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전록(柳傳錄)
진시황은 중국역사상 최초의 황제이다. 한단(邯鄲) 출신이니 하북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실 그의 고향은 하북이 아니다. 그가 봉선지로 태산을 선택한 것을 보면 그중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
기원전221년,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후, 그해에 서둘러 태산에 봉선을 한다. 봉태산선양보(封泰山禪梁父)의 광세의 대전을 거행한다. 대정(垈頂)에 진나라의 문화이념을 대표하는 석궐(石闕)을 세우고, 태산공정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태산사공(泰山司空)을 설치하며, 돌을 세워 진나라의 덕을 칭송한다. 그후에 여러번 태산의 주위를 동순(東巡)한다. 진시황은 왜 수도 부근에 있는 종남산(終南山) 혹은 화산(華山)을 선택하여 봉선하는 성산으로 삼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태산을 봉선지로 삼은 것일까?
진시황의 동순과 태산봉선의 원인에 대하여 일반적으로는 두 가지를 거론한다. 하나는 정치적 원인으로 동방의 반항을 진압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둘은 동방에 가서 선인을 만나 장생불로의 선약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기실 이것들은 모두 겉모습이다. 진시황은 무력을 믿는 황제이다. 그의 수하에는 육국을 멸망시킨 정예부대와 장수가 있다. 황제가 직접 움직일 필요조차 없다. 그는 제국이 강대한 군단을 유지하면 진왕조는 천년만년 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있게 스스로를 시황제라 칭한 것이다. 아래로 이세, 삼세, 이렇게 만세까지 이어지도록 하려 했다. 이 점으로 보면, 동방의 반항을 진압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태산봉선의 주요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진나라이전에, 태산은 선산(仙山)이 아니었다. 반대로 바로 진시황이 태산에 봉선했기 때문에, 처음으로 태산신앙은 동이(東夷)에서 전국신앙으로 확대된 것이다. 태산이 도가의 '선산'이 된 것도, 진시황이 태산에서 봉선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신선을 구하는 것도 진시황의 태산봉선의 주요원인이 될 수 없다.
진시황은 주요원인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다. 진나라는 서북에서 굴기했다. 그러나 조상의 뿌리는 서쪽에 있지 않았고, 동쪽에 있었다. 그의 태산봉선의 주요원인은 바로 회가심근(回家尋根)이다. 즉 고향으로 돌아가 뿌리를 찾는 것이다. 사람이 외지에 나가서 성공하고 나면 고향으로 금의환향하여 자랑하는 것처럼 진시황이 고향으로 돌아간 것도 이런 심리이다. 단지 그가 자랑한 대상은 그의 영가(嬴家) 신앙의 태산 신령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고향은 태산의 자락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쓴 <사기>이 대부분은 역사적 진실에 부합한다. 그러나 문자기록이 없는 사전역사기록은 착오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특히 그 본인이 한족(漢族)의 조상을 설명하면서 모두 황제(黃帝)의 자손이라고 하고, 오제, 삼대의 조상도 모두 황제의 후손이라고 적었다. 이는 한족의 형성에 거대한 촉진제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영진(嬴秦)의 조상은 <사기>에 기록된 것처럼 황제의 후예가 아닌 것이다.
화족(華族)은 중국역사상 최초의 씨족이다. 그녀는 인문시조 복희(伏羲)보다 앞서서 나타났고, 동이(東夷)의 일족이다. 나중에 서하족(西夏族)과 융합하여 화하족(華夏族)이 된다. <성씨고략(姓氏考略)>을 보면, "하중강봉관어서악(夏仲康封觀於西岳), 왈화씨(曰華氏)". 금문(金文)의 '화(華)'는 '래(來)'로 쓴다. 이는 래이(婡夷)가 변해서 '화족(華族)'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래이'는 신농씨 일족이다. 그래서, 신농씨 래이도 화족에 속한다. 중국역사상 최초의 화족은 주로 복희씨족과 신농씨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농씨 래이는 설사 최초의 화족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가장 먼저 화족에 융합되어 들어온 화족이다. 태산 주위는 '래(徠)'라는 지명이 아주 많다. 예를 들면, 조래산(徂徠山), 오래봉(傲徠峰), 래무(萊蕪), 석래(石萊)등등. 이들 '래'라는 지역은 원래 화(華)의 땅이다. 하광악(何光岳)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선해경. 해외남경>의 '주화지야(鑄華之野)"는 바로 지금의 산동성 태산 일대이다. 왕헌당(王獻唐)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사수(泗水)의 동북 사십오리에 화서산(華胥山)이 있는데 황산(黃山)이라고도 부르고, 황산채(黃山寨)라고도 부른다. 산의 아래 동남쪽에는 황구(黃溝)가 있는데 즉 고화저(古華渚)이다. 서쪽에는 화촌(華村)이 있다. 즉 한나라 태산군의 화현(華縣)의 옛지역이다. 지금 이 촌은 태안(泰安)의 관할에 속한다." 황하하류의 평원은 화족이 말기에 활동하던 주요지역이다. 태산은 그 활동의 중심무대였다. 팔백리 진천(秦川)과 하락지구는 하족(夏族) 말기에 활동했던 주요지역이다. 왕옥산(王屋山)과 숭산(嵩山)은 그 활동의 중심무대였다.
화하족의 조상은 각각 동이족과 서하족에서 나왔다. 그들의 부락 추장은 동이에는 치우(蚩尤), 염제(炎帝)가 있고, 서하에는 황제(黃帝)가 있다. 동이가 서진하고, 서이가 동래하면서 중원에서 만난다. 그리하여 불가피하게 전쟁이 일어난다. 염황지전(炎黃之戰)이다. 염제는 황제에 귀순하고, 황제는 다시 치우를 붙잡아 죽인다. 긜고 신농을 대신하여 천자에 오른다. 이렇게 하여 중국북방은 초보적으로 통일된다. 이는 중국역사상 화하민족의 최초 대융합이다. 이번 대융합이후 황제를 대표로 하는 하족이 주도적 지위를 장악한다. 그리고 서하, 동이가 차례로 연맹수령을 맡는 제도가 형성된다.
동이의 순(舜)은 태산 부근의 역산(歷山, 지금의 제남)에서 태어난다. 대우(大禹)에게 선양한다. 태산 남쪽자락 석문하(石汶河)의 강가에는 우석문(禹石汶)이라는 지명이 있다. 바로 우가 태어난 곳이다. 우는 서하족이다. 마땅히 선양을 할 때 태산 자락하의 동이족인 백익(伯益)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백익은 바로 진시황의 조상이다.
<사기.진본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진나라의 조상인 백익은 순을 도와 산택(山澤)을 다스리고, 조수(鳥獸)를 훈련시켰다. 순임금이 '영(嬴)"의 성을 하사한다. 그는 동이 소호(少昊)부락 영성(嬴姓)이 승계자가 된다. 그리고 봉토를 받는다. 대우가 순을 계승하여 왕위에 오른 후, 백익은 다시 대우를 보좌하여 물과 땅을 다스리고, 황무지를 개간하며, 벼를 심고, 우물을 판다. 사마천은 "진나라의 선조는 영성이다"라고 적었다. 영족(嬴族)의 고향은 어디인가? 선진시기의 <좌전>, <국어>, <전국책>, <맹자>, <사기>등 "영(嬴)"을 지명으로 하고 있는 곳을 살펴보면, 유일하게 "영읍(嬴邑)"이 있는데, 바로 태산의 동쪽 자락과 태래평원(泰萊平原)의 사이에 있는 고영성(古嬴城)이다. 삼대(三代, 하상주)때, 고부족은 지명을 씨(氏)로 삼거나, 국명을 씨(氏)로 삼았다. 그러므로 '영읍'이라는 이름은 반드시 영족과 관련이 있다. 송나라때 사람인 나필(羅泌)은 <노사.소호기>에서 백예(伯翳, 伯益)는 "처음에 영에서 먹었다(始食於嬴)"고 한다. 영족의 국호가 "진(秦)"이 된 것도 '태산'과 관련이 있다. <영철론.결화>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백예가 처음에 진(秦)에 봉해진다. 그 땅은 칠십리이다." <춘추>에도 노(魯)의 땅에 있는 '진정(秦亭)'에 관한 기재가 있다: 분명히 백익의 두번째 봉지이다. '진정'은 태산이남의 고동원(古東原)에 있다. 당나라때 사람인 고적(高適)의 <동평여유(東平旅遊)> 시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문상춘범도(汶上春帆渡), 진정만일수(秦亭晩日愁)" 이것은 바로 그 유적을 읊은 것이다. 백익의 두 봉지는 모두 태산 자락에 있다.
<사기.진본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진나라의 조상은 영성(嬴姓)이다. 그후에 분봉되어 국(國)을 성으로 삼는다. 토구씨(莵裘氏)가 있다." 이 영성이 '토구국'의 옛땅은 바로 태산 남쪽의 시문하(柴汶河) 강가에 있는 누덕진(樓德鎭)에 있다. 토구국은 진나라와 동족이다. 이는 다시 한번 영진의 원래 땅이 태산의 자락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역사에 기록된 진헌공(秦獻公), 진무공(秦武公)은 모두 평양(平陽)을 도읍으로 삼았다. 그런데, 태산 부근에도 평양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춘추>에는 "평양에 성을 쌓았다(城平陽)"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땅은 고증에 따르면 지금의 신태(新泰) 도시지역부근이다. 왕학리(王學理)등이 저술한 <진문화>에 따르면, 진나라사람은 "지명천사(地名遷徙)"현상 즉 지명을 가지고 옮겨가는 현상이 있다고 한다. "부락이 새로운 지방에 도착한 후, 부족명 혹은 원래의 거주지명을 새로 거주하는 곳의 지명으로 쓴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태산자락의 박현(博縣) 북쪽의 고영읍(古嬴邑)에 영현(嬴縣)을 설치한다. '국성(國姓)'으로 일개 현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여기에서도 진시황은 그곳이 자신들의 조상의 발상지라는 것을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진시황이 처음 산동을 동순했을 때, 동이가 제나라땅에 남겨두었으나 이리 멸절되었던 '팔신(八神)'제사를 부활시켜 다시 제사지낸다. 실제로 동이부락의 조상 치우를 제사지내는 것이다. 나머지 7명의 신은 모두 산신지지(山神地址)이다. 오로비 병주(兵主) 치우만이 사람이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진시황의 조상 영성이 태산주위에서 생활하던 치우를 부락연맹수령으로 하는 동이의 풍(風), 영(嬴)부락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치우릉은 바로 동평군 수장현 감향성에 있다. 이것도 또다른 측면에서 진시황의 조상은 태산자락에 살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백익은 동이족부락의 저명한 수령중 하나이다. 융하(戎夏), 동이(東夷)가 돌아가며 맡는다는 규칙에 따라, 대우는 그를 '융하-동이'부락연맹의 수령으로 삼고, 자신의 후계자가 되게 한다. 대우가 죽은 후 그의 아들 계(啓)는 '친구들과 일당을 만들어 백익을 공격하여 천하를 빼앗는다." 그리고 하(夏)왕조를 건립한다. 백익은 원시사회에서 노예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비극적인 영웅인물이 된다. 백익은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하나는 대렴(大廉)이고, 다른 하나는 약목(若木)이다. 계가 제위에 오른 후, 백익의 공을 잊지 않고, 대렴의 아들로 하으겸 그의 이름을 성으로 삼게 했다. 그리고 백익의 차남 약목을 서(徐)에 봉한다. 동이에서 분화되어 나온 상족(商族)이 하제(河濟, 황하와 제하)의 사이에서 흥기하면서, 하를 대체하여 상왕조를 건립한다. 상나라때 태산과 고제수(古濟水) 유역은 엄(奄, 지금의 곡부)과 박고(薄姑, 지금의 산동 박흥현)를 중심으로 하는 영성방국(嬴姓方國)이 형성된다. 동이의 대국 엄, 박고는 소호(少昊)집단의 중심지이고, 그중 엄은 영진의 선조가 있던 곳이다.
무왕벌주(武王伐紂), 특히 주공동정(周公東征)때 확고하게 주나라에 반대한 진(秦)인은 큰 타격을 입는다. 그들은 전쟁포로로 일부분은 강제로 성주낙읍(成周洛邑)으로 이주하고, 일부분은 종주(宗周, 지금의 섬서성 관중)로 이주하여 종교노예가 된다. 이렇게 보면, 영진이 서천(西遷)한 경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상나라말기 상보서수(商保西陲)때 서천한 영진의 군대이고, 다른 하나는 주나라초기 주공에 포로로 잡힌 영진족이 강제로 서천하여 노예가 된 것이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동방에 아직도 영진족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서천후의 영진족은 동방에서 가져온 선진적인 생산기술을 가지고, 특히 조상으로부터 전래되어 온 양식기술과 말다루는 기술로 금방 두각을 나타낸다. 병력을 이끌고 주나라에 항거한 비렴(蜚廉)이 실패한 후, 그의 후손중 조보(造父)는 주목왕(周穆王)의 여덟마리 준마를 몰아 천하를 주유한다. 그리하여 조성(趙城)을 봉지로 받아, 조씨(趙氏)가 된다. 비렴의 또 다른 후손인 대락(大駱)에게는 적자 성(成)과 서자 비자(非子, 적출이 아니라는 뜻임)가 견구(犬丘)에 거주하고 있었다. 비자는 주왕실의 양마(養馬)를 주관한다. 마필이 빨리 번식하자 주효왕은 순이 백익을 봉했던 방법을 본떠서, 그를 진곡(秦谷, 지금의 감숙성 천수 서남쪽)에 봉하여 부용국(附庸國)으로 삼는다(지위는 제후국보다 낮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영성을 회복하게 해준다. 그를 진영(秦嬴)이라고 부른다. 비자의 삼세손 진중(秦仲)은 주선왕(周宣王)에 의해 대부(大夫)에 봉해진다. 진양공(秦襄公)에 이르러, 주평왕의 동천을 호위한데 공로가 있어(기원전770년), 진나라는 제후국으로 승격된다. 그리고 기산(岐山) 서쪽을 점유한다. 진효공때 상앙을 기용하여 변법을 행하며, 국력이 급증한다. 함양(지금의 함양시 동북쪽)으로 천도하고, 전국시대 칠웅(七雄)의 하나가 된다. 기원전221년, 진왕영정은 최종적으로 육국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여, 중국역사상 최초의 통일왕조를 이룬다 영정은 자신의 공로가 '삼황오제'보다 크다고 여겨서 스스로 '시황제'가 된다. 그는 옹(雍)으로 가서 조상에게 제사지낸 후 즉시 뿌리를 찾아가는 일을 한다. 유전인자에 남아 있던 동이의 태산신앙이 살아나서, 치도(馳道)를 만들어 태산(泰山)까지 직통노선을 뚫는다. 그리고 친히 태산으로 가서 봉선을 한다.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제왕봉선의 시작이다. 태산봉선에서 사용한 예의는 조상을 제사지내는 예의에 따랐다. 태산은 일약 전국적인 신앙의 대상인 정치적인 산이 되어 버린다. 진이세가 즉위한 후 즉시 동순하여 태산에 제사지낸 것은 역시 뿌리를 찾을 필요에 의해서였다.
동이의 신앙은 사후에 태산에 묻히는 것이다. 진시황은 사후에 비록 태산에 묻히지는 못했지만, 그는 후대로 하여금 태산에 건묘제향(建廟祭享)하게 한다. 진이세 원년, 진시황묘(秦始皇廟, 人祖廟)를 함양과 태산에 건립한다. 태산 인조묘는 석경욕(石經峪) 서삼관묘(西三官廟)이다. 유적지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는 분명하게 설명해준다. 진시황은 고향인 태산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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