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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사회

황당한 베이징: 해청낙유기(海鶄落遊記)

by 중은우시 2022. 7. 1.

글: 수루처(獸樓處)

 

한밤중, 침대곁에 놓아둔 핸드폰이 윙윙 울렸다.

비몽사몽산에 전화를 받았는데, 198로 시작하는 낯선 전화였다. 전화 저쪽에서 한 남자가 빠르게 나의 이름과 신분증번호를 불렀다.

그는 묻는다: 네가 맞느냐. 나는 무의식중에 '응'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나는 통저우구의...., 너는 6월 10일 웨이라이후이(未來匯)쇼핑센터에 간 적이 있느냐? 너는 지금 통저우의 XX단지에 살고 있지 않으냐?"라고 말했다.

나는 이미 여러해 전에 이사를 갔고, 위안양웨이라이후이(遠洋未來匯)에 놀러간 적이 있으며, 아이를 데리고 가서 식사를 하고 3층에 올라가서 영화를 봤다고 말했다.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위안양웨이라이후이의 난징다파이당(南京大牌檔)에 확진자가 나왔으니, 너도 이틀내에 PCR검사를 해야 한다. 백신은 몇차례 맞았느냐. 지금 어디에 사느냐. 지금 몸에 이상은 없느냐?

나는 정신이 들었다. 그에게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차오양구의 주소를 말해주고, 백신은 3차례 맞았으며, 5일동안 4번 PCR검사를 했으며, 마지막으로 한 것이 어제 저녁 7시라고 말했다. 

그는 너의 건강보(健康寶, 앱)에 내일 팝업이 뜰 것이라고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나는 침대등을 켜고 핸드폰을 보았다. 시간은 새벽 1시 29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의 전화를 떠올렸고, 통화기록을 보았다. 원래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팝업뉴스에 이렇게 적혀 있다: 6월 7일이후 웨이라이후이에 갔던 사람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말고 즉시 단지(小區, 우리나라의 주택단지에 해당함)사무소에 보고하라고. 

나는 급히 단지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그날은 내가 똑똑히 기억한다. 나는 저녁 7시에 귀가했고 아이를 데리고 식사하러 갔고, 영화를 봤으며, 아주 간단하게 생일을 축하했다. 그리고 특별히 사람이 비교적 적은 쇼핑몰을 선택했었다.

자운사교(慈雲寺橋)의 위안양웨이라이후이

우리는 7시반에 웨이라이후이에 도착했다. 먼저 1층의 햄버거가게에서 햄버거를 샀고, 다시 2층의 남경대패당으로 가서 계혈분사(鷄血分絲) 두 그릇을 먹었다. 그리고 3층으로 가서 8시에 시작하는 <쥬라기공원3>을 보았다.

영화관을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 아이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아빠, 한달만에 처음 나와서 식사를 하고, 영화를 봤어요. 너무 좋아요."

차오양구의 업무인원이 나중에 나에게 말해주었다. 우리는 한 양성확진자와 웨이라이후이에서 시간과 공간이 겹친다는 것이다. 

1주일후, 창핑(昌平)의 집중격리하는 공용임대주택에서, 아이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말 잊을 수 없는 생일이었다고.

 

1. 

 

4월초, 나는 아직 야채도 제대로 구하지 못하는 상하이시민들을 동정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다. 나도 곧 격리당할 줄은 그것도 한번만이 아니라.

4월 25일 오후 동료는 단체방에서 코로나공고를 올렸다. 차오양의 한 단지에 양성환자가 나왔다는 것이다. 보니 내가 사는 단지였다. 그리고 바로 옆 동이었다.

건물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더니, 직원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사는 건물도 이미 관리통제중이다"

관리통제구역은 봉쇄관리구역보다는 낫다. 7일간 자택격리를 하면 되고, 가끔 집밖을 나갈 수도 있다. 단지에는 파란색의 임시담장을 둘러친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학교를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다. 

7일의 자택격리는 너무 길었다. 끝나는 날 오후, 이웃은 단체방에 건물관리사무소가 임시담장을 철거하는 장면을 생중계했고, 한 이웃은 이렇게 말한다: 자유가 정말 좋구나.

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의 소리도 소음으로 들리지 않았다.

단지는 해제되었으나, 단지바깥은 더욱 엄해졌고, 많은 곳은 14일간 봉쇄관리되었다. 

5월 1일, 식당도 없고, 상점도 문을 닫았다. 지하철, 시내버스도 모두 멈췄다. 나의 사무실도 폐쇄되었다.

집을 나선 것은 바로 아이를 데리고 가서 코를 쑤신 것(PCR검사)이고, 가는 김에 야채를 샀다.

5월 6일날 저녁 나는 공유자전거를 타고 나가서 야채를 샀다. 사무실 근처로 가서 둘러보았다. 막 비가 내려서, 적막한 궈마오(國貿)는 환상적인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고층건물을 하나하나 지나갔고, 큰길을 하나하나 건너갔다.

비온 후에 맑은 날씨의 고층건물과 도로는 모두 깨끗했고, 기본적으로 모두 비어있었다. 

5월 28일, 나는 사무실의 건물관리사무소에 물어보았다. 위험지역도 아닌데 왜 1달간 봉쇄관리하는지. 건물관리사무실직원은 자신들도 기준을 모르겠다면서 내일 단지사무소로 가서 따져보겠다고 말한다. 

사실은 증명했다. 자신의 권리는 자신이 쟁취해야 한다. 다음 날 건물관리사무소는 나에게 말했다. 그들이 금방 단지사무실에서 왔는데, 내일 사무실이 정상으로 회복된다고 말한다. 그는 동시에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건물관리비를 내줄 수 없겠느냐. 우리가 급여도 못줄 상황이다."

 

2

 

6월초, 베이징은 점진적으로 공공장소를 개방했다. 식당도 개방되었다. 개방된 그 금요일에 우리는 웨이라이후이를 간 것이다.

6월 15일 오전, 단지에 내가 웨이라이후이에 갔었다고 보고하자, 단지에서는 나를 즉시 자가격리시켰다. 1시간후, 우리 집의 문에는 도어센스가 설치되었고, 건강보도 황색코드로 바뀌었다. 거기에는 4글자가 쓰여 있었다:

거가관찰(居家觀察)

이날 내가 거주하던 단지의 모든 방역부서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통저우, 차오양, 하이덴, 어떤 주소는 나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통화내용은 모두 똑같았다. 나는 똑같은 말로 계속 역학조사에 대답해야 했다.

저녁12시가 지나서, 나는 다시 전화때문에 잠에서 깬다. 나는 이미 격리되고 있다. 역학조사에 여러번 대답했는데, 당신은 보지 못했냐고 물었다. 

그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우리는 못봤다고 말한다.

다음 날, 나는 7시에 깼다. 핸드폰에는 18개의 부재중통화가 걸려와 있었다. 대부분은 새벽 3,4시에 온 것이었다.

그들도 힘들겠다.

이때 단지사무실의 근무자에게 전화가 왔다. 너희 일가족은 창핑으로 가서 집중격리해야한다고 말한다. 9시넘어 차가 올 것이니, 빨리 짐을 챙기라고 말한다.

1시간여우, 창핑으로 가는 길에서 3바퀴나 돌고서야 격리장소를 찾아냈다.

7,8개 동의 새로 지었지만, 길이나 상점에는 풀이 길게 자라고 있는 아파트였다.

접수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가족은 이곳에 7일간 격리되어 있어야 하고, 7일후에는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7일간 자가격리해야 한다

집은 20평방미터 가량이었다. 탁자 1개, 작은 쇼파 1개, 그리고 1.5미터까지 나무판. 판위에는 아주 얇은 요가 깔려 있었다. 하얀색의 벽은 칠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했고, 벽에는 샤오미(小米) TV가 걸려있었다.

침대위, 쇼파위, 바닥에는 모두 머리카락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이 집은 인테리어한지 얼마되지 않은 것이냐. 냄새가 많이 난다고 말했다. 그러자 관리인은 이 집은 지은지 이미 7,8년이 되었다고 말한다.

단지 아무도 살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문을 닫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관리인이 다시 문을 두드린다. 그는 문서를 몇개 건네준다. 뒤져보니 한장은 격리리스크승락서가 있는데, 집중격리관찰 14+7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문서를 건네준 관리인에게 물었다. 문서에 쓰인 격리일수와 등기된 격리일수가 다르다고 말했다. 관리인은 자신은 잘 모르겠다면서 서비스센터에 전화해보라고 말한다.

나는 서비스센터에 전화했다. 그곳에서는 누가 너에게 그렇게 말했느냐. 말한 사람에게 가서 따지라고 대답한다.

나는 위챗으로 단지사무소의 직원에게 물었다. 집중격리규칙이 어떻느냐고. 그러자 단지사무소에서는 구체적인 것은 집중격리호텔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이전의 경험으로는 집중격리14일이다. 

기준은 없고 그저 경험만 있다는 것이다.

첫째날 저녁의 식사는 인스턴트라면 1개, 닭고기소시지 1개, 간된 달걀 1개. 서비스센터에서는 오늘 200여명이 들어와서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라면을 먹고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또 역학조사이다. 하이덴구의 단지이다. 전화에서 상대방은 나의 이름을 묻고, 현재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물어본다.

나는 창밖의 흐릿한 하늘을 쳐다보면서 자신이 마치 홍수에 갇혀 있는 것같다고 느꼈다.

 

3

 

이 규모가 크지 않은 단지는 바이두에서 검색해도 이름이 없다.

서비스센터에서는 이곳을 "해청락의학관찰점(海鶄落醫學觀察點)"이라고 불렀다. 해청락은 창핑의 한 마을이고, 텐통위안(天通苑)에서 북으로 몇 킬로미터 더 가야 한다.

창핑에는 소산권(小産權, 국유토지가 아닌 집체토지에 지은 집의 소유권을 말함. 법의 보호를 충분히 받을 수 없어서 여러 문제점을 야기시키고 있음)의 집들이 아주 많다. 2010년 3월, 해청락촌은 집체토지에 임대주택을 짓기로 결정한다. 당시는 시의 고위관리들도 해청락으로 와서 시찰했고, 건설하면서 절차를 밟도록 하는데 동의했다.

제1기 임대주책은 그해 연말에 착곡한다. 모두 1,800채. 2014년 10월에 준공한다. 그러나 절차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해 지난 8년간 이 집들은 그저 비워두고 있다.

현재, 이 이름도 없는 주택단지는 저녁에 불이 켜지고 있다.

6월 17일 아침, 차오양의료팀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급히 물었다. 격리기간이 며칠이냐고.

그녀는 말했다. 7일후 코를 쑤셔서 PCR검사를 하고, 환경샘플채집을 해서 만일 음성이면 우리가 단지사무실에 연락해서 데려가도록 전한다고 했다.

나는 다시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면 며칠이나 격리되어야 하는지 물었다. 의료팀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건 각 단지사무실이 결정한다는 것이다.  

해청락 격리장소는 대학기숙사와 비슷하다. 1층에 10여칸이 있고, 모든 칸의 입구에는 붉은색의 등받이없는 플라스틱의자가 놓여 있다. 업무인원은 먹을 것을 그 위에 놓아두고, 문을 두드린다. 식사를 받으라는 뜻이다.

매일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먼 곳에서 가까이 다가온다. 우리 방의 문에서 똑똑똑 하는 소리가 들리면, 아이는 기뻐하며 말한다: 사육사가 또 음식을 넣어준다.

그후에 아이는 N95마스크를 끼고 걸어가서 문을 열고 음식을 가져온다.

다음 날이후에는 음식이 많이 좋아졌다. 아침에는 우유가 있고, 점심과 저녁에는 도시락외에 과일도 조금 넣어주었다. 도시락은 고기종류 3가지에 야채종류 2가지로 양도 아주 많았다.

시간은 이곳에서 아주 느리게 흐른다. 매일 아침을 먹고 나면, 아이가 탁자에서 IPAD로 수업을 듣는다. 나는 침대에 누워 책을 본다. 가끔 일어나서 창밖을 쳐다본다.

우리는 2층에 거주했는데, 창밖은 작은 화원이다. 방은 서향이고, 저녁이 되면 높은 건물의 위로 약간의 석양도 볼 수 있다.

매일 아이는 오후에 수업이 끝난다. 그러면 우리 둘은 같이 점핑잭(팔벌려뛰기)를 한다. 만일 비가 내리지 않으면, 우리는 창문으로 태양이 지는 것을 본다.

저녁을 먹은 후, 핸드폰에 연결시켜 샤오미TV로 영화를 본다. 10시에 아이는 잠이 들고, 나는 컴퓨터를 꺼내, 탁자에 앉아 일을 잠깐 본다.

집중격리의 자폐정도는 자택격리의 100배정도이다. 밖에서 흰색방호복을 입은 '사육사'들이 오고가고 있어, 진공속에서 살아가는 느낌이 든다.

어느날 아침, 아이가 일찍 일어났는데, 얼굴이 우울해 보였다. 나는 무슨 일인지 물어봤다. 그녀는 금방 꿈에서 랍스터를 먹었다고 말한다.

6월 23일, 하루종일 기다려서 저녁 6시가 되었고, PCR검사결과가 마침내 나왔다.

다음 날 정오, 마침내 귀가차량에 몸을 싣게 된다. 나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여기에 격리된 183명은 남경대패당에 갔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차를 타니, 운전기사가 요즘 매일 사람을 격리장소로 태워 나르고 있다고 한다. 어제는 한 할머니를 태웠는데, 차를 타자마자 자신은 억울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동청구의 한 만두가게 입구에 30초간 서 있었을 뿐인데, 집중격리되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기사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단지 건강코드만 봅니다.

어떤 곳에서는 건강코드를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허난에서는 만일 은행의 대출을 갚지 않으면, 고속철을 탈 수 없다고 한다. 만일 은행이 네 예금을 인출해주지 않으려고 하면, 집의 문조차 나갈 수 없게 만든다.

 

4

 

단지사무소의 직원과 건물관리사무소의 직원이 문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집문까지 호송해주었고, 그후에 우리 집의 문에 붉은 종이테잎을 붙인다:

"여러 이웃들께.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여, 우리는 6월 24일부터 자택에서 의학격리합니다. 7월 1일에 끝납니다."

6월 15일 자택격리당하고, 6월 16일 집중격리당하고, 6월24일까지 있었다. 나는 기실 10일간 격리당한 것이다. 이 종이테잎이 의미하는 것은 내가 7월 2일이 되어야 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때는 내가 남경대패당을 간지 이미 22일이 지났다. 질병통제센터에서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오미크론의 평균잠복기는 2일 내지 4일이라도, 절대다수의 양성은 7일내에 검출된다고.

나는 단지사무소의 직원에게 말했다. 입국격리도 지금은 7+7인데, 나는 단지 같은 장소, 시간대에 있었을 뿐인데, 이렇게 계속 격리해야하는거냐고. 단지사무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들도 빨리 내보내주고 싶지만, 가도판사처(가도는 우리나라의 동에 해당하고, 가도판사처는 우리나라의 동주민센터에 해당함)의 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고.

자택격리는 집중격리보다 훨씬 편했다. 그러나 아이는 아주 초조해 했다. 담임선생님이 연락해서, 다다음주에 기말시험을 본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다음주 금요일까지 격리당해야 한다.

위안양단지의 친구는 내가 아직 격리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는 그들 단지는 7일동안 봉쇄되었는데, 나중에 12345를 통하여, 4일후에 해제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12345에 전화를 걸었고, 나의 격리경력을 하나하나 말했다.

12345의 근무자는 인내심있게 들어주고는 문제를 가도판사처로 떠넘겼다. 가도판사처는 문제를 단지로 떠넘긴다. 단지사무소는 나에게 계속 이렇게 말할 뿐이다:

우리는 가도판사처의 정책을 집행할 수밖에 없다.

25일, 가도판사처의 12345는 다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고, 나의 요구사항을 물어본다.

나는 요구사항은 2가지라고 했다: 하나는 격리기준이 뭔지 알고 싶고, 둘은 이 문제를 단지로 떠넘기지 말라고 했다. 그들은 아주 바쁘고 확실히 아무런 권한도 없다고.

1시간후, 나는 차오양구의 전화를 받는다. 그녀는 시스템에서 나의 상황을 보았다고 말하면서, 같은 시간, 공간에 있었던 사람은 현재 새로운 정책이 나왔다고 한다. 자가격리때로부터 계산하여 만14일이 되면 격리가 해제된다고.

그녀는 나의 단지 직원으로 하여금 그녀에게 전화를 걸게 하라고 했다.

단지에서 즉시 전화를 걸었고, 10분후, 그녀는 위챗에서 나에게 엄지손가락 아이콘을 보냈다. 나의 격리정책은 새 기준에 따라 집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틀 일찍 나가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단지 사무소 직원은 당신이 우리 단지에서 가장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정말 실력이 있다고 치켜세워주었다. 내가 무슨 실력같은 게 있겠는가. 나는 그저 알고 싶었을 뿐이다.

기준이 도대체 무엇인가?

29일 오전, 단지의 병원에서 집으로 찾아와 PCR검사를 했다. 저녁 9시 40분, PCR검사결과가 나왔고, 나는 그것을 단지사무소로 보냈다.

30일새벽 12시 20분 나의 건강코드는 황색에서 녹색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문에 붙어 있는 홍색종이테잎을 떼어내서 서랍에 넣어두고, 친구들에게 매세지를 보냈다. 어떤 친구는 답글을 남겨서 어째서 그렇게 오랫동안 격리되어 있었는지 물었고, 어떤 가서는 안될 곳을 간 것이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단지 아이를 데리고 쇼핑몰로 가서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면서 생일축하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내가 격리에서 해제되기 2틀전, 국무원은 제9판 신종코로나방역방안을 내놓았다. 밀접접촉자와 입국인원에 대한 격리기간을 7일집중+3일가택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밀접의 밀접은 7일자가격리로 조정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기준에 따라르면, 나는 7일 자가격리만 하면 된다. 

해청락의학관찰점을 떠나면서, 나는 이 낯선 지명을 찾아보게 되었다.

해청은 바로 해동청(海東靑)이다. 즉, 유목민족이 사냥에 쓰는 매이며, 만응지신(萬鷹之神)이다. 이 마을을 해청락이라고 부르게 된 배경에는 한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원나라말기 몽골족의 한 왕야(王爺)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것을 즐겼다. 사냥으로 인하여 백성들은 왕왕 괴로움을 당해야 했다. 한번은 사냥을 나섰는데, 그가 기르는 해동청 한 마리가 날아오른 후 계속 내려오지 않고 있다가, 결국은 땅바닥에 떨어져 사망하고 만다. 왕야는 마음아파했고, 그후로는 사냥을 나가지 않았다.

현지 백성들은 그 해동청에 감사했고, 그 해동청이 떨어진 곳을 "해청락"이라 부르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