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타이완군대의 "군기(軍妓)" 제도

중은우시 2022. 9. 6. 16:23

글: 지식도학잡료(知識都學雜了)

1949년 국민당군대가 대만으로 패퇴한 후, 십여만명을 금문(金門)의 각 섬에 배치한다. 섬에 주둔한 군대는 소수의 고위장교들이 가족을 데리고 있는 외에 절대다수의 관병들은 '홀몸'이었다. 하루종일 진지를 집으로 삼고, 총포와 함께 지낸다. 1998년 5월 23일 타이페이에서 출판된 <중국시보>의 글에 따르면, 군대측은 '관병생활을 조정하고, 그들의 심령을 달래기 위해" 1950년초부터 "군락원(軍樂園)"제도(즉 戰地妓院)의 설치를 기획한다. 그리고 '군락원'은 부대의 주둔필요에 따라, 영내 혹은 군영부근에 주둔부대를 따라 설립한다; 그리고 부대주둔지가 이전되면 함께 이전되거나 취소된다.

 

1952년, 타이완군대측은 정식으로 <감란시기(勘亂時期) 육해공군인잠조조례(暫調條例)를 공표하여, 훈련중이거나 현역복무중인 군인의 결혼에 대한 제한을 강화했다. 이 규정의 강력한 구속하에, 군인들은 할 수 없이 '군락원'으로 가서 욕망을 배출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당시의 많지 않은 급여로 일반 중하급의 관병들은 가족을 부양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군락원'은 건립된 때로부터 관병들에게 크게 환영받게 된다.

 

군대당국이 '군락원'의 설립을 결정한 때로부터 타이완 각지의 '풍화구(風化區)'의 공창(公娼)과 사창(私娼)에서 군기를 선발한다. 군기에 대한 심사는 아주 엄격했다. 나이는 20살에서 25살까지의 사이여야 하고, 용모가 반드시 예뻐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집안은 반드시 깨끗해야 했다. 본인부터 위로 3대까지, 여하한 반동혐의가 있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도박, 마약, 절도등의 '군대기율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불량전과'가 있어도 안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모든 창기들이 '군락원'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가씨(小姐)'로 선발되면 군대는 1인당 1만원(元)의 안가비(安家費)를 지급했다. 이 돈은 당시라면 두 눈이 번쩍 뜨이는 큰 돈이었다. 게다가 금문각도의 관병은 10만여명에 이르렀고, 적지 않은 풍진여자들은 기꺼이 앞다투어 신청하게 된다. '군락원'으로 가서 큰 돈을 벌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전지기원에 필요한 '아가씨'들은 40여년간 한번도 부족한 적이 없었다.

 

 

1953년 금문도에 최초의 '군락원'이 설립된다. 개업초기 모든 연대에 4장의 무료권을 제공한다. 개업프로모션인 셈이다. 그러나, 어느 병사도 감히 얼굴 두껍게 상사에게 무료권을 달라고 할 수 없었다. 결국 연대장이 4명의 평소에 행동이 양호한 병사들 골라 이 임무를 맡긴다. 그들에게 반드시 '화력정찰'을 잘 하도록 당부한다. 정찰을 마친 후, '군락원'은 사업이 흥성하고, 손님이 끊기지 않는다. 그후 각 크고 작은 섬에는 모두 '군락원'이 설립된다.

 

'군락원'중 비교적 규모가 큰 것은 군관부(장교), 사관부(하사관) 및 전사부(병사)로 나뉘었다. 각 부는 설비가 달랐고, 비용도 달랐다. '아가씨'들의 연령, 수준, 용모도 크게 달랐다. 심지어 장군, 영관급장교 전용도 있었는데, '고급반(高級班)'이라 불렀다.

 

각 군락원의 시설배치는 대동소이했다. 벽에는 대부분 <오락규칙>이 걸려 있었고, 관병들이 반드시 준수하게 했다. 그외에 재미있는 '대련'도 걸려 있었다. 상련은 "대장부효명강장(大丈夫效命疆場)" 하련은 "소여자헌신국가(小女子獻身國家)" 그리고 횡비(橫批)는 '복무삼군(服務三軍)'이었다. 규칙패를 걸어놓은 옆에는 판매소가 있고, 사병들은 표를 구매한 후 표의 번호에 따라 '아가씨'의 방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고, 번호가 불리면 들어갔다.

 

일찌기 한 병사가 '아가씨'의 용모가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 졸지에 흥미를 잃고, 몸을 돌려 방을 나왔고, 표를 교환해줄 것을 요구한 적이 있다. 이 일은 '아가씨'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군락원'은 번호순서대로 입실하는 방식을 바꾸어, 병사들이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고, '아가씨'들도 군대에서 방어진지를 교체하는 것처럼  정기적으로 7개 분원과 본원 사이를 돌아가면서 일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적지 않은 병사들은 군사훈련때 오른발을 먼저 내밀지 왼발을 먼저 내밀지는 모르면서도, '아가씨'들이 교체되는 시간과 장소는 확실하게 외웠다고 한다. 이는 장교들의 뒷목을 잡게 만드는 일이었다.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확보하기 위하여, '아가씨'들은 매월 집단으로 병원에 가서 군대의사로부터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정치교육을 받기 위해, '아가씨'들은 매주 하루씩 휴식을 취했고, 휴식일의 오전에는 TV를 보고, 정치수업을 들었다. 왜냐하면 '아가씨'들이 매번 손님을 맞을 때마다 그들간에 안면이 있든 아니든 몇 마디 얘기를 나누면서 분위기를 끌어올리게 된다. 그래야 문을 걸어닫고, 잠깐동안의 '전선원앙'이 되는 것이고, 사병들은 길지않은 '전선의 춘몽(春夢)'을 꾸게 된다. 매주 1번 TV를 보고, 정치수업을 듣는 것은 바로 '아가씨'들의 '소질'을 제고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들이 침대위에서 사병들과 얘기를 나눌 때, '계동압강(鷄同鴨講, 닭이 오리에게 말하다)"이 되어 서로 공동언어가 없는 난감한 국면이 되어, 분위기가 깨지게 되는 경우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국민당의 군대는 스스로 '군락원'을 설립한 것이 국민당의 덕정(德政)중 하나라고 선전했다. 섬을 지키는 병사들의 적막을 해소시켜주면서, 성병도 방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사병들이 오락권을 구입할 때, 모두 표를 주면서 콘돔과 껌을 주었다. 껌은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서 씹으면서 기다리는 것도 있고, 입냄새를 없애는 것도 있다. 그리고 콘돔은 바로 위생을 위하고, 성병을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한번은 장경국이 성병에 걸린 노병에게 물어봤다: "너는 왜 콘돔을 끼지 않은 것이냐?" 노병이 대답했다: "장주임께 보고드립니다. 양말을 신고 발을 씻으실 수 있으십니까?" 장경국도 일시에 말문이 막혔다. 이를 보면 당시 군대내에서 '성병예방교육'은 일찌감치 시작되었지만, 저항이 만만치 않았고, 성병이 유행하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외에 일찌감치 '군락원'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은 혹은 궁벽진 산골에서 오거나, 혹은 본섬의 사창가에서 뽑아왔다. 그리하여 현지인과는 관계가 크지 않았다. 나중에 많은 금문도의 아가씨들도 '군락원'에 들어왔다. 그리하여 군대와 현지인부락간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한다. 이는 국민당을 골치아프게 만들었다. 1986년 7월, 암전군관부(庵前軍官部)에 이제 겨우 만16살된 여자아이가 손님을 받았고 일시에 인기를 끌었다. 이 어린 아가씨는 하루에 40여명의 군관을 받았고, 3달간 일하니 손님을 받은 횟수가 3천회에 이른다. 그리하여 4,50만원을 번다. 나중에 이 아가씨의 가족들이 큰돈을 번데 의심을 품고 이 사실을 까발려 버린다. 원래 이 아가씨는 누군가의 소개를 받아 금문도로 가서 일하게 되었는데, '군락원'에서 군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중간소개인은 10개월의 유기징역형을 받는다. 당시 '군락원'의 군기들은 속아서 오거나, 강제로 끌려오거나, 팔려온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여자를 '군락원'에 팔고 거액의 안가비(安家費)를 챙기는 경우가 자주 보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군락원'을 폐지하라는 목소리를 높였다.

 

1989년 9월 30일 입법위의 강력한 요구하에 군대는 '군락원'을 폐지한다. 먼저 민간에 넘겨 잠시 경영하다가, 1990년 11월 30일 심야, '군락원'은 정식으로 영업을 종료한다. 40년간 성행했던 타이완군기제도는 이렇게 역사가 되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