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신중국 최초의 정치사기사건의 내막

중은우시 2022. 5. 16. 23:05

신문기사

글: 경홍사인간(驚鴻似人間)

 

적지 않은 사람들은 놀고먹으면서 매일매일 멋진 생활을 보내는 꿈을 꾼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할 수 없이 일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서 살아가야 한다. 중국근대에 가장 전설적인 사기꾼은 출신입화의 사기술로, 중앙의 고관이 되었을 뿐아니라, 소련으로 해외시찰을 가기도 하고, 미녀통역을 처로 취하기도 했다. 실로 인생의 전성기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아쉽게도 그의 이런 천의무봉의 사기극은 결국 그 자신이 자랑으로 떠벌이다가 결국 들통났고, 과거의 영광은 사라지며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만명(李萬銘). 그는 1927년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의 상인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양식과 짝퉁을 팔아서 돈을 벌었다. 그가 사기꾼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많은 정도로 부친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집안내력이라 할 수 있다.

 

어린 이만명은 자주 부친이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하여 상품에 가짜를 섞어넣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서 그 물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에게 판매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의 마음 속에는 사기에 대해 깊은 인상을 갖게 된다. 이건 그저 살아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생활의 필수적인 수단이라고. 

 

학교에서 공부할 때, 이만명은 시험지를 훔치고, 숙제를 위조하는 것을 배운다. 그는 학교내에서 인간관계가 괜찮았고, 모두 시험지를 훔쳐내는 대단한 인물인 그를 좋아했다. 결국 그의 이런 행위는 들통났고, 퇴학을 당해 집에 머물게 된다.

 

부친은 장사를 중시했고, 그의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들이 퇴학당하고 집으로 돌아와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이만명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았다. 집에 머물면서 집안의 장사를 도왔다.

 

어른이 되자 그는 더 이상 부친을 따라 재미없는 일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18살때 외지로 나가서 혼자 살길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겨우 소학교 졸업의 학력을 가지고는 찾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일자리를 구하더라도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했다. 

 

어려서부터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이만명은 지저분하고 힘든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결심을 하고 국민당정부의 국군의 청년군에 입대한다. 그때는 서로 군인이 되는 것을 피하려던 때였다. 그러나 이만명은 군대에서 재미를 본다. 그는 부대를 따라 곤명, 심양으로 다녔고,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써서 문서업무를 맡았다.

 

이렇게 편안한 일을 갖게 되자, 이만명은 또 다시 잔머리를 굴리게 된다. 직무상의 편의를 이용하여 그는 다른 사람들의 '퇴역비'를 횡령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의 이런 행동이 들키지 않았지만, 결국 들통이 나게 된다. 

 

그는 결국 감옥에 3개월간 갇힌다. 원래 국군에서 쫓겨나야하지만, 그의 출중한 문서능력으로 그의 재주를 아끼던 상사는 그를 남경육군의원에서 일자리를 구해준다. 남경이 해방된 후, 국군신분의 이만명은 공산당의 천하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원래 글자모방, 도장위조에 재주가 있었다. 그는 스스로 남경의 중앙대학 학생증을 위조한다.

 

중앙대학 대학생신분을 가지고 그는 해방군이야군정대학(解放軍二野軍政大學)에 쉽게 합격한다. 학교에서 그는 열심히 공부하거나, 인간관계를 맺거나 자신을 발전시킬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조용히 숨어다녔다. 혹시나 신분이 들통날까 두려워서.

 

다행히 그의 위장술을 뛰어났고, 아무도 그가 학생증을 위조한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같은 해 10월, 이만명은 순조롭게 이야군정대학을 졸업한다. 그러나 그가 분배받은 일자리는 너무나 궁벽지고 가난한 곳이었다. 편안하게 사는데 익숙했던 이만명은 온갖 노력을 들여 대학에 합격했는데, 다시 이렇게 힘든 곳에서 살게 된 것이다.

 

그는 인장과 서류위조에 능숙했다. 그래서 그는 서류를 위조하여 순조롭게 상주시(常州市) 시정부로 옮겨가서, 공무원이 된다. 그가 생각했던 공무원생활은 더할데 없이 편안하고, 매일 놀면서 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정부의 업무는 번잡했고, 일도 많았다. 그는 최하급의 공무원이다보니 다른 사람들이 시키는 이런저런 일들을 다 해야 했다. 그는 겨우 1주일간 시정부에서 일하다가 떠나버린다. 이번에 그는 좀 특수한 신분으로 위조하여 좋은 일자리를 차지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가 위조하려 했던 신분은 이야군정대학의 교육과장이었다. 일찌기 회해전역에서 부상을 입어 장애인이 되었는데, 소남공서(蘇南公署)에서 도와주어 자리를 마련해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소남공서는 바로 사람을 보내어 확인했다. 그가 고관이 되려는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을 때, 그가 문서를 위조했다는 사실이 확인과정에서 드러난다. 분노한 소남공서의 관리는 바로 경찰에 신고하고, 그는 감옥에 갇힌다. 법원은 유기징역 3년의 형에 처한다.

 

이번 실수에 대하여 이만명은 후회막급이었다. 감옥에서 계속 스스로 반성한다. 너무 욕심이 컸다. 사기술도 엉성했다. 감옥에서의 생활을 쉽지 않았고 자유도 없었다. 정기적으로 사상교육도 받아야 하며, 매일 시간에 맞추어 작업도 해야 했다. 

 

금방 이만명은 초췌해진다. 그는 자신이 문서위조한 일을 후회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사기술을 더욱 갈고닦아서 완벽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미 교훈을 얻었지만, 그는 그만두지 않았고, 오히려 스스로를 위안했다. 겨우 3년이다. 출옥후에 다시 재기할 수 있다.

 

1951년, 이만명은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기회를 잡는다. 이 해에 그는 감옥에서 병에 걸려,  섬서 안강의 고향집으로 돌아가 휴양하도록 특별히 병보석을 허가받는다. 다시 자유를 얻은 이만명은 몸이 근질근질했다. 다시 옛날에 하던 짓을 기획한다. 그가 고향까지 가지고 않고 안휘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옛 수법을 써서 다시 일자리를 구한다.

 

이번에 그는 충분한 준비를 한다. 이야군정대학의 인장을 위조했을 뿐아니라, 스스로에게는 이야군정대학의 '군정부과장'이라는 장애퇴역군인신분을 부여한다. 이를 통해 광명정대하게 섬서성정부주석에게 위조한 서신을 보내어, 일자리를 마련해달라고 요청한다.

 

신분확인과정은 예상외로 순조로웠다. 그의 부상군인신분으로 인하여 섬서성정부는 그를 중시한다. 금방 그를 안강전서(安康專署) 민정과(民政科)에 자리를 마련해준다.

 

새로운 근무환경에 이만명은 아주 만족한다. 그는 부상군인이라는 영예로 인하여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다. 모두 이 부상군인을 보살펴주고, 그에게 더욱 잘 대해주었다. 그의 입당신청도 신속히 통과되고, 상급에서는 그에게 "인민공신"훈장까지 내려주고, "혁명군인장애증"도 받아낸다. 사람들의 박수와 화환,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 이전의 이만명은 전혀 누리지 못했던 즐거운 생활이었다.

 

사기의 단맛을 본 그는 이 사기의 재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서 그는 더 욕심을 내어 더욱 큰 이익을 도모한다. 기관은 그에게 특별히 서북농학원에서 연수할 기회를 부여한다. 그는 여기서 아예 2야군정대학의 군사이동명령을 위조한다. 내용은 이만명을 모 부대의 참모장으로 임명한다는 것이며, 급히 중남국으로 가서 보고하라는 것이다.

 

서북농학원은 이 인사명령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직 전자문서가 없는 시대이므로 붉은도장이 찍인 임명서는 최고지시였다.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1952년, 이만명은 무한의 중남국으로 가서 보고한다. 당시 정부의 규정에 따르면, 개인자료는 스스로 휴대해서 옮겨가는 기관에 제출해야 한다. 이만명은 그 기회에 이력을 수정하여 스스로에게 휘황한 경력과 영예칭호를 부여한다. 그는 개인자료에 온갖 휘황한 공적을 써넣는다. 자신은 일찌기 1936년 홍군에 참가했고, 359여단에서 연장(連長)에서 영장(營長)까지 승진했고, 그후 지원군 참모장을 맡았다는 것이다. 풍부한 작전경험으로 그는 전투영웅의 칭호를 부여받았고, 모범공산당원의 칭호도 부여받는다.

 

이런 휘황한 위조된 이력으로 그는 중남군정위원회 농림부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후 중남농업과학연구소로 가서 비서주임으로 승진한다. 이해 4월 중국은 소련방문단을 조직한다. 이만명은 중국농민대표단에 포함된다. 소련방문기간동안 그에게는 미녀통역이 따라붙는다. 언어교류의 장애를 피하기 위해서.

1952년 7월 소련의 오데사농업학교를 방문하다.

이만명은 부친의 말더듬는 것을 유전으로 물려받았다. 일상대화에서 가끔 말을 더듬는다. 오직 사기를 칠 때면 대뇌가 흥분하여 말을 유창하게 하게 된다. 말더듬는 것은 사기를 치면 약도 없이 치료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는 말더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광스러운 이력'으로 날조했다.

 

이만명의 말에 따르면, 그가 말더듬는 것은 항미원조(한국전쟁)에 참가했을 때, 미군의 독기에 습격당했는데, 제때 구조되지 못해서 남은 후유증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특히 그를 수행한 미녀통역은 그러했다. 이만명은 그에게 수시로 자신의 휘황한 과거를 떠벌렸다.

 

사회생활을 많이 하지 않은 어린 아가씨는 금방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 미녀통역에게 한눈에 빠진 이만명은 그녀를 쉽게 취할 수 있었다. 소련방문의 가장 큰 성과는 이만명에게 미녀의 사랑을 얻은 것이다. 귀국후에도 두 사람은 긴밀하게 연락했고, 금방 결혼까지 하게 된다.

 

자신의 장애인이라는 설정에 맞추기 위해, 그는 매일 아침 출근할 때면 목발을 짚는다. 아주 구체적인 점까지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의 방에는 위조한 이력에서 그가 얻은 상장이 걸려 있었다. 진위를 불문하고 모두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두어서 방을 들어서면 바로 볼 수 있게 해놓았다. 그는 자신의 사기술에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기를 즐겼다. 모두 거짓이었지만, 그는 스스로 이것이 바로 자신의 진실한 이력이라고 여겼다. 

 

일찌기 감옥에 있을 때, 이만명의 몸에는 병이 생긴다. 그는 요양을 위하여, 그는 상사까지 속인다. 거짓으로 북경에 있는 수장(首長) 진갱(陳賡)이 그를 보고싶어한다고 말한다. 이만명의 상사는 바로 진갱부대의 옛 부하였다. 그는 감격하여 그에게 북경으로 가는 것을 허락한다. 그리고 그에게 진갱에게 보내는 서신을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얼마 후, 이만명은 진갱의 회신을 가지고 상사를 찾아간다. 이 서신은 당연히 진갱의 말투로 그가 위조한 것이다. 서신에는 특별히 이만명의 요양에 관한 일을 언급한다. 그의 상사는 당연히 그가 요양갈 수 있도록 돌봐준다.

 

당시는 물자가 부족하고 급여도 많지 않아, 정부관리라 하더라도 1달의 보조금은 몇위안에 불과했다. 이만명은 매달 병원으로 가서 치료받을 때 타고가는 삼륜차비용만 해도 60여위안이었다. 당연히 이 돈은 모두 공금으로 처리되었다. 그는 자신을 명실상부하게 특수대우를 받는 국가공신으로 포장했다. 전쟁터에서 싸우고, 국가를 위해 피흘리고, 몸에 부상을 입은 것이다. 지금받는 모든 우대조치는 그가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이다.

 

1953년, 중남국의 편제가 없어지면서, 모든 정부의 공무원들은 새로 일자리를 안배하게 된다. 이만명의 두드러진 기록은 그로 하여금 좋은 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전후로 몇개의 국가기관에 임직했을 뿐아니라, 적지 않은 상사들의 칭찬까지 받는다. 게다가 그가 날조한 영광된 군인으로서의 경력과 소련을 방문한 우수한 경력은 그를 북경의 농림부로 보내게 한다. 게다가 처장급 간부가 된다.

 

몇년만에 이만명은 가난한 학생에서 계속 사기술로 지방관리에서 계속 승진을 거듭한다. 결국 시에서 성으로, 다시 성에서 중앙으로 옮겨간다. 진실한 능력을 가진 우수한 인재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빨리 승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처와 결혼하면서 사업과 애정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다. 거기에 아이를 둘 낳아서 일가족은 더할 나위없이 행복했다.

 

통상적인 이치대로라면, 이만명은 이미 북경의 처장급 간부이다. 다시 더 높이 승진하려면 역시 경력배경이 있어야 한다. 조작을 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급속한 승진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이때 그만둘 것이다. 착실하게 농림부의 처장급간부로 일하지, 더 이상 승진하려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만명의 성공은 그의 욕심에서 온 것이다. 현상에 대한 불만족에서 온 것이고, 승진을 갈망하는 야심에서 온 것이다. 그는 이미 사기로 이익을 취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의 존경하는 눈빛을 받고 다른 사람들이 숭배하는 대상이 되고 싶었다. 이만명은 영원히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했고, 영원히 사기를 멈출 수 없었다. 

 

아쉽게도 그는 이번에 철저히 들통나고 만다. 그의 사기가 밝혀졌을 뿐아니라, 과거의 경력이 조작되었다는 것까지 들통난다. 과거에 어디를 가든 존경을 받던 대영웅에서 이젠 모든 사람에게 질타당하고 욕을 먿는 사기꾼이 되고 감옥에 갇힌다. 처와 자식들까지 그에게서 멀어진다. 가정과 사업이 모두 철저히 분쇄된다. 인생은 밑바닥으로 떨어져 버린다.

 

이만명이 농림부에서 받는 급여로는 일가 4명이 생활하기에 빠듯했다. 북경의 물가는 높았기 때문에, 집안이 그다지 풍족하지 못했다. 두 아이를 생각해서, 그는 다시 한번 사기수법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번이 마지막이며, 이후로는 더 이상 사기수법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1954년말, 이만명은 자신이 모부대 사령관의 급전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사전에 준비해둔 사령관이 쓴 친필서신을 내보인다. 그는 자신이 난주로 가서 중요한 군부대와 협상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농림부는 그의 말을 믿어, 금방 비행기표를 끊어서 출장을 준비한다. 1955년초, 이만명은 계획대로 서안에 도착한다. 그후에 다시 난주로 간다. 

 

그는 예전에 서안에서 공부하고 일한 적이 있다. 그래서 적지 않은 동료들과는 아직 연락하고 있었다. 그들은 뉴스보도에서 '대단한 업적'을 세웠다는 그에 대하여 관심이 있었다. 그의 적지 않은 옛 동료들이 그를 보러 온다. 그들은 공경하는 말과 태도였고, 그의 경험을 배우고 싶어했다. 이만명도 사양하지 않고 자신의 분투사를 자랑한다.

 

금방 섬서성위에서도 이만명이 서안으로 왔다는 소식을 듣는다. 성위의 간부들은 특별히 이 영웅을 위해 환영연회를 준비한다. 성위서기 장덕생(張德生)이 직접 참석한다. 이를 보면 당시 이만명의 명성이 얼마나 높고, 얼마나 널리 알려졌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연회에서 이만명의 말과 행동은 장덕생의 의심을 산다. 술이 들어가자 이만명은 경계심을 늦춘다. 그는 원래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장덕생의 앞에서 자신의 과거 경력을 떠벌이며, 하나하나 자세히 늘어놓는다.

 

그러면서 그는 여러번 강조했다. 자신은 이야군정대학의 졸업생이며, 고학력지식분자라고. 원래 말을 할 때면 약간 더듬는 이만명도 술이 들어가자 흥분하여 장덕생에게 이렇게 떠벌인다. 자신은 곧 난주로 가서 부임할 것이며, 중요한 직무를 맡게 될 것이고, 승진할 것이라고.

 

청산유수로 말을 늘어놓는 이만명을 보면서 장덕생은 그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속으로 의심만 커져갔고, 이만명이 말하는 휘황한 경력이 매우 의심스러웠다.

 

이만명이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 있었다. 장덕생이 지금은 성위서기이지만, 그의 이전 직위가 이야(二野)의 정치부주임이라는 것을. 더더구나 난주군구의 정위직위도 겸임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짜내서 기억을 되살려 보았지만, 이야군정대학에 이만명이라는 전쟁에서 부상입은 군정부과장이라는 인물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난주의 인사명령을 군구정위인 그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경계심이 일어난 장덕생은 연회가 끝난 후 성공안청에 통보하여, 이만명의 진실한 신분을 상세히 조사하라고 지시한다.

 

이만명의 개인자료에 기록된 '풍성한 업적'은 모조리 허구이고 날조된 것이다. 공안이 조사하니 바로 드러난다. 이야군정대학에는 이만명이라는 군정부과장이 없었다. 그리고 소위 이야군정대학이 서북농학원에 보냈다는 인사명령서도 거짓이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이전에 얼마나 현란하게 떠들었든지 간에 현실에서 누구도 그의 경력을 증명해줄 수 없었다. 하나도 들어맞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55년 1월 체포되고, 다시 감옥에 갇힌다. 이만명은 자신이 헛점을 드러낸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같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고, 조사관의 앞에서 자신이 했던 일을 모조리 자백한다. 이는 마치 그 자신의 사기생애를 총결산하는 것같았고, 그가 마지막으로 남에게 자신이 이룩한 성공을 자랑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만명이 체포된 소식에 중앙정부에서도 깜짝 놀란다. 이는 당시로서는 큰 뉴스였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 아무런 배경이 없는 사기꾼이 베이징 중앙정부의 처장에까지 오를 줄이야. 일시에 각종 음모론이 퍼진다. 어떤 사람은 그가 외국에서 양성한 간첩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그의 배후에 분명 반혁명집단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돌봐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빨리 승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만명의 가족도 의심을 받았고, 그의 처도 공범으로 의심받는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의 처도 감옥에 가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1년여에 걸친 수사가 끝난 후에 인민법원은 이만명이 순수한 사기꾼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무슨 조직의 기밀을 절취하거나, 정보를 전달하거나 하지도 않았고, 공금을 횡령하지도 않았고, 무슨 이익을 취하지도 않았다. 그는 혼자서 여러번 사기를 쳤고 그것은 그저 자신이 국가재정으로 먹고 놀며, 영예를 누리기 위함이었다.

 

최종적으로 법원은 이만명에게 유기징역 15년형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