 앉았다. 아부는 범증(范增)이다. 패공(沛公)은 북향으로 앉고, 장량(張良)은 서향으로 시립해 있었다." 이를 보면, 홍문연때, 주인인 항우와 연장자인 항백은 모두 서쪽에서 동쪽을 보고 앉는다.


진나라때,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것이 존귀한 자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고고학적으로도 증명이 된다. 섬서성 경내에서 발견된 917개의 진나라 묘장 중에서, 대다수는 동서방향으로 놓여 있다.


진시황은 죽기 전에 천하의 주인이었다. 죽은 후에도 존귀한 자리를 유지한다. 그래서 그의 능침은 서에서 동으로 향한 것이다. 아마도 자신이 주인이자 제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원인 셋:


진시황은 13살때 부친으로부터 왕위를 이어받는다. 22살때 정식으로 친정을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장기적 안목과 웅심을 지닌 군주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6국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큰 그림을 그린다. 기원전230년에서 기원전221년까지 10년동안, 진시황은 전후로 한, 조, 위, 초, 연, 제의 육국을 멸망시켰고, 39살때 천하통일의 천고대업을 완성한다. 한족을 주체로 하는 중앙집권의 강대한 국가인 진왕조를 건립한다. 이는 중국본토의 광활한 영토를 확립한 것이고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진시황은 생전에 이처럼 위대한 업적을 쌓았고, 죽어서도 여전히 천하를 오시했다. 이를 통해 대진제국이 천추만대 영원히 존속하기를 바랐다. 지리적 위치로 보면, 진나라는 전국칠웅중에서 가장 서쪽에 있다. 진시황은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사후에 서방을 점거하고 멀리 동방육국을 바라본다. 그렇겍 자신의 왕국 자신의 천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진시황릉이 제왕묘장의 통상적인 법칙을 어기고 좌서조동을 취한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고의로 그렇게 한 것이다. 거기에는 진시황의 바램과 이상이 들어 있다. 동시에 그의 천고제왕으로서의 패주야심도 들어 있다.


당연히 이것은 모두 필자의 추측이다. 진시황릉이 왜 동향인지에 진정한 원인은 아마도 그만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