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1949년이후 대륙과 대만의 연해도서쟁탈전

by 중은우시 2022. 8. 5.

글: 김이(金二)

 

1

 

조금 나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해녀 여민병(女民兵)을 주제로 한 영화 <해하(海霞)>를 기억할 것이다. 당시에는 전체인민이 반드시 보아야 하는 영화였다.

 

<해하>의 스토리원형은 동두(洞頭)의 여민병이다. 여민병이라고 하여 여자들이 그저 총을 들고 폼만 잡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여민병의 훈련강도는 남성정규군에 못지 않았다. 심지어 임신8개월의 여민병까지도 사격훈련에 참가했다.

 

당시 동두도(洞頭島)의 여민병은 토비 45명을 생포하고, 토비 10명을 죽였으며, 특무 12명을 체포하고 총기 28점을 노획했다.

 

1965년 2월 절강성의 민병경연대회에서 왕월하(王月霞)는 중기관총, 경기관총, 돌격총, 소총등 7개의 사격항목에서 100여발의 총탄을 모조리 적중시켜, 절강성인민정부, 성군구로부터 "신창수(神槍手)"라는 칭호를 받는다.

 

한번은 주둔지에서 정규군과 합동훈련때, 수영을 잘하는 동두의 여민병은 무장상태로 해가 뜬 후부터 오후2시까지 수십키로미터를 수영하여 정규군의 남성병사들을 물리치고 1위를 차지했다.

 

왜 동두도라는 섬에 이렇게 강인한 여민병이 나타났을까? 이는 1949년이후의 해상섬쟁탈전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1949년 10월 1일이후, 중국대륙에서 국군(국민당군)은 기본적으로 숙청되었고, 잔류 국군은 대만과 연해도서로 물러난다. 한동안 연해의 많은 도서에는 국군이 주둔해 있었다.

 

해도에 주둔하는 국군은 대륙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국군은 당시 육군실력은 공산군만 못하지만, 제공권과 제해권에서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섬의 폭격기가 자주 내지 깊숙히 들어와서 폭격을 가하곤 했다.

 

기회만 있으면, 섬에 주둔하는 국군은 대륙으로 반격해 쳐들어올 수 있었다. 설사 정전기간이라 하더라도, 이들 근해 도서는 손쉽게 간첩을 육지로 상륙시킬 수 있었다. 잠복한 국민당특무와 각종세력도 섬과 연락을 유지했다.

 

어떤 도서는 일방이 장기간 점령하고, 어떤 도서는 대치하면서 전투를 이어갔고, 어떤 도서는 공산군이 점령했다. 예를 들어, 동두여민병이 있던 동두도는 1949년이후 5년간 "오출육진(五出六進)"했다. 즉 5번 국군이 점령하고, 6번 해방군이 점령한 것이다.

 

섬애 대량의 부대를 주둔시키는 것은 상당히 곤란한 일이었다. 방어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해 대량의 민병이 필요했다. 1955년, 해방군이 동두도를 점령한 후, 동두 북사(北沙)에 여자민병배(排)를 건립하고, 1960년 여자민병련(連)으로 확대한다.

 

비록 동두도가 이전에 "오진육출"하였지만, 다른 도서의 쟁탈전과 비교한다면 동두도쟁탈전은 규모가 비교적 작은 전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때의 중요한 쟁탈전은 주산군도(舟山群島) 전투였다.

 

2

 

주산군도는 지리적 위치가 아주 중요했다. 항주만(杭州灣)의 출구에 위치하고 있어, 주산에서 이륙한 비행기는 신속히 전체 장강삼각주에 폭격을 가할 수 있고, 군함은 직접 강소, 절강, 상해로 진격할 수 있으며, 장강을 거슬러 중부지역까지 깊이 쳐들어갈 수도 있다. 주산군도의 건너편은 절강성의 영파(寧波)이다. 이곳은 장개석의 고향이다.

 

장강삼각주는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지역이다. 일단 장강삼각주가 점령되면, 그것은 전체중국의 경제력의 절반을 빼앗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장개석이 주산군도를 기지로, 돌연 장강삼각주를 점령한다면, 장강삼각주의 인력, 물력을 얻을 수 있고,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정권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주산열도가 국군의 수중에 있는 한, 대륙은 절대 평안할 수가 없다. 그래서 무슨댓가를 치르더라도 주산을 점령하는 것이 시급한 임무였다. 그래서 이후의 주산전투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당시 주산에 주둔한 국군은 10만이상으로까지 증원되었다. 주산군도주변에서 주산을 공격하기 위해 결집한 인민해방군은 수십만이었다. 나중에 바다를 건너 주산을 공격하는데 참가한 해방군의 수량도 4만명에 이르렀다.

 

주산군도를 공격하기 위하여, 제3야전군 제7병단은 연구를 거쳐 먼저 대륙에서 거리가 가장 가까운 대사도(大榭島)를 공격하기로 한다.

 

1949년 7월 18일 야간에 전투가 개시된다. 해방군의 해안포대의 엄호하에 대사도 남부의 해안에 상륙하는데 성공한다. 19일 날이 밝으면서 해방군은 국군지휘소를 점령하고, 칠정산(七頂山)의 국군수비군은 전멸한다.

 

1949년 9월하순, 절강연해에는 엄청난 폭우가 내린다. 이런 날씨에는 국군의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었다.

 

해방군은 이런 날씨를 이용하여 대량의 포화를 집중시켜, 총병력 3,500명의 제102사단이 수비하는 금당도(金塘島)에 대ㅑ한 공격을 감행한다.

 

1949년 10월 3일, 18시 30분에서 19시까지 4개 단은 300여척의 목선을 타고 90분간 항해하여, 3해리를 횡단하여 20시 03분에서 20시 30분사이에 각각 예정지점에 상륙한다.

 

당시의 날씨는 이러했다:

밤이고, 깜깜해서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큰 비가 내려서, 산사태가 났고, 평지는 물로 뒤덥혀서 평지인지 구덩이인지도 구분할 수가 없었다.

 

상륙한 해방군은 신속히 종심으로 쳐들어간다. 10월 5일 새벽 금당도의 항구인 역항진(瀝港鎭)을 점령하여 섬의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대승을 거둔다.

 

이 전투이후, 주산방위사령관 석각(石覺)은 외곽의 도서가 각개격파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병력을 조정, 축소재편한다. 불도(佛渡), 육횡(六橫), 사치(蛇峙)등의 섬에 주둔하던 국군은 차례로 도화도(桃花島)로 철수한다.

 

1949년 10월 7일 밤, 해방군 제21군 제61사는 포병을 준비한 후, 밤을 틈타 18일 19시 30분 사치도의 일선에서 출발하여 20시에 도화도에 상륙한 후 돌연 공격을 감행한다. 제2제대가 그 뒤를 따른다. 

 

도화도전투는 모두 20시간이 되지 않았고, 국군 1,300명은 전멸당한다.

 

1949년 11월 3일 20시, 큰 비로 국군의 비행기가 이륙하지 못하는 시기를 이용하여, 해방군은 비를 맞으며 바다를 건너 등보도(登步島)를 공격한다. 당시 금문(金門)전투에서 해방군이 막 실패하였는데, 금문에서 실패한 원인을 충분히 반성하지 않은 상태였다.

 

바다를 건너는 과정에서 풍향이 역전되면서 선단이 흩어지고 겨우 일부분만이 상륙에 성공한다.

 

등보도전투에서 해방군의 전사, 실종자는 1,490명에 이른다. 국군은 3,396명의 전사하고, 396명이 포로로 잡힌다. 그러나 해방군은 등보도를 점령하는데는 실패한다.

 

3

 

당시의 상황은 이러하다: 원래 파죽지세였던 해방군은 먼저 금문도에 상륙을 시도하다가 실패한다. 그리고 다시 등보도 상륙작전에서도 실패한다. 이는 국군을 크게 고무시켰고. 장개석은 더 많은 군대를 주산으로 보낸다.

 

12월 16일, 금문독립45사가 대산(垈山)으로 들어가고, 40사(52군소속)는 정해(定海)로 들어간다. 얼마 후 금문제19군의 2개사, 전투력이 가장 강한 52군 3개사단이 주산으로 이동한 것이다. 총병력은 11.5만명에 달한다.

 

주산은 국군의 대륙에 대한 반격의 출발점이 될 수 있었다.

 

주산군도에 병력이 증원되는 것을 보면서, 해방군은 당연히 좌시할 수 없었다.

 

1949년 12월 3일, 9병단은 명을 받아 주산해방전투에 참가한다. 1선공격부대는 30여만명으로 증원되고, 1950년 2월에 전투를 개시할 예정이었다.

 

12월 5일, 속유(粟裕)는 주산군도로 진격하는 시기를 늦춘다. 그리고 주산군도에 대한 공격을 육군단독에서 육해공 3군의 합동작전으로 변경한다.

 

동시에, 속유는 주산군도로 진격하는 육군의 역량을 증강시킨다. 원래 이후 대만전투에 기용할 예정이었던 제3야전군 9병단을 주산전투에 증원한다. 21군 전부 그리고 23군, 24군, 특종포병 전부, 고사포13단을 영파시내로 이동시켜 방어하게 한다. 그리고 각지에서 대량의 선박을 징발하여, 선박을 개조하여 한꺼번에 10만명이상의 부대를 상륙시킬 수 있도록 준비한다.

 

해방군24군의 제71사는 영파공항을 수리한다.

 

당시 해방군은 소련에서 원조받은 38대의 미그-15전투기, 39대의 La-11전투기, 9대의 Tu-2폭격기등 119대의 비행기를 가진 후 공군역량도 상당히 강해졌다. 특히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미그-15 제트기는 국군이 사용하는 프로펠러비행기에 비하여 속도와 공격력에서 모두 압도적인 우세를 보엿다.

 

미그-15는 제트식 아음속전투기였다. 성능에서 미군의 당시 F84류의 주요기종보다 훨씬 좋았고, 심지어 아직 미국이 대량생산하지 못하고 있는 F86도 성능에서 약간 부족했다. 최대가속, 상승성능, 최고상승한도, 화력등 방면에서 미그-15는 F86을 모두  넘어섰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전투기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나중에 항미원조전쟁(한국전쟁)에서도 크게 활약한다.

 

미그-15는 1947년 초도비행에 성공한 후, 1948년부터 대량생산된다. 다만 최초의 실전은 소련에서 이루어지지 않았고, 최초의 실전은 중국인민해방군의 전투기로서 국군을 상대한다. 최초로 대규모토입된 실전은 바로 한국전쟁에서 지원군의 전투기로 한국군대와 미군을 상대했다.

 

국군은 당시 일부 2차대전시대부터 내려온 프로펠러형지행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가장 선진적인 것은 P51이었다. 이들 비행기는 세계최첨단의 미그-15와 맞붙었을 때 전혀 승산이 없었다.

 

해방군의 주산전투에 참가한 해군은 44척의 전함이 있었다. 그중 대형탱크상륙함이 10척이고, 중형탱크상륙함이 9척이다. 

 

거기에 범선(일부는 기범선으로 개조함) 2천여척을 징발하여, 한번에 10만여명(2개군)이상의 부대를 상륙작전에 투입할 수 있도록 했다. 6월에 전투를 개시할 예정이었다.

 

만일 이 게획대로 전투가 개시되었다면, 아마 주산대회전은 사상자가 10만명을 넘기는 대규모전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에 변화가 생긴다.

 

1950년 3월 23일, 정해에서 이륙한 국군전투기 P-51이  미그-15에 격추당한다. 국군은 검토후에 "공산군이 이미 가장 선진적인 제트전투기를 보유했다" 국군은 "해군, 공군에서의 우세를 이미 잃었다"고 판단한다.

 

1950년 4월말, 해방군의 제4야전군이 해남도(海南島)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장개석은 대만우선원칙에 따라, 주산군도에서의 철군을 결정한다. 5월 13일, 국군은 비행기와 포병으로 해방군진지를 빈번하게 포격하면서, 동시에 섬의 국군12만명을 차례로 대만으로 철수시킨다. 동시에 섬에 살고 있던 2만여명의 민간인들도 철수한다.

 

5월 16일, 해방군은 국군이 철수하는 것을 알게 되어, 제3야전군은 제21, 제22, 제23군에 공격명령을 내린다. 16일밤, 동으로 등보도에서 서로는 책자산(冊子山)에 이르는 30해리의 해면에서 동시에 공격을 개시한다.

 

전체 주산전투에서 해방군전사에 따르면 국군 8,800명을 섬멸했다고 한다.

 

4

 

주산군도의 전투에서 해방군은 중대한 승리를 거둔다. 국군이 주산에서 철수한 것은 장감삼각주라는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지역이 더 이상 국군무장의 위협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대만해협의 국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투는 금문전투였다. 이 전투는 금문도의 고녕두(古寧頭)에서 발생한다. 이는 국군이 내전후기의 패퇴과정에서 드물게 얻은 승전이었고, 대만의 국면을 잠시 안정시킬 수 있게 된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은 북경에서 중화인민공화국성립을 선포한다.

 

10월 15일, 해방군은 바다를 건너 하문(廈門)전투를 발동하고, 나아가 금문도이북의 석정(石井), 연하(蓮河), 대등도(大嶝島), 소등도(小嶝島), 오두(澳頭)등지를 점령한다. 해방군의 관병들은 모두 금문도는 이미 낭중지물(囊中之物)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선박수량이 부족하여 일자가 계속 연기된다.

 

1949년 6월이전에 국군은 아예 금문도에 방어시설을 만들지 않았다. 6월중순, 국국하문요새사령부는 금문요새총대(金門要塞總臺)를 설립하고, 섬에 방어공사를 벌이고, 통신선로를 포설한다.

 

대소금문도는 국군제22병단 전부, 청년군제201사 및 제12병단 제111사가 방어했다. 모두 2만여명이다. 국군은 금문도를 고수하기 위해, 10월 10일이후, 지속적으로 조산지구(潮汕地區)의 제12병단이 제18군, 제19군을 이끌고 금문도로 철수한다. 10월 24일에 이르러 금문도의 국군총병력은 4만여명에 달한다.

 

대,소등도전투에서, 이미 포로로 잡힌 국군중에서 제12병단소속의 제18군 제11사 31단의 병사가 있었다. 당시 중국인민해방군 제28군 부군장 소봉(蕭鋒)이 직접 포로를 심문한 후, 병단에 보고한다. 그러나, 본부에서는 수비군은 도망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포로의 진술을 믿을 수없다고 여긴다.  

 

섭비(葉飛)는 상당히 자신있었다: 대륙에 더 이상 큰 전투는 없을 것이다. 너희 28군이 마지막일 것이다.

 

금문전투의 해방군인원은 다음과 같았다:

 

지휘계통

- 제3야전군 진의(陳毅, 사령원 겸 정위), 속유(粟裕, 부사령)

  제10병단 섭비(사령원), 유배선(劉培善, 정치부주임)

    제28군 주소청(朱紹淸, 군장), 소봉(부군장, 진공계획주요기획자), 이만촌(李曼村, 부정위)

    제29군 호병운(胡炳雲, 군장), 단환경(段煥竟, 부군장), 황화성(黃火星, 정위)

 

공격서열

  제1제대

     제28군 제82사 제244단

     제28군 제84사 제251단

     제29군 제85사 제253단

  제2제대(실제상륙한 인원은 겨우 10개배)

     제28군 제82사 제245단

     제28군 제82사 제246단(2개연이 증원)

     제29군 제87사 제259단(2개연이 증원)

 

다시 칠흑같은 어둠이었다. 제1차 해방군 근 만명이 200척의 기범선을 타고 밤을 틈타 금문도에 도착한다.

 

국군이 비교적 일찍 발견하였기 때문에, 200척은 기본적으로 모두 파괴되어 원래의 계획대로 회항할 수 없었다. 제2제대의 근 만명을 적시에 보충할 수 없었다. 섬에 남은 해방군과 국군은 3일간 전투를 벌였고, 해방군은 대부분 전사하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힌다.

 

금문전투는 의미가 깊은 전투였다. 이 전투는 해방군으로 하여금 도해작전의 난이도와 리스크를 인식하게 만든다. 병력을 의미없게 희생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식한다. 설사 거리가 아주 가까운 작은 섬 금문도를 점령하기도 이렇게 어려운데, 하물며 200킬로미터의 해협 너머에 있는 대만섬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해방군내의 인식은 해협양안이 장기간 대치하고 여전히 평화로운 국면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5

 

비록 금문도를 지켜냈지만, 국군은 여전히 대륙을 잃은 후 좁은 대만섬내에 머물러 있어야 했고, 여러 도서를 점령하려는 마음은 있지만 힘이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장개석은 "대만위중(臺灣爲重)"의 관점을 갖게 되고, 대다수의 연해도서쟁탈전을 포기하고 주로 대만을 방어하기로 한다.

 

해남도를 잃은 후, 해방군의 소련전투기가 우세를 보이자, 장개석은 주산열도에서 철군을 결정한다. 그후 여러 연해도서의 주둔군도 대만으로 철수한다. 군사력을 분산시키는 것을 막기 위하여.

 

1950년, 김일성이 조국통일의 꿈을 안고 돌연 남한을 공격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중국의 동남해안의 해방군이 대거 한국전쟁에 지원군으로 동원된다. 그리하여 연해도서의 국군은 압박이 풀어졌고, 대만으로 철수하려는 계획을 잠정보류한다. 

 

태주(台州)의 대진도(大陳島, 당시 溫州에 속함)는 상당히 중요한 섬이다. 대진도는 장개석의 고향인 절강성에 위치해 있고, 절강성의 수십개 국민당정권의 '망명현정부'는 대다수가 대진도로 옮겨갔다. 약간의 예외도 있었다. 예를 들어 평양현(平陽縣)의 망명정부는 남궤도(南麂島)에 있었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후, 해방군의 주력은 즉시 동남연해로 방향을 바꾸어 대만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최우선임무로 삼는다.

 

대만의 제트전투기는 항행거리가 아주 짧아서 대진도를 지원할 수 없었다. 국군의 항행거리가 충분한 것은 단지 프로펠러비행기뿐이었다. 이때 한국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미그-15는 이미 대량생산되고 있었고, 소련의 무상지원하에 인민해방군은 몇 안되는 최선진 비행기, 군함을 가지게 되었다.

 

1954년, 국군과 해방군은 동부연해에서 공중전을 여러 차례 벌인다. 국군전투기는 너무 낙후되어 있어서 제공권을 해방군이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11월 14일, 대진도의 태평호(太平號) 구축함이 해방군의 어뢰를 맞고 침몰한다. 국군의 전투력은 위축되고, 각 섬간에 서로 연락을 할 수 없어, 그저 각자 자신의 섬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11월, 해방군의 전투기가 대진도와 일강산도(一江山島)를 폭격한다.

 

강력한 제공권의 우세하에, 1955년 1월 18일, 해방군은 일강산도를 점령한다.

 

일강산도를 잃은 후, 대진도는 포화의 사정거리내에 들어가게 된다. 대만의 주둔군은 대진도에서 너무 멀리 있었고, 증원올 수가 없었다. 물자도 보급할 수 없었다. 해방군의 미그-15는 절대적인 공중우세를 보유했다.

 

국민당정부는 미국과 <미중공동방위조약>을 체결했는데, 방위범위는 단지 대만과 팽호였고, 금문, 마조와 대진도는 포함되지 않았다.

 

1월 19일, 해방군의 3개의 폭격기대대 70대의 비행기가 대진도를 폭격한다.

 

1월 20일, 은강호(鄞江號) 전함이 해방군의 어뢰를 맞아 격침당한다.

 

1월 30일, 해방군은 대진도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공군 20사 Tu-2 폭격기대디는 다시 한번 대진도를 폭격한다. 대진도의 유일한 댐이 폭파당하여, 담수공급이 부족하게 된다.

 

이런 상황하에서, 계속 대진도를 지키는 것은 죽기를 자초하는 셈이었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대진도에서의 철수를 비준한다.

 

철수시에 전투가 발생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미군은 57척의 군함과 400대의 군용기를 파견하여 협조한다. 거기에는 5척의 항공모함과 1척의 대잠항모, 3척의 중형순양함, 25척의 구축함 그리고 약간의 보조전함이 있었다. 리를 통해 해상과 공중의 우세를 충분히 확보했다.

 

전투를 피하기 위해, 미국정부는 소련의 외무장관 몰로토프를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정부에 미국측의 요구사항을 전달한다: 미군이 대진도에서 철수하는 것을 협조할 때, 해방군은 여하한 공격행동을 취해서는 안된다. 미군이 받은 명령은 받은대로 갚아주는 것이다.

 

2월 2일, 모택동은 해방군에게 대진도에서 철수하는 인원을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대진도의 28,000명 군민이 대만으로 철수한다. 대진도주민들은 원래 몇년이 지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한번 떠나서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줄 몰랐을 것이다.

 

대진도에서 철수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궤도의 국군도 모든 주민을 이끌고 대만으로 철수한다.

 

남궤도는 중국대륙에서 마지막으로 국군이 철수한 도서이다. 국군이 철수한 후, 남궤도에는 기념비가 세워진다. 절강성 전체지역이 해방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남궤도이후 해협양안에서 점령지역의 변동상황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