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1960년의 대상해(大上海): 기아(棄兒)가 넘쳐나던...

by 중은우시 2021. 12. 21.

글: 세상연구소(世相硏究所)

 

1960년을 전후하여 진소영(陳素英)은 무석시복리원(無錫市福利院)의 직원이었다. 그녀의 기억에 따르면 마치 하룻밤만에 복리원이 아이들로 넘쳐나게 된 것같았다.

 

"복리원의 주위에는 매일 버려진 영아(嬰兒)들이 있었고, 파출소와 가도주민위원회에서도 계속 주운 아이들을 보내왔다...." 2005년 12월, 산동심친단(山東尋親團)이 무석에서 심친회(尋親會, 부모찾기모임)를 열었는데, 77세의 진소영노인은 반세기전의 그 일막을 떠올렸다.

 

이런 상황이 일어난 것은 무석만이 아니었다. 신속히 늘어나는 기아는 장쑤,저장일대의 여러 도시의 복리원들에 인구팽창의 압력을 가했다. 이런 흐름은 결국 상해까지 번져간다. 상해의 복리원도 곧 아이들이 꽉 차버린다. 기아는 상해의 길거리에서 계속 발견되었다.

 

"아이를 상해로 보내자. 상해에는 먹을 것이 있다고 한다!" 1960년 봄, 11살의 여순방(呂順芳)은 처음 마을 어른들이 이렇게 논의하는 것을 들었다.

 

1960년, 봄. 양식이 부족하여 농민들의 감내능력은 극한에 이르렀다. 여순방의 집에는 4명의 아이가 있었다. 부친은 멀리 80킬로미터 떨어진 채석장에서 일했고, 집에는 모친, 할머니 두 사람이 인민공사에서 일해서 얻은 1인당 1일 육냥(六兩)의 벼였다. 6냥의 벼를 도정하면 4냥2전의 쌀이 나온다. 모친은 매일 술잔보다 크지 않은 작은 그릇에 쌀을 담았고, 야채를 넣어서 멀건 죽을 끓여서 일가족이 먹었다.

 

여순방의 여동생은 겨우 두살이었다. 그래서 그때 일어나는 일을 전혀 몰랐다. 여동생은 항상 그릇에서 씹어삼키기 어려운 야채를 골라내서 버리곤 했다. 여순방의 모친은 탄식을 했다: "온식구의 쌀이 너 혼자 먹는데도 부족하니, 너를 보내버려야겠다!"

 

여순방과 남동생은 그 말을 듣고 거의 즉시에 벌떡 일어났다: "나를 보내주세요. 나를 상해로 보내주세요." 여순방은 기억한다. 그녀는 모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길을 알아요. 어른이 되면 다시 돌아올께요."

 

"이것이 당시 마음 속의 가장 진심인 말이었다. 상해로 가면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여순방은 옛날 얘기를 하면서 부지불식간에 탄식을 내뱉었다.

 

4월의 어느 새벽, 모친은 여동생을 데리고 먼저 배를 타고 상주(常州)로 갔다. 다시 기차를 갈아타서 상해까지 간다. 기차역 부근에서 모친은 여동생에게 마병(麻餠)을 하나 사주고서, 혼자 의흥(宜興)으로 돌아왔다.

 

반달후, 여순방의 부친이 채석장에서 돌아온다. 막내딸을 보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벌컥 화를 낸다. 모친은 욕을 먹고나서 주방으로 가 통곡했다. 그런데, 부친이 주방에 모친이 자신을 위해 준비한 음식을 보았고, 녹색빛을 내고 있었다. 거의 풀을 끓여만든 멀건 죽이었다. 11살된 여순방은 기억에서 처음으로 부친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한때 한국전쟁에 파병되어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던 사이나가 풀을 멀겋게 끓인 죽을 들고서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1959년말, 상해, 무석, 상주등지의 수십개의 고아원은 이미 3천여명의 고아를 거두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초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상해 육영당(育嬰堂)이 두 달동안 거둔 기아만 6,500여명이었다. 1959년 4분기보다 9배나 많았다. 이 아이들은 대체로 영양불량이었다.

 

사람들은 믿었다. 상해에는 먹을 것이 있을 거라고. 그러나 사람들이 몰랐던 것이 있다. 상해도 곧 양식이 끊긴다는 것이다. 1960년 5,6월에 중앙은 연속으로 경진호(북경, 천진, 상해)등 도시의 양식공급이 긴급하다는 문건을 내놓는다. 6월 6일 내놓은 <경진호와 요녕의 양식조달에 관한 긴급지시>에서는 명확히 기재하고 있다. 이 세 도시의 재고는 북경이 7일, 천진이 10일, 상해는 거의 남은 것이 없었다.

 

상해는 더 이상 갈수록 많아지는 기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당시 전국부련(婦聯) 주임 강극청(康克淸)에게 보고된다.

 

강극청은 즉시 주은래를 면담해서, 내몽고에서 분유를 가져와서 긴급구조를 해야겠다고 말한다. 주은래가 지시한다: 오란부(烏蘭夫)를 찾아서 상의해라. 오란부가 곤란한 것을 해결하는데는 고수이다."

 

그후 강극청은 북경에 회의하러 온 오란부를 만난다. 오란부는 내몽고로 돌아가서 방법을 생각해보겠다고 말한다.

 

내몽고로 돌아온 오란부는 즉시 당위원회회의를 개최한다. 회의에서, 자치구부서기 길아태(吉雅泰)는 이렇게 건의한다. 고아를 내몽고로 데려와서, 목민들로 하여금 기르게 하자. 오란부는 이 아이디어를 주은래에게 보고한다. 주은래의 지시는 오직 한 마디였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긴박했는지 알 수 있다: "서둘러 아이들을 받은 후에 다시 얘기하자."

 

당시 내몽고자치구 위생청의 부청장으로 있던 주명휘(朱明輝)는 이렇게 글을 써서 회고한 바 있다: 1959년 12월, 오란부는 자치구 민정청과 위생청에서 인원을 빼서 관련기구를 설치한다. 주명휘가 구체적으로 책임졌고, 고아를 받아들이는 사무를 통일적으로 처리했다.

 

전체 내몽고의 위생계통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치구병원, 후허하오터시병원 및 각맹의 병원은 모두 병실과 병상을 마련해서 영유아 생활용품, 식품과 약품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보육원들도 긴급히 모집되었다.

 

1960년초, 제1차 상해고아들이 천리 떨어진 내몽고병원과 후허하오터시병원으로 보내어진다. 1963년까지, 내몽고는 모두 3,000명의 상해 및 주변지역에서 온 고아를 맞이한다. 상해고아를 가장 많이 받아들인 북방의 성시가 된다.

 

내몽고자료관의 <1960년영아이입계획에 관한 지시요청>에서 자치구 위생청은 이렇게 소개했다: "1960년에 아동이입의 임무는 2,000명으로 확정했다"; "새로 대형 육영원을 5곳에 건설하여 한곳마다 200명씩 수용한다" 육영원을 건설하고 운영하는 비용은 합계 1,500,840위안이다" 위생청은 15만 내지 20만위안을 감당할 수 있어서 자치구당위가 1,300,840위안의 조달을 해결해주어야 한다. 나중에 회신에서 오란부는 이렇게 지시한다: "한명을 거두면 한명을 살린다"

 

1960년 4월, 바오터우시의 담당자는 먼저 상해에서 받은 100명의 고아를 받는다. 철로계통은 최대한 협력하도록 지시받았다: 전용차량칸을 마련해서 인수인계인원은 4명당 1장의 기차표를 구매하고, 도중에 열차에서 음식을 제공한다. 현존하는 자료를 보면, 당시 자치구의 각맹은 속속 상해, 상주일대에서 고아를 받아들였다.

 

현재 70세된 오전영(吳全英)은 당시 무석시고아원의 보육원이었다. 1963년, 그녀는 100여명의 기아를 호송한 바 있다. 오전영은 이렇게 회고한다. 출발전에 영아들에게 우유, 떡과 분유를 준비했다. 직원들 자신을 위해서는 두 봉지의 대병(大餠)을 준비했다. 오전영은 이렇게 설명한다: 대병은 배를 채우는게 좋았고, 사는데 양표가 필요하지 않았다. 당시 두 봉지의 대병은 호송인원중 가장 젊었던 오전영이 등에 짊어지고 열차를 탔다.

 

오전영은 이렇게 회고한다. 1963년을 전후하여, 그녀들의 업무중점은 고아를 북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성의 민정부문은 북방 각성의 민정복리계통과 업무협조하여 일단 도시가 정해지면 즉시 복지원에 출발하도록 지시했다. 복리원에는 전화를 따로 설치해서 언제든지 통지를 받을 수 있게 했다. 2년가량의 시간동안, 오전영은 열차를 타고 하북성 한단, 하남성 안양등 여러 도시를 다녀온다.

 

내몽고에 도착하는데 일반적으로 4,5일이 걸려서, 100여명의 아이들의 기저귀를 말리는 것이 큰 문제로 된다. 인수인계인원은 열차장에게 특별히 깨끗한 물을 준비해달라고 한다. 그리고 씻은 기저귀를 열차칸의 통로에 걸어서 말렸다. 

 

내몽고의 인수인원들에 있어서 문제중에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영아를 제외하고, 보육원들은 항상 아이들의 장쑤,저장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반쯤은 추측으로 반쯤은 손동작으로 교류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 열차칸의 아이들은 자주 울곤 했다. 보육원들은 마음이 조급해져서 어쩔 줄 몰랐다. 아이가 배가 고픈 것인지 목마른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소통이 잘 되지 않았지만, 남방에서 온 고아들은 여전히 내몽고 보육원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아이들은 비록 마르고 작으며, 전형적인 강남사람의 청수하고 하얀 피부의 아이들이지만, 내몽고의 보육원들은 아이들을 사랑했다. 인민일보는 북송고아에 대한 보도에서 이렇게 기술한 바 있다. 고아들의 몸을 보살펴주기 위해 하이라르고아원의 보육원들은 아이들에게 진귀한 몽골약 영지환(靈芝丸)까지 먹였다. 다만 몽골약을 먹으면 강남의 하얀피부가 검게 바뀔까봐 걱정하여, 의사들은 심지어 물에 달걀흰자를 풀어서 함께 먹이기도 했다.

 

내몽골에서, 고아를 입양시키는 일이 즉시 전개된다. 규정에 따라, 입양을 받는 사람은 반드시 현지 공안, 부련과 주민위원회의 조사를 받아, 고아를 기를 능력과 조건이 된다는 것을 확인받은 후 비로소 입양소개서를 받을 수 있다. 적봉(赤峰)으로 보내어진 백금풍(白金豊), 곽영리(郭泳利)는 바로 이렇게 조건이 상당히 좋은 가정에 입양되게 된다.

 

1963년을 전후하여 내몽고로 보낸 선례를 본받아, 소주, 무석, 상주 일대의 기아는 대규모로 북송되기 시작한다. 산동, 하남, 하북, 심지어 산서, 섬서까지. 철도노선이 닿는 곳이면 모두 이들 기아들을 보내게 된다.

 

오늘날 이미 아무도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북송된 기아들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그들의 분포상황은 또 어떠한지.

 

당시 무석시고아원에서 일했던 오전영도 이미 그들 고아원에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고아를 보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양식이 부족한 상황은 1964년을 전후하여 완화되었고, 북송도 그때부터 멈추었다는 것이다. 오전영은 말한다. 그때 그들은 단지 "최대한 보내고 보낼 수 있는만큼 보낸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기아의 시대에 북으로 가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40년이 지난 후, 그들은 함께 남하하여 친생부모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