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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사회

중국은 "내시화(太監化)"를 경계해야 한다.

by 중은우시 2022. 7. 6.

글: 요의(饒毅)

 

비록 중국에서 백년전에 이미 운용시간과 규모에서 세계최선진적이던 내시체계(太監體係)를 끝냈지만, 문화습속, 개인행위의 내시화경향은 그 이후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 문제의 보편성은 아직 광범위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수시로 '발양광대(發揚光大)'하고 있다. 그리하여 내시화문제는 꺼내서 반성해야 한다. 내시화현상은 비판이 너무나 필요하다. 왜냐하면, 어떤 때, 어떤 범위에서 내시화가 과도함으로 인하여 사회의 건강을 해치고, 국가의 발전을 저해한다. 내시화된 사람과 행위는 갈수록 많아지고 있고, 국가발전은 갈수록 희망이 묘연해지고 있다.

 

무엇인 "내시화"인가? 인격이 없고, 무책임하게 권력자에게 아부하고, 시비도 따지지 않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도모하며, 이상도 없다. 국가에 불리하지만 사회에 기생한다. 모두 문화습속행위의 내시화이다. 내시화된 인격은 이상이 없다. 먹고 살 것을 얻어서 구차하게 연명하는 것이 생명의 의의라면 그것은 애완동물이나 다름이 없다. 내시화된 행위에는 시비를 따지지 않고, 이익만 다투어서 야생동물이나 다름이 없다.

 

역사적으로 내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오직 권력자에 잘보이면 된다. 많은 경우는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한 것이고, 부득이 권력자를 위해 일하는 것이니 이해할만한 점이 있다; 현실의 내시화도 공적인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공적이익에 책임지지 않으며, 스스로 원해서 권력자에 아부하여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해해주기 어렵다. 옛날에는 내시가 봉사하는 대상은 단일했지만, 현재의 내시는 일시적인 이익을 제공해줄 사람에게는 모두 고개를 숙인다.

 

현재 적지 않은 공인된 '성공인사'들은 '꼬리를 말고 지낸다' 기실 이것도 내시화가 잠이묵화(潛移默化)된 결과로, 부지불식간에 내시화로 배양된 사람인 것이다. '꼬리를 말고 지낸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고 남이 뭐라고 말하면 그렇게 말하고, 행위도 두드러지면 안되어서 최대한 적게 행위하거나 행위하지 않는다. 일처리를 하면서도 너무 잘해서도 아니고 전심전력을 다하지 않는다. 심지어 일상생활중에서는 그저 '부탁하고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무능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아부를 통해서 자원을 장악한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고 지원을 받아내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꼬리를 말았다가 적당한 직위에 오르면 확실하게 일을 해낸다. 그런 사람은 피동적인 내시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꼬리를 말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서 결국 나중에 무슨 기회를 맞거나 여건이 되더라도, 정상인의 모습으로 되돌아오지는 못한다. 평생 내시화를 끝까지 진행하여, 권력과 돈을 얻어서 득의양양한다. 자존(自尊)이라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수치(羞恥)라는 것이 뭔지도 모른다.

 

내시화는 사회에 여러 방면에서 해를 끼친다. 사회의 중대한 문제는 원래 여러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여러 방안을 제기하고, 논쟁과 비판을 거쳐 적용을 하고, 시행착오를 거친 다음 널리 추진하게 되는 것이다. 내시화된 방식은 실제로 상사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사에게 일시적인 체면을 세워주는 것일 뿐이다. 더더구나 국가의 장기적인 발전이나 이익은 생각지 않는다. 단지 부하를 관리감독하고, 압박하며, 책임을 모두 위로 떠넘길 뿐이다. 사건이 터지면 모두 본체만체 한다. 여러 분야에서 내부인은 내부인들끼리 외부인은 외부인들끼리 싸운다. 내부투쟁이 오래가고, 내부투쟁에 열중한다.

 

문학예술방면에서, 내시화는 이렇게 나타난다: 일부 원래 재능있는 사람이 스스로 무슨 창조적인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할 뿐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대담하게 탐색하는 것도 못하게 막는다; 일부 원래 재능없는 사람이 '예술가의 태상황'이 된다. 내시화된 분위기는 예술가의 상상력을 막고, 예술의 질이 저하되며,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가진 유치한 오락만이 나올 뿐이다. 

 

원래 내시화문제가 과학기술계에서는 비교적 영향이 적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국가는 과학기술혁신을 장려하고 제한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내시화는 여전히 기풍으로 과학기술계에 침투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꼬리를 말고 산다"는 신앙을 가지고, 연구를 할 때도 윗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꽌시를 맺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 독립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과학적으로 성취를 거둘 것인가? "꼬리를 말고 사는 사람"이 어떻게 창조적인 일을 해낼 수있을 것인가.

 

과학혁신은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서 남다른 생각을 하고, 과감하게 생각하며 과감하게 행동한 결과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르지 않은 산물인 것이다. 과학연구는 중요한 점에서 사평팔온(四平八穩)해서는 안되고,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배척하고, 자신의 방향을 견지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많은 걸출한 과학자들은 창조력이 뛰어날 때, 사평팔온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다른 사람들과 조화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만일 모두가 금방 인식하고 받아들일만한 새로운 관점이나 방식이라면 일반적으로 그것은 아주 창조적이지는 않다. 많은 남다른 생각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지 않지만, 그런 생각들이 많이 나타나고 연구하게 해야만 비로소 그중 소수의 진정 뛰어난 지식을 발굴해낼 수 있고, 그것이 꽃피고 열매맺게 해주어야 한다. 여러가지 서로 다른 방법중에서 소수만이 결국 사회의 발전을 이끈다. 다만 만일 새로운 방식을 제기하지 않는다면(잘못된 생각을 포함해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내시화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전에는 아마도 전인민이 머리를 굴려도 진정 뛰어난 지식을 발굴해낼 수 없고, 앞다투어 노력하여 일을 성취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모두가 책임을 지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인이 내시화를 부끄러워하고, 사회는 내시화를 버리고, 국가는 내시화를 경계해야만 나라가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