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Mikhail Svetlov
우크라이나전쟁을 일으키고 지지하는 사람들은 남다른 눈으로 이 세계를 보고 있다: 그들이 보는 것은 한장의 경계선, 세력범위, 목표와 대상이 있는 지도이다. 이 상상속의 지도에 각국의 곁에는 모두 한 곳에 ‘주권’이라는 색인이 주석으로 붙어 있다; 이곳에는 강대하고 자주적인 ‘수퍼대국’이 있고, 보통의 ‘대국’이 있고, ‘지역적대국’이 있고, ‘보통국가’가 있다. 다만, 지도에 ‘사람’이 설 자리는 남겨두지 않았다. 이 지도에서 개인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Maxim Trudolyubov(Meduza의 편집인)는 이런 지연정치관은 조준경을 통해서 보아야만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위의 세계에서 강권이 정의이다. 약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저 굽실거릴 수밖에. 각국은 합종연횡하며 수시로 충돌하고 수시로 결탁한다. 약국은 반드시 강국을 두려워해야 하며, 그저 약간의 주권을 유지할 것만 기대할 수 있다. 동시에 규모가 비교적 크고, 실력이 비교적 강한 국가는 훨씬 큰 주권을 가진다. 규모가 가장 큰 국가가 가지는 주권은 사람들의 상상의 극치에 이를 정도로 크다.
큰 주권을 가진 나라는 ‘큰싸움’을 진행한다. 장기판에서 장기알을 옮겨놓는다. 이들 국가는 세계질서를 결정하는 ‘대전략’과 ‘지연전략목표’가 있다. 우리는 이런 세계관을 지연정치세계관이라고 부른다.
19세기 하반기부터 20세기말기까지, 지연정치세계관은 구미사조에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최근 수십년간 정치엘리트들이 이 견해를 지지할 때는 왕왕 그저 함축적으로 표시한다. 이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수백수천만의 사람이 사망하고 무저갱식으로 파괴되는 일이 벌어졌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계를 이해하는 투시경으로서의 지연정치세계관은 명성이 바닥에 떨어진다. 지연정치사상의 최전성기에 2차례의 세계대전이 발생한다. 그것은 몇 개의 국가들 예를 들어, 독일, 일본의 지도자들이 본국에 유리한 세계질서를 다시 짜려고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이런 암흑의 역사가 있지만, 지연정치세계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런 저런 모습으로 여전히 국제관계학자와 일부 정치가들(특히 강력한 정치가)의 공통점이다. ‘역사원한’을 배양하는 정치지도자에 있어서 지연정치는 항거하기 어려운 유혹이 된다.
이런 원한은 독을 지는 ‘혼합물’이다. 역사신화, 영토상실과 경제실패를 민족원한에 연결시킨다. 그리고 자국의 가치체계를 거절하는 외부위협과 외국의 적에 집착한다. 이런 사고는 푸틴을 해쳤을 뿐아니라, 다른 기본적으로 그와 뜻이 맞는 독재자들도 해쳤다. 모든 이런 이들은 계속하여 과거의 굴욕, 충분히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점, 어떤 외국세력의 적의 그리고 소위 불공정한 현대세계의 경계선에 대하여 원망을 한다.
이런 견해는 대중의 원한에 영합하는 정치가들에게 유혹적일 뿐아니라, 외교정책이론가, 학자와 분석가들에게도 유혹적이다. 그들이 ‘대국정치’라는 말을 꺼내면서 이를 가지고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을 설명하려고 하고, 심지어 변명하려고 한다.
러시아당국이 이런 분야에서 가장 종하나는 학자는 시카고대학 정치학자 John Mearsheimer이다. 그는 계속하여 주장해주고 있다. 모스크바가 일으킨 우크라이나침략전쟁은 미국과 서구에 책임이 있다고. 미어샤이머의 주장에 따르면 러시아군이 인근국가의 평화로운 도시를 폭격한 것은 모두 NATO확장 및 ‘우크라이나를 친미자유민주국가’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러시아의 각도에서 보면, 이는 생존위협이 된다고 말한다.
이런 추리는 보통국가와 대국간의 상대적인 관계를 배제한 주관적인 것이다. 이런 눈으로 세계를 본다면 ‘강권’은 단일하고 통일적인 실체이고, 마치 사람과도 같다. 이런 사고방식은 이들 국가내부의 모든 생명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서로 다른 신앙, 신념, 이견, 계획과 인생을 가진 사람들을. 이런 세계관은 이런 다양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저 상상속의 경제와 문화활동의 거인을 보고 있을 뿐이다.
이런 대입은 언어측면에서도 충분히 드러난다. 지연정치적인 견해를 보면, 자주 국가가 “결정했다” “하고자 한다” “당했다” “모욕받았다” “분노했다”와 “호소한다”는 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국가는 그 어느 것도 할 수가 없다. 살아있는 생명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 외에 여하한 국가의 의사결정에도 국내에는 많은 반대자가 있다.
모든 생명이 사라지는 것은 먼저 이론적으로 나타나고, 다시 나아가 거대한 지연전략사상을 해석하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대다수의 ‘세계질서’와 ‘대국정치’의 관점에서 사고하는 사람들은 생명을 말살하고 미래의 관념을 만든다. 이런 세계관의 신봉자들은 그저 자신이 결핍에 빠진다. 그들은 단지 생명이 없는 실체를 새로 구성할 뿐이거나 혹은 학술학위를 위하여 연구할 뿐이다. 이런 ‘과학’이 응용될 때 진정한 재난이 발생한다. 이때 지연정치는 권력자의 유일한 언어가 되어 버린다. 일단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전쟁의 참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세계의 비인간화는 더 이상 이론에 머무르지 않는다.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다. 지연정치학을 실천에 응용하면 여하한 살아있는 생명도 행동, 관점의 개념이 말살된다. 그것은 사람의 집을 파괴시키고, 그것은 자신의 생존외에 아무런 가치도 담지 못한다. 그것은 권력의 극단화를 가져오며 정권과 경계선의 신성화를 주장한다. 이런 정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도위의 추상적인 선을 위해 죽음으로 내몰리게 하고, 더러운 진흙땅을 위해 피를 흘리게 만든다. 지연정치학의 응용은 여하한 가용자원을 모두 전쟁에 동원하고, 생산적인 경제를 대체한다. 사람의 생명권, 자유권과 재산권은 무시되어버린다.
정부측면에서, 권력자는 본국의 군인과 민간인의 사상을 신경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얼굴이 없는’ 실체인 대국간에 진행되는 투쟁에서 ‘보통사람’의 사망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기의 행동자와 피해자는 모두 “나라”이지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를 비인간화로 운용하는 원리이다.
특히 파괴적인 행위는 일생을 ‘큰싸움’에 헌신한 지연정치가들에 의해서 일어난다. 러시아에서 이는 왕왕 ‘선택적 현대화’로 실현된다. 우리는 피요트르1세, 예카테리나2세, 스탈린과 당대의 푸틴에게서 모두 이 점을 본다.
자원부족을 인식하면, 다음 권위주의통치자는 역량을 집중하여 육해공군의 현대화를 실현한다. 그러나 나머지부문은 왕왕 낙후된다. 그 결과 권위주의통치자들이 얻어내는 것은 경제와 기술이 낙후되었지만, 서로 다른 정도의 전쟁은 일으킬 수 있는 국가인 것이다.
낙후와 부패는 러시아로 하여금 아무도 흥미를 갖지 않게 만들었다. 어떻게 보더라도, 이 국가는 누군가의 모범이 될 수가 없다. 러시아게 세계에 줄 수 있는 것은 야만적인 힘이다. 이것이 러시아가 연맹을 얻어내는 유일한 수단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스스로 동맹이 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론적인 상황이다. 다만 현실적인 상황은 더욱 엉망이다. 러시아의 지도자는 이미 세계에 표명했다. 폭력을 통제하지 않겠다고. 만일 대국의 ‘사무’를 담당하려면 반드시 신뢰할 수 있게 제어해야 한다. 러시아에서 우리는 민용경제와 기술혁신의 실패를 보았을 뿐아니라, 모든 대국정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군사조직의 질에서 실패를 보았다.
이것은 처음 발생한 상황이 아니다. “500년동안 러시아외교정책의 특색은 바로 팽창하는 야심이 국가의 능력을 넘어섰다.” 역사학자이자 스탈린전기의 작가인 Stephen Kotkin의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국가는 상대적으로 낙후된 상황에 곤란을 겪었다. 특히 군사와 공업분야에서. 이는 정부로 하여금 재삼 미친 듯한 따라잡기운동을 전개하게 만들었고, 이렇게 하여 사람들이 아주 익숙하게 된 주기가 나타난다. 국가주도의 강제적인 공업성장이 정체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모델은 단지 러시아와 서방간의 격차를 확대할 뿐이었다.
러시아의 권위주의는 스스로 붕괴하는 조건을 창조했다. 모든 핵심의사결정은 최고지도자가 스스로 내린다. 그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더욱 큰 공포심을 조장한다. 그가 얻은 정보중 신뢰할만한 것은 점점 줄어든다. 신하가 굴복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여 군주의 분노에 스스로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동시에 그 과정에서 자기 주머니를 채운다. 그리하여 이들 심복들이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은 단지 통치자에게 그가 듣고싶어하는 ‘사실’만을 전해주는 것이다.
권위주의통치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상황을 더욱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다만 이런 자신감은 부하들의 거짓말의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권위주의의 근본문제이다. 이것이 바로 왜 권위주의통치자가 강대하지만 극히 취약한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시스템이 고장날 경우, 그들은 더 쉽게 피해를 입는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러시아가 보여주는 실패의 본질이다. 우크라이나에서 무엇이 발생하든지간에. 거짓말과 부패 위에 세워진 푸틴의 지연정치는 이미 실패했다. 경제, 기술이 지리보다 중요한 시대에, 그는 20세기식의 지연정치를 재현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다가 결국은 수습불가능한 상황에 빠졌다.
푸틴의 지연정치연막의 배후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공허가 숨겨져 있다. 아마도 그는 또 다른 위기를 조성하여 권력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는 우크라이나인들의 그에 대한 모욕을 보복하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단지 과유불급이어서 문제였지. 그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다만 이런 동기는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연정치식 언어로 표현했다. 그 배후의 가설은 바로 인명경시이다. 지연정치를 추구하게 되면 사람은 당국에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만일 러시아에게 여하한 미래라고 있다면, 더 이상 지연정치에 공간을 주지 말아야 한다. 이후의 러시아정부에서 여하한 흑마법의 신도를 용납해서는 안된다. 공개적으로 외국위협을 조성하거나, 인민공적을 만들어내거나, 피점령영토의 민족원한을 심어주어서는 안된다. 오늘날의 제국경게선은 반드시 허구의 신성성을 상실해야 한다. 어쨌든 그들은 계속하여 허구물이다. 전쟁, 붕괴된 제국, 담판, 언뜻 떠오른 생각과 실수의 결과. 경계선은 지하에 묻어둔 전투이다. 그것이 다시 지상으로 올라오도록 만들어서는 안된다.
만일 당금의 우크라이나재난에 무슨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연정치학의 민낯이 철저히 드러났다는 것일 것이다. 지연정치학은 폭격기의 조종칸에서 보는 세계이다. 러시아의 전쟁꾼들은 여기에서는 외롭지 않다. 모든 ‘대국정치’ 언어로 전쟁을 옹호하는 자들이 그의 곁에 앉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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