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식도학잡료(知識都學雜了)
1960년대초 중소관계가 악화되고, 기근이 나타난 후, 중국내에서는 일찌기 간부들의 강연과 군중들에게 구전되는 방식으로 "중국은 항미원조(한국전쟁)으로 빚을 많이 졌고, 소련이 빚독촉을 해서 굶게 되었다."는 말이 있었고, 여러 해동안 일부 문학예술작품이나 비당사자들의 글에서 인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만일 중국정부의 공개된 문건이나 중소"논전"때의 글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빚독촉'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
기실, 3년곤란기에 소련측은 먼저 중국측에 채무상환을 연기할 수 있다고 제안했었다.
중국은 당시 도대체 얼마나 많은 빚을 소련에 지고 있었을까?
첫째, 항미원조때, 중국은 대량의 무기장비가 급하게 필요했다. 소련은 비록 제공에 동의하기는 했지만, 북한원조를 '공동부담'한다는 명목으로 중소양국은 원가를 기준으로 각각 반반씩 부담해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중국은 재정이 곤란하여 즉시 지급할 수가 없었다. 1950년 11월 주은래는 소련의 자카로프 총고문과 합의를 해서, 중국이 북한에 들어가 작전을 할 때 소련은 반값으로 제공하는 무기를 소련의 중국에 대한 대출로 계산하기로 한다.
전쟁기간동안 소련은 중국에 모두 64개의 육군사단장비, 23개의 공군사단장비를 제공했다. 스탈린이 양국관계의 악화로 인하여 그중 소량의 무상무기원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무기장비는 반값으로 제공했으며, 이로 인하여 중국은 소련에 군수물자채무 30억위안(당시 미화로 환산하면 13억달러)의 빚을 지게 된다. 1955년 소련군이 뤼순에서 철수할 때, 다시 9.8억위안상당의 장비를 넘겨준다.
둘째, 중국의 제1차, 제2차 5개년계획기간에, 소련의 중국원조의 중점은 "156개항"의 사회간접시설건설이다. 이들 건설프로젝트의 기계장비는 주로 대출방식이 아니라 화물무역의 형식으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제공되는 기술은 무상이었다.
셋째, 1958년 중국이 '대약진'을 시작한 후, 국내의 부식품공급이 부족하고 구매가 곤란하여, 무역계약의 조건에 따라 소련에 제공할 수가 없었다. 1959년, 1960년 다시 25억루블의 상업무역채무를 부담하게 된다. 당시 재정을 주관하던 부총리 이선념(李先念)의 <1961년과 1962년 국가결산에 관한 보고>에 열거된 수치를 보면, 1950년이래 중국이 소련에 지고 있던 외채와 미지급이자는 인민폐로 환산했을 때 모두 57.43억위안이었다.
중국이 소련에 지고 있던 57억여위안의 채무는 당시 국가재정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었을까? 1959년 전국재정지출은 520억위안이고, 1960년은 654억위안이다. 그리고 1960년이전에 중국은 소련에 이미 33억위안의 빚을 상환했다. 이를 보면 항미원조전쟁으로 인한 빚은 기본적으로 모두 상환된 것이다. 남은 것은 주로 '대약진' 2년동안 계약에 따라 물품을 제공하지 못하여 발생한 무역채무이다. 그리고 뤼순의 소련군이 철수한 후 남겨준 무기장비의 구매비이다. 그 총액은 합하면 23억위안이 된다.
서방경제학의 관점에 따르면, 한 나라가 채무를 매년 분할하여 상환하는 상황하에서, 총액이 1년 재정지출의 절반 혹은 1/3을 초과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감내할만한 범위내이다. 당시 중국은 오직 소련에만 채무가 있었고, 금액도 국가재정지출의 20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실로 그다지 큰 금액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채무도 항미원조로 인한 무기장비채무도 아니었다.
1959년 중소관계가 악화되면서, 후르시쵸프는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정부명의로 돌연 중국에 통지를 보내 중국에 남아 있던 소련전문가를 모조리 철수시킨다. 소련이 전문가철수를 통지할 때, 중공중앙은 북대하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어떻게 하면 경제적 곤란을 해결할 수 있을지 논의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후, 주은래는 중앙회의에서 소련의 전문가철수와 대외무역문제에 대한 보고를 하며, 2년간 국내부식품의 부족과 수매곤란으로, 기한내에 소련에 물자를 제공할 수 없었고, 무역상의 채무가 발생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후르시쵸프가 압력을 가하는 상황하에서, 참석자들은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서 하루빨리 빚을 갚자는 분위기였다. 소련에 채무를 갚지 않으면서, 소련에 대하여 '반수정주의' 투쟁을 벌이는 것은 당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이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회의에서 "큰 소리를 치려면, 내년에 채무를 모두 갚아버리자"고 주장한다. 더더구나 어떤 사람은 "공부국난(共赴國難), 유전출전(有錢出錢), 유력출력(有力出力)"(함께 국난을 극복하자.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힘이 있는 사람은 힘을 내자). 모택동은 강경한 어투로 말했다: "내년에 이 빚을 다 갚는다!"
비록 중공중앙의 지도자들이 하루빨리 빚을 변제하려고 했지만, 국내에도 대기근이 들어, 경제부서에서는 이 금액이 그다지 크지도 않은 채무변제를 미루기를 희망했다. 1960년말, 중국의 대외무역부장 섭계장(葉季壯)이 소련의 주중대사관 참찬을 만나서, 구두로 중국에서 지급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며 무역에서 모두 20억루블의 빚이 있는데, 5년내에 전액상환하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12월 17일, 소련의 대외무역부장 파토리체프는 중국의 주소대사 유효(劉曉)를 만나, 중국측이 소련과의 협의없이 일방적으로 무역상의 채무상환기한을 5년으로 정해서 통보했다고 질책했다. 그리고 중국의 위약을 이유로, 단기간내에 중국에 휘발유를 공급하지 않겠다고 표시한다. 나중에 중국에서 한때 소련의 '빚독촉'이라는 말이 나올 때, 주요 근거로 삼은 것은 바로 이 일이다. 그러나 그후 실제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1960년 11월, 유소기(劉少奇)가 모스크바로 가서 81개국공산당및노동당회의에 참가하기로 쌍방간에 합의를 한다. 그후 유소기는 국가주석의 신분으로 소련을 방문한다. 몇개월후, 쌍방의 긴장된 관계는 약간 완화되었다. 1961년에 이르러, 소련은 부분적으로 중국에 대한 국방과 경제분야의 원조를 회복시킨다.
2월 27일, 후르시쵸프는 모택동에게 서신을 보내어, 앞장서서 차용의 형식으로 중국에 100만톤의 식량과 50만톤의 쿠바설탕을 보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중국측에서는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중공중앙은 쿠바설탕은 받겠다고 하고, 다만 소련의 양식은 예비로 생각하고, 주로 호주, 캐나다등에서 양식을 수입하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3월, 소련은 다시 제안한다. 양국무역에서 중국이 진 10억루불의 무역채무를 5년에 나누어갚아도 되며, 이자는 면제해주겠다고. 소련은 또한 1961년 8월말이전에 차용의 방식으로 중국에 50만톤의 설탕을 공급하고, 그후 1964-1967년기간에 상환하며, 이자는 없었다.
1961년 4월 10일 <인민일보>는 이런 글을 실어 소련에 감사를 표한 바 있다: "우리나라가 엄중한 자연재해를 당했는데, 1960년에 소련에 공급해야할 물품을 공급하지 못했다. 소련동지는 이에 대하여 동지식의 협력과 형제같은 양해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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